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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여행

인물과 역사를 바로 알고 현재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 봄으로써 선조들의 지혜를 알아 봅시다.

지난 시간여행
제목 시간여행 제130호
등록일 2009. 8. 21.
첨부파일 첨부파일없음

안중근 의사 출생 상세정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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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시작황해도 해주 출신인 안중근(安重根, 1879.9.2 ~ 1910.3.26)의사는 을사늑약 이후 삼흥(三興)학교를 세우는 등 인재양성에 힘쓰는 한편 독립군의 일원으로 만주 등지에서 항일운동에 전념하였다.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의 합법적인 투쟁이 무의미함을 실감한 안중

근 의사는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잘라 맹세하고 단지동맹을 결성 본격적인 항일 투쟁의 길에 들어섰다. 동지 우덕순(禹德淳) 등과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 암살계획을 세우고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하여 하얼빈역에

잠입, 거사를 성공시켰다. 삼엄한 경비 속에 도착한 이토를 사살하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이듬해 2월 사형 선고에 이어 3월 26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사회
어린이집 창시자 몬테소리 출생

내용시작이탈리아 안코나 출생의 마리아 몬테소리(Maria Montessori, 1870.8.31~1952.5.6)는 이탈리아의 유아/아동교육자로 노동자 자녀들을 위한 유치원 ‘어린이의 집(Casa dei Bambini)’을 열어, 이른바 몬테 소리법에 의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어린이의 권리존중을 주장하여 자유스러운 교육과 개성발전교육을 역설하였다. 이른바 몬테소리 운동으로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유아교육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몬테소리법(法)이란, 교사들의 권위주의적 교육에 강력히 반대하고 어린이의 권리존중을 주장하여 어

2000년 스리랑카 발행

린이의 신체 및 정신의 발달을 북돋우는 자유스러운 교육과, 어린이 하나 하나의 활동리듬에 알맞은 개성발전교육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육 방향이 어린이들로 하여금 자율성과 자발성을 배

울 수 있도록 하며, 자기개발에 적합한 환경을 만들어 가고, 감관(感官)의 훈련이야말로 모든 정신발달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하고, 갖가지 놀이 도구를 고안하여 감관을 훈련시키고자 하였다. 몬테소리 교

육은 이전의 교육과는 다른 실천교육이자 과학적 교육이라는 차별성이 있으며, 그녀 자신만의 독특한 교육방법과 교구를 개발하여 보급시킨 점은 몬테소리가 세계 교육에 미친 가장 큰 공헌이라 할 만 하다.

흑해 여객선 침몰

2002년 러시아 발행

내용시작1986년 8월 31일 흑해 북쪽바다에서 승객과 승무원 천2백34명을 태운 소련 여객선 나키모프 제독(Admiral Nakhimov)호가 노보로시스크항 근해에서 화물선과 충돌하였다. 이 사고로 여객선은 충돌 15분 만에 두동강이 난 채 침몰했다. 8백36명이 헬리콥터로 구조되었지만, 448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모든 승객이 잠 든 자정 녘에 사고가 발생해 피해가 컸다. 나키모프 제독호는 1925년 독일이 건조한 배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소련이 노획해 사용한 선박으로 이 사고를 계기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글학회 창립 100돌 기념우표 발행

내용시작"말은 나라를 이루는 것인데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 나니라. 이러하므로 나라마다 그 말을 힘쓰지 아니할 수 없는 바니라. 글은 말을 담는 그릇이니 이지러짐이 없고 자리를 반듯하게 잡아 굳게 선 뒤에야 그 말을 잘 지키 나니라."
- 주시경선생의 '한나라말'중에서

2006년 모나코 발행 상세정보보기

한글학회는 대한제국이 기울어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우리 말과 글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하여 1908년 8월 31일에 주시경(周時經, 1876.12.22 ~ 1914.7.27) 선생이 주축이 되어 창립되었다. 당시 이름은 ‘국어연구학회’였으며, 그 뒤로 ‘배달말글��음’, ‘한글모’, ‘조선어연구회’, ‘조선어학회’를 거쳐 작금의‘한글학회’에 이르고 있다. 지난 100년 동안 한글학회는 한국어와 한글을 수호하고 연구하여 널리 펼

