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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여행

인물과 역사를 바로 알고 현재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 봄으로써 선조들의 지혜를 알아 봅시다.

지난 시간여행
제목 시간여행 제129호
등록일 2009. 8. 20.
첨부파일 첨부파일없음

1908년 한글학회 창립 상세정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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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시작"말은 나라를 이루는 것인데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 나니라. 이러하므로 나라마다 그 말을 힘쓰지 아니할 수 없는 바니라. 글은 말을 담는 그릇이니 이지러짐이 없고 자리를 반듯하게 잡아 굳게 선 뒤에야 그 말을 잘 지키 나니라."
- 주시경선생의 '한나라말'중에서
한글학회는 대한제국이 기울어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우리 말과 글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하여 1908년 8월 31일에 주시경(周時經, 1876.12.22 ~ 1914.7.27) 선생이 주축이 되어 창립되었다. 당시 이름은 ‘국어연구학회’였으며, 그 뒤로

‘배달말글몯음’, ‘한글모’, ‘조선어연구회’, ‘조선어학회’를 거쳐 작금의‘한글학회’에 이르고 있다. 지난 100년 동안 한글학회는 한국어와 한글을 수호하고 연구하여 널리 펼치는 일에 온갖 노력을 기울여 왔다. 1926년 한글날을 처음으로 제정하였고, 1930년대에는 한글 맞춤법과 외래어 표기법을 제정하고, 표준말을 심사하여 정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우리 겨레 최초의 대사전인 [큰사전]을 편찬하여 발행하였다. 일제에 의해 갖은 수탈에 의해 투옥과 옥사를 당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광복 직후 한글학회는 한

국어 교사를 양성하고 교과서를 편찬하는 등 일본말을 몰아내는 일에 특별히 힘썼으며, 그 뒤로 말글 정책 바로세우기 및 우리 말글 바로쓰기 운동을 꾸준히 권장하여 왔다. 우리 겨레의 넋이요 상징인 우리 말과 글을 지키고 가꾸는 일에 한결같은 노력을 기울여 온 한글학회 100주년 업적을 기리며 우정사업본부는 지난 2008년 기념우표를 발행한 바 있다. 얼마전 인도네시아의 한 부족인 ‘찌아찌아족’에 한글수출 1호의 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도 한글학회의 한글 지킴노력 덕분은 아닐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부상품 반환

내용시작조선의 제27대 왕(재위 1907~1910)인 순종은 고종과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의 둘째아들로 1875년 세자로 책봉된 후, 1897년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1907년 고종이 이완용(李完用)의 강요에 못이겨 헤이그 밀사사건에 책임을 지고 하야하자, 같은 해 8월 27일 순종이 24세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했다. ‘융희’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미 외교권과 재정권을 박탈당한 대한제국은, 그해 8월 1일 일본의 압력으로 한국군마저 해산되었으며, 12월에는 황태자 영왕(1897-1970, 순종의 이복동생, 일본이 영친왕으로

교통수단-이조 순종황제의 자동차 상세정보보기

격하하여 부름)이 유학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가게 된다. 1908년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의 설립을 기화로 경제침탈의 길을 뚫은 일본은 1909년 조선의 국권탈취공작을 착착 추진, 1910년 8월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가 합병조약을 조인함으로써 마침내 조선왕조

는 27대 519년 만에 망하고 한국은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감으로써 순종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기록되었다. 이로써 조선왕조의 5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마감하게 된다. 한때 순종 즉위식 친필서명 관련 기사가 언론매체를 통해 전해진 바

있다. 내용인즉 한일강제병합조약 문서에는 순종황제의 수결이 없다는 내용의 보도기사였다. 519년의 조선 역사에 마침표를 찍은 왕이라는 타이틀을 지우지 못한 채 나약하고 무능력한 왕으로 취급받은 그 이지만,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써 최후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노력만큼은 밝혀져야 할 것이다.