치는 일에 온갖 노력을 기울여 왔다. 1926년 한글날을 처음으로 제정하였고, 1930년대에는 한글 맞춤법과 외래어 표기법을 제정하고, 표준말을 심사하여 정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우리 겨레 최초의 대사전인 [큰사전]을 편찬하여 발행하였다. 일제에 의해 갖은 수탈에 의해 투옥과 옥사를 당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광복 직후 한글학회는 한 국어 교사를 양성하고 교과서를 편찬하는 등 일본말을 몰아내는 일에

특별히 힘썼으며, 그 뒤로 말글 정책 바로세우기 및 우리 말글 바로쓰기 운동을 꾸준히 권장하여 왔다. 우리 겨레의 넋이요 상징인 우리 말과 글을 지키고 가꾸는 일에 한결같은 노력을 기울여 온 한글학회 100주년 업적을 기리며 우정사업본부(정경원 본부장)는 기념우표를 발행한다. ‘한글학회 창립 100돌 기념’우표는 서예가 서희환이 쓴 주시경 선생의 [한나라말] 중의 일부를 실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내용시작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0여년이 흐른 시점에서 패전국으로서의 굴욕적인 국민감정과 더불어 국내 사회 혼란 및 정치적 불안에 시달리던 독일은 극렬 민족주의와 반(反)유대주의를 지향하는 나치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를 선택하였다. 권력을 장악한 히틀러는 독일을 재무장하는 한편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하고 라인란트를 군사적으로 점령하였다. 이어 유럽 각지의 내전에 간섭하던 히틀러는 급기야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점령하며 전 유럽을 독일의 지배하에 두려는 야망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첫 돌파구인 폴란드 침공은 폴란드를 동서로 나누어 갖는다는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1939년 전

1995년 마셜군도 발행

격적으로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우수한 화력과 기동력으로 무장한 독일군은 수적으로 우세인 폴란드군을 파죽지세로 몰아붙이며 전 국토를 유린하기 시작하였다. 상호원조 조약을 맺었던 영국과 프랑스가 9월 3일 대 독일 선전 포고를 하였으나 개전 후 불과 보름 만에 폴란드의 방어체계는 완전히 와해되었고 이후 6년 동안 전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 올랐다.

일본 항복문서 조인

내용시작1945년 9월 2일 일본 도쿄만에 정박한 미국 태평양함대 기함인 미주리호 선상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인정하는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이 열렸다. 전 국민의 옥쇄라는 비장의 각오로 최후의 결전을 주장하였던 일본 군부는 히로시마에 이어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

의 충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기나긴 전쟁의 종지부를 이날 찍게 되었다. 8월 15일 일왕의 항복 선언에 이어 이루어진 항복문서 조인에는 연합군 대표로 맥아더 연합군 총사령관, 일본대표로 우메즈 대장과 시게미스 외무장관의 서명으로 이

루어졌으며 이로서 인류의 대 재앙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은 완전히 끝났다. 항복 후 연합군의 통치를 받은 일본은 우리나라의 6.25전쟁을 경제부흥의 발판으로 삼고 1951년 9월 연합국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주권을 회복하였다.

1995년 마셜군도 발행

대한민국 여군 창설

여군창설 20주년 기념 상세정보보기

내용시작우리나라 여군은 6·25동란의 격동기 속에서 구국 이념에 불타는 여성 지도자들의 궐기에 따라 1950년 9월 6일, 부산 범일동에서 여자 의용군 교육대로 발족하였다. 당시 여군은 후방의 행정 및 통신지원은 물론, 최전방 사단까지 배치되어 대공 선무 공작과 포로 심문 등, 적의 분쇄 작전 임무수행에 남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싸웠다. 그동안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면서 부대조직, 편성, 그리고 지휘체제를 정비 보강하여 정예 여군으로서 전력기반을 구축하여 왔으며, 여군의 신조(信條)인 지(知), 용(勇), 미(美)를 바탕으로 많은 여군 간부들을 육성, 배출하여 대한민국 국군의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정치
300년 막부정치의 종말

내용시작고대 일본의 행정 구획중의 하나였던 지금의 도쿄지방은 교토에 본거지를 둔 무로마치시대 중기인 1457년 무장(武將) 오타 도칸(太田道灌)이 에도성(江戶城)을 구축함으로써 대도시로서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후 오랜 전국시대를 거쳐 159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천하통일을 이루고 에도에

입성하여 가마쿠라(鎌倉)시대에서부터 이룩되기 시작한 봉건사회체제를 확립하고 1603년 에도막부(江戶幕府)를 개설함으로써 이후 260여 년간 막부정치의 중심지로서 자리 잡으며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19세기에 이르러 1854년 미, 일 화친조약을 시발점으로 일어난 막부정권과

반대세력간의 대립은 1866년 결국 막부의 패배로 이어졌으며 300여 년간의 막부정치를 끝내는 메이지유신이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1868년 에도를 도쿄로 개칭하고 이듬해 교토(京都)에서 천도하여 명실상부한 일본의 수도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6년 일본 발행

캐나다의 언론인 부라사

1968년 캐나다발행

내용시작캐나다의 정치인이자 언론인이었던 부라사(Henri Bourassa, 1868. 9. 1 ~1952)는 법률을 전공했으나 정치문제 저술가로서 명성을 쌓았다. 1890년 퀘벡 주 라벨 군 몬터벨로 시의 시장이 되었고, 자유당원으로서 라벨 군에서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캐나다 정부가 남아프리카 제국주의자들의 정책을 지지한 데 항의하여 사임했으나, 민족주의당 지도자로서 신망을 얻고 있

었기 때문에 1900년과 1904년에 다시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캐나다가 영연방에서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또한 보수당과 협력해서 미국 자본이 캐나다에 투자되는 데 반대하기도 하였다. 몬트리올의 신문 '드부아르 Le Devoir(1910)'를 창간했으며 그의 신문과 정치활동을 통해 항상 캐나다의 민족주의를 대변한 인물이었다.

유태인 말살정책의 결정판

내용시작1940년 4월 27일 독일 제3제국의 권력서열 제2인자 하인리히 히틀러에 의해 건립된 '아우슈비츠‘ 수용소. 1940년 6월 14일 폴란드 정치범들의 수용을 시작으로 2차 세계대전 동안 인권 탄압의 대표적인 곳으로 불리기 시작한 그곳에서는 1941년 잔혹한 살인행위가 시작되었다. 각지에서 실려 오는 유태인들 중 노동에 동원될 건강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힘없고 약한 노약자들을 대상으로 집단 살해를 저지른 것이었다. 당초 아우슈비츠는 유태인들을 격리시키기 위한 수용시설로 지어졌으나 나치 친위대에 의해

본격적인 유태인 말살정책의 도구로 사용되기 위하여 개조 확장 되었다. 1941년 9월 대량학살에 대비한 실험적인 성격으로 자행된 소련군 포로 600명과 유태인 250명의 독가스 처형은 이후 바데안슈탈트로 불리는 처형장과 더불어 시체보관실, 화장시설을 갖추고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조직적인 살해행위를 계속하였다. 처형은 통상 1회에 약 2000명씩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1945년까지 아우슈비츠에서의 총 사망자수는 100만~250만 명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1962년 폴란드발행

뮌헨올림픽 선수촌 테러

내용시작4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인류의 대제전인 올림픽. 1972년 당시, 사상 최대 규모에 후일 올림픽 사상 가장 과학적인 대회로 평가받는 제20회 올림픽경기대회에서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에 속한 일단의 비밀 게릴라 조직이 이스라엘 선수들