사회
일장기 말소사건

내용시작1935년 11월 일본에서 열린 베를린 올림픽 대회 최종예선전에서 당당한 실력으로 일본인들을 누르고 올림픽 대표로 선발된 손기정 옹은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서 2시간 29분 19초의 세계신기록으로 우승,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올리며 월계관을 썼다. 하지만 그의 가슴에는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가 달려있었고 한없이 기뻐해야할 시상식에서 월계관을 쓰고도 손

기정 선수는 침통해했다. 혜성처럼 나타난 동양의 선수에게 전 세계 언론은 집중되었고 세인의 관심을 끌었지만 상을 받을 때도 한국이 아닌 일본의 국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베를린 마라톤 우승의 소식은 빠르게 전해졌고 당시 억압된 감정을 누르고 있던 사람들은 '조선의 대기염, 세계 제패'라는 호외의 제목처럼 연일 일본이 아닌 우리 민족의 승리로 환호하였다. 억압되었던 감정의 폭발

은 급기야 동아일보가 8월 25일자에 보도에서 손기정선수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진을 실은 이른바 ‘일장기 말소 사건’에서 정점에 달했다. 운동부 기자 이길용이 전속화가였던 이상범과 인쇄공들의 협조를 얻어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279일간 무기정간을 당했고 사건의 핵심인물들이 구속되었으며 동아일보사 사장 송진우 등 8명의 간부가 사직되었다.

올림픽대회 마라톤 제패기념 상세정보보기

사상최초 영국해협 논스톱 비행 성공 롤스

내용시작롤스로이스사의 창업자 가운데 한 사람인 롤스(Charles Stewart Rolls, 1877.8.27~1910)는 1910년 6월 사상 최초로 영국 해협을 가로지르는 논스톱 비행에 성공한 비행사였다. 그는 1900년도의 1,000마일 경주에서 12마력의 팬하드 차를 몰았고 전통적인 유럽장거리경주대회의 초창기 시합에도 여러 번 참가했다. 1902년 자동차 판매업자가 되었고, 1906년에는 헨리 로이스 경의 회사와 자신의 회사를 합병시켜 롤스로이스사를 만들었다.

2006년 모나코 발행

고대도시 폼페이, 화산폭발에 사라지다!

내용시작 AD 79년 8월 24일 높이가 1,281m인 베수비오 산이 폭발하며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만(灣) 연안에 있던 고대도시 폼페이를 덮쳤다. 당시 유럽대륙에서 유일한 활화산이었던 베수비오 산은 그 누구도 예상을 하지 못한 대규모 폭발을 일으키며 한 도시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 이틀 동안 지속된 피해는 치명적인 화산재로 인해 폼페이 인구의 절반을 질식시켰고 도시는 매몰되어 16세기 발굴이 이루어 질 때까지 지구상에서 잊혀진 도시로 남아있었다.

정치
영국의 정치가 윌버포스

내용시작케임브리지대학교 시절 많은 친구들에게 호감을 주었던 그는 후일 총리가 된 윌리엄 피트와 절친한 친구였으며 1780년 피트와 나란히 하원에 들어가 의회개혁과 로마 가톨릭교도의 정치적 해방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1787년 노예무역폐지운동의 지도자가 된 그는 복음주의 그리스도교 사상에 일부 기반을 둔 노예폐지론을 펼치며 지칠 줄 모르는 웅변가로서 하원에서 반(反)노예제 입법의 후원자로 활동

1973년 St. Vincent 발행

하였고 그의 동료 토머스 클라크슨 등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복음주의 단체인 클래펌파(Clapham Sect)의 지도자로서도 활동하였다. 1807년 3월 25일 영국령 서인도제도의

노예무역 폐지안이 법률로 확정됨으로써 첫 번째 성공을 거두었으며 '영국령 전역의 노예제도 완화와 점진적 폐지를 위한 협회'를 창설하고 지속적으로 모든 노예의 즉각

적인 해방을 주장했다. 1825년 66세의 나이로 하원에서 은퇴하였으며 그가 추구하던 노예제도 폐지법은 그가 죽고 난 1개월 후인 1833년에 통과되었다.