을 인질로 잡은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검은 구월단이라 불리는 테러범들은 중무장을 하고 이스라엘 선수단의 숙소를 습격하여 선수 2명을 살해하고 9명을 인질로 삼아 대치하며 이스라엘에 억류중인 팔레스타인 게릴라 200여명의 무조건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독

일 경찰은 무리한 진압을 시도하였고 결국 남은 인질 전원과 테러범 다섯 명이 숨지는 어처구니없는 비극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이튿날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숨진 선수들의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논란에도 불구하고 올림픽기가 조기로 개양된 가운데 경기는 속개되었다.

가이아나 발행

국회의사당 준공

국회개원 50주년 기념 상세정보보기

내용시작한강대교 건너편 여의도 대지330,580m²(100,000평)에 자리 잡은 새로운 국회의사당 본관 건물이 1975년 9월 1일에 준공되었다. 민주주의의 표상이며, 민의에 따라 국사(國事)를 논하게 될 장소로서 우리나라 의회기능에 적합하고 의원의 입법 활동에 필요한 편의(便宜)시설을 고루 갖추어 장차 남북통일이 이룩되고 양원제가 실시되더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고려하여 설계한 역사적인 건물이다. 연건평 79.3392m²(24,700평)의 지하 2층, 지상 6층의 본관 건물 외에도 도서관, 의원회관 등을 포함하여 총건평 138.8436m²(42,600평)의 웅장한 민주전당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

문화
프랑스의 초상화가 라 투르

내용시작프랑스의 화가. M.위트릴로의 어머니인 발라동은 가난한 세탁부의 사생아로서 태어났다. 1870년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이주해 여러 일자리를 전전 하던 발라동은 서커스공연에서 부상을 입어 더 이상 그 일을 하지 못하게 되자 화가의 모델로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르누아르의 ‘부지발의 무도회’, ‘도시의 춤’ 로트레크의 ‘숙취’ 등의 작

품모델로 활동하며 그를 고용했던 화가들의 화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그녀는 틈틈이 그림을 그렸고 이를 지켜보던 드가에게 발탁되어 1892년부터 화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1894년 드가의 권유로 살롱전에 첫 출품하였고 이후 대담한 선과 더불어 섬세한 관찰이 돋보이는 누드와 정물, 초상, 풍경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남기며 많은 찬사를 받았다.

1951년 프랑스 발행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브루크너

1996년 독일 발행

내용시작19세기 후반 최고의 교회음악가로서 또는 최대의 교향곡 작곡가로 평가받고 있다.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부모의 뜻에 따라 교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은 후 조교원까지 지냈다. 그동안 독학으로 음악공부를 하였던 브루크너(Anton Bruckner, 1824~1896)는 뛰어난 음악적 감각의 소유자로서 교회음악 연구와 더불어 몇 곡의 작곡을 남기기도 하였다. 30세가 넘은 나이에 본격적인 음악의 길로 접어든 그는 인정받는 오르간 연주자로서 활동하는 한편 악기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며 작곡가로서의 깊이 있는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1868년부터 빈 음악원의 교수와 빈 대학 강사를 지냈으며 1885년 발표한 '제8교향곡'으로 최고의 반열에 올랐다.

동요작곡의 선구자 윤극영

내용시작동요 작곡의 선구자로 불리는 윤극영 선생. 1920년 경성고등 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음악학교

의 사범과에 들어간 윤극영 선생은 당시 홍난파선생과 방정환 선생을 만나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조선에서는 마땅

히 부를 만한 우리의 노래가 없어 우리 민족 어린이들이 일본 창가를 부르는 암울한 시대였다. 이 같은 시대적 상황에 따른 어린이들의 미

음악시리즈(두번째묶음) 상세정보보기

래에 대한 걱정을 방정환 선생을 통해 전해들은 윤극영선생은 이때부터 평생을 우리 어린이들을 위한 동요 만들기에 헌신하게 된다. 1922년 방정환, 조재호, 진장섭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어린이 문화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였고 이어 1923년 조선소년운동협회를 조직하여 그해 5월 1일을 '어린이 날'로 제정하는 한편 1926년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집인 ‘반달’을 발표하였고 이후 400여곡 이상의 주옥같은 동요를 남겼다. 1924년 작곡한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 ‘반달’은 빠른 속도로 국내는 물론 만주, 일본에까지 전파되었고 우리 노래를 탄압하던 일본인도 이 노래를 부르게 되었을 만큼 당시 큰 호응을 얻었다. 1968년 윤극영 선생의 업적을 기려 창경궁에 노래비를 세웠고 지금은 어린이대공원으로 옮겨 한국 어린이 문화 활동에 크게 공헌한 선생의 공적을 기념하고 있다.

과학
미국의 화가 모스 전신기 발명

내용시작하느님이 무엇을 만드셨는가... 이 말은 미국의 화가이자 발명가인 모스(Samuel Finley Breese Morse, 1791.4.27~1872)가 자신이 발명한 모스부호를 이용 최초로 보낸 전보의 내용이다. 다소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모스는 지리학자의 아들로 태어나 예일대를 졸업한 화가였다. 평소 전기에 관한 것에 많은 흥미를 가졌던 그였지만 모스부호를 발명하기 이전까지 그는 화가로서, 교육자로서 때로는 열렬한 운동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던 사람이었다. 1832년 유럽에서 돌아오는 도중 전자석에 대한 정보를 접

1972년 말리 발행

하고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 그는 전보문 전송에 대한 획기적인 방법을 고안하고 미국으로 돌아와 동업자 베일과 함께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는 모스부호의 기초를 완성하였다. 이후 몇 번의 개선을 거쳐 새로운 송신용 부호를 완성한 모스는 의회를 설득하여 마침내 미국 최초

의 전신선로를 가설하는데 성공하고 모스부호를 통한 전보송신 사업을 시작하였다. 통신 선로의 확장에 따라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고 취득한 특허권으로 막대한 부를 얻은 모스는 말년에 많은 돈을 대학설립과 사회단체 기부에 사용하였

고 남은 여생을 어려운 미술가들을 도우며 살았다. 그가 1837년에 만든 전신기는 미국 국립역사기술박물관(워싱턴 D.C)에 보존되어 있으며, 그의 저택은 연방정부에 의해 사적으로 지정되어 모스 기념관으로 남아있다.

스포츠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내용시작제27회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가 1982년 9월 4일부터 18일까지 15일간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각 대륙별로 2개국씩 총 12개국이 참가하여 66게임을 벌였다. 격년제로 열리는 세계 아마추어 야구 선수권 대회는 1938년 영국에서 영국과 미국의 경기로 시작되어 1972년부터 명실상부한 세계 대회로 성장 발전되어 왔다. 이 대회는 그 동안 중남미권에서 계속 개최되어 오다가 1978년 제25회 대회부터 이탈리아, 1980년 제26회 대회는 일본에서 개최된 바 있으며 1977년세계 연맹 총회의 결정에 따라 1982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기념 상세정보보기

년도 제27회 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하게되었다. 아마추어 야구의 최고 권위인 이 대회를 통하여 한국의 야구는 경기 기술은 물론, 관리 능력 면에서 세계 최고의 면모를 과

시하였다. 한국팀은 에이스 선동열을 위시하여 당시 최고의 정예선수로 구성되었으며 운명의 8회로 불리는 대 일본전 명승부 끝에 감격의 우승을 차지하였다. 세계 야구

선수권대회 우승으로 한국은 국제대회 규모로는 두 번째 우승의 기쁨을 누렸고, 세계 야구선수권대회가 생긴 이래 아시아권 국가로는 처음으로 우승하는 기록을 남겼다.