한국&중국, 국교 수립

내용시작한국과 중국이 1992년 8월 24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 항구적인 선린 우호 협력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기로 합의했다. 이상옥 외무장관과 전기침 외교부장은 이날 북경의 영빈관인 조어대에서 수교협정 서명식을 갖고 상호 국가승인, 외교관계 수립 등 6개항을 담은 대한민

국 정부와 중화인민공화국간의 외교관계 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에 서명했다. 이로써 한국과 중국은 지난 1910년 한일합방 이래 사실상 82년 만에 국교를 정상화하게 됐다. 공동성명에서 한국은 중국을 유일 합법정부로 승인하고 대만은 중국

의 일부라는 중국 입장을 존중하며, 중국은 한반도의 한민족에 의한 평화통일 지지와 빠른 시간내 대사교환 등을 명시했다. 이에 따라 주중 한국무역대표부는 이날 오전 대사관 현판식을 갖고 정식 외교업무를 시작했다.

2002 한·중 국민교류의 해 기념 상세정보보기

페루의 ‘새마을 운동 주창자’ 정치가 카스타야

내용시작페루의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카스티야(Ramon Castilla, 1797. 8. 27~1867. 5. 25)는 페루의 정치를 대통령으로 또는 막후에서 거의 20여년간 지배했다. 보수주의자였던 그는 현명하게 사회 각 부문에 양보조치를 하고 장기간에 걸쳐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을 가져왔다. 1841년 아구스틴 가마라 대통령이 죽고 무정부 상태가 이어지자 권력을 잡고 1845년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851년까지 대통령으로 봉직했다. 1855년에는 후임 대통령 호세 루피노 에케니케를 내쫓고 1862년까지 통치했다. 그가 권력을 잡은 무렵 페루는 거의 20년간 무질서와 반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강력하고 능숙한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집권 중에 막대한 구아노[糞化石]와 질산나트륨이 페루에서 발견되었다. 이들 자원에서 나온 수익에 힘입어 그는 경제발전을 이룩하고 국채를 줄였으며, 학교를 짓고 운송체제를 개선하고 국내 사업을 육성했다. 또한 흑인 노예제와 인디언에게 부과하는 인두세를

1969년 페루 발행

철폐하고 교회재판과 강제 십일조를 없앴다. 1860년 참정권을 축소하고 대통령에게 더 큰 권력을 주며 로마 가톨릭 교회만을 배타적으

로 인정한 페루의 새 헌법을 지지했다. 이 헌법은 1920년까지 효력을 발휘했다. 1862년 카스티야의

가부장적 전제정치가 막을 내리자 페루는 또다시 20년간의 혼란과 반란에 빠져들었다.

폴란드의 민족영웅, 돔브로프스키

2006년 덴마크발행

내용시작폴란드 페르소비치 출생의 돔브로프스키는 기병 사관으로 1794년 코시우스코의 독립 반란에 참가하였다. 바르샤바 함락 후 밀라노로 피하여, 폴란드 군단을 조직하고 프랑스군의 이탈리아 작전에 협력하였다. 나폴레옹이 폴란드 왕국 부활의 뜻을 표명하자, 폴란드 국민에게 나폴레옹군에 대한 협력을 호소하고, 1806년 폴란드군을 이끌고 바르샤바에 입성하여, 그 뒤 그단스크 ·포즈난 ·크라쿠프 등의 전투에서 활약하고, 나폴레옹군의 러시아 패배 때에는 베레지나 도하작전을 도왔다. 나폴레옹 퇴위 후 러시아로 돌아가, 알렉산드르 1세로부터 폴란드 왕국군의 대장 지위와 원로원 의원의 직위를 부여받아 폴란드의 민족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문화
프랑스 현대시의 출발, 아폴리네르

내용시작프랑스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8.26~1918.11.9)는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서 프랑스 현대시의 출발점으로서 상징주의 시의 흐름에서 벗어나 현실 세계를 표현한 시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경험을 상상 속에서 다시 체험하면서 기발하고 기상천외한 작품들로 이루어진 생기 넘치는 단편집을 남겼다. 그의 작품 중, 프랑스 파리의 아름답기로 소문난 세느 강의 34개 다리 중 하나인 '미라보 다리'를 노래한 작품을 소개한다.
--------- 미라보 다리 ---------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우리들 사랑도 흘러 내린다