불멸의 복싱 챔프 록키 마르시아노

내용시작헤비급 복서로서는 178cm의 단신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인파이팅

을 구사하며 파워, 테크닉 모든 면에서 절대적인 강자로 군림했던 마

르시아노(Rocky Marciano, 1923~1969). 이탈리아계 미국인이었던

1999년 미국 발행

그는 1947년 3월 17일 프로로 데뷔하여 1956년 은퇴 할 때 까지 49전 전승 43KO의 신화적인 무패의 기록을 남겼다. 1952년 J.왈콧으로부터 첫 세계 타이틀을 거머쥔 마르시아노는 6차례나 타이틀을 방어하며 세계 헤비급의 역사를 장식한 백인 챔피언으로서 1959년 복싱 전당(殿堂)에 헌액되었다. 역사상 가장 압도적이고 위대한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그는 당시 흑인 천하였던 프로복싱계에서 최고의 인기를 얻었으며 더 이상 자신을 상대할 선수가 없다는 말을 남기고 1956년 홀연히 은퇴하였다. 화끈한 스타일과 더불어 백인 이라는 점에서 더욱 많은 사랑을 받았던 그는 1969년 불의의 비행기사고로 숨을 거두었다.

금주의 노벨상

노벨화학상 아르헨티나의 생화학자 를루아르

1977년 아르헨티나 발행내용시작 1970년 탄수화물의 신진대사에 관한 발견의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받으며 아르헨티나인 으로서 최초의 노벨상 수상의 기록을 남겼다. 프랑스 태생인 를루아르(Luis Federico Leloir, 1906.9.6~1987)는 아르헨티나에서 교육받은 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 조교를 거쳐 케임브리지 생화학 연구소에서 일했다. 1947년 귀국과 동시에 재정 지원을 받아 설립한 부에노스아이레스 생화학 연구소에서 평생을 바친 그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뛰어난 연구 업적을 남겼다. 탄수화물의 신진대사를 맡는 당 뉴클레오티드의 발견과 더불어 신장과 고혈압에 관한 연구업적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갈락토오스 혈증이라는 선천적 질병의 병리 해석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노벨화학상 영국의 화학자 소디

1981년 스웨덴 발행내용시작 서식스주 이스트본에서 출생한 소디(Frederick Soddy, 1877~1956)는 옥스퍼드대학교를 졸업하고 동 대학의 교수를 지냈다. 캐나다의 맥길대학교에서 E.러더퍼드와 함께 방사능에 관하여 연구하였던 그는 1903년 종전까지의 정설로 여겨졌던 원자의 불변성을 부정하는 방사성붕괴설을 수립하였으며 W.램지와 함께 원소전환을 처음으로 실험에 의해 증명하는 라돈 Rn에서 헬륨 He의 생성과정을 밝혔다. 또한 방사성붕괴에 따르는 원소의 변위법칙, 즉 α붕괴·β붕괴에 따른 원자번호의 변화법칙을 찾아내 최초로 동위원소의 존재를 밝히는 데 성공하였다. 소디의 동위원소 발견은 현대의학 및 공업 분야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21년 소디의 방사성동위원소에 관한 연구 업적을 인정해 노벨화학상이 수여되었다.

온라인미술관
독일의 낭만주의 화가 프리드리히
1974년 독일 발행

내용시작독일낭만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작가로서 20세기 초 재평가되어 오늘날 19세기 전반을 장식한 최고의 화가로 꼽힌다. 그라이프스발트 출생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는 코펜하겐에서 미술공부를 시작하여 1798년 이래 드레스덴에서 활약하였다. 순수한 시각과 독특한 정적감으로 표현되는 그의 작풍은 가을 ·겨울 ·새벽 ·안개 ·월광 등의 풍경적인 소재를 주로 택하였다. 그의 작풍은 드레스덴 이외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아 사후 잊혀진 화가로 남아있었으나 근대에 들어 재평가 받으며 독일을 대표하는 화가로 자리매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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