내 마음속 깊이 기억하리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오는것을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손에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보자
우리들 팔 아래 다리 밑으로 영원의 눈길을 한 지친 물결이 흐르는 동안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사랑은 흘러간다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들 사랑도 흘러내린다
인생은 얼마나 지루하고 희망은 얼마나 격렬한가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나날은 흘러가고 달도 흐르고 지나간 세월도 흘러만 간다

우리들 사랑은 오지 않는데 미라보 다리아래 세느강은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1980년 모나코 발행

조선말기 화가, 심전 안중식

내용시작본관 순흥(順興). 심전(心田)이라는 호를 가진 조선말기 화가인 안중식(安中植, 1861.8.28~1919.9.10)은 조선말과 근대 초기에 걸쳐 활동했다. 뛰어난 기량과 분방한 필치를 바탕으로 중국화를 주로 모방했던 장승업에게 그림을 배워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881년 조석진과 함께 영선사(領選使)의 제도사(製圖士)로 뽑혀 일년 동안 청나라에 머물면서 견문을 넓혔고, 1902년 고종과 순종의 어진(御眞)제작에 참여했다. 근대에 들어서는 서화미술회 강습소에 교수로 있으면서 이상범·노수현·김은호 등을 가르쳤고 서화협회 초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작품은 스승인 장승업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여 중국화를 모방한 관념적 청록산수(靑綠山水)나 고사인물도가 주류를 이루었고 '도원문진도 桃源問津圖'와 같은 관념산수에서는 과장된 산의 형태를 반복적으로 묘사하고 강렬한 청록의 색채를 사용하는 등의 특징을 드러냈다. 후기에는 드물게 '백악춘효도 白岳春曉圖(1915)'나 [영광풍경]과 같은 실경산수를 남겼다.

근대미술시리즈(첫번째묶음)-백악춘효도 상세정보보기

독일의 문호, 세계적 문학가 괴테

1945년 독일발행

내용시작독일 최대의 시인이며 극작가ㆍ소설가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8.28~1832.3.22)는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으나, 시ㆍ소설ㆍ희곡 등을 쓰는데 힘썼다. 1774년 자기 체험을 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독일 문단은 물론, 당시 유럽 각 나라에도 커다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희곡인 ‘파우스트’는 만년에 그가 완성한 걸작으로 꼽힌다. 세계 문학사의 거인으로 널리 인정되는 독일 문호로 유럽인

으로서는 마지막으로 르네상스 거장다운 다재다능함과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과학에 관한 저서만도 14권에 이를 정도로 그가 쓴 방대한 량의 저술과 그 다양성은 놀랄 만하다. 서정성 짙은 작품들에서는 다양한 주제와 문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였다. 수많은 저서 중, '파우스트'는 그가 23세 때부터 쓰기 시작하여 83세로 죽기 1년 전인 1831년에야 완성된 생애의 대작이며, 세계문학 최대걸작의 하나로 손꼽힌다.

1969년 모나코발행

오스트리아의 명 지휘자, 뵘

내용시작오스트리아 그라츠 출생의 뵘(Karl Bohm,1894.8.28~1981.8.14)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바그너, 모차르트등의 작품연주와 음반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법률을 공부하는 한편, 빈에서 오이제비우스 만디체프스키와 구어도 아들러 밑에서 음악을 공부하는 등 다재다능 하였다. 1917년 그라츠 오페라극장에 데뷔했으며, 3년 후 이곳 수석 지휘자가 되었고, 1921년에는 뮌헨 오페라로 갔으며 1927~1934년에는 다름슈타트, 함부르크 등지에서 음악감독을 역임했다. 1936년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데뷔하였을 당시 그는 드레스덴 오페라의 음악감독을 맡은 것 때문에 대중들의 비난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그 자리가 나치의 압력으로 사퇴한 프리츠 부슈의 후임이었기 때문이었다. 1943년까지 드레스덴에서 지휘봉을 잡은 이후 1943~45년, 1954~56년.빈 국립 오페라를 지휘했다. 1957년에는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를 지휘함으로써 뉴욕 메트로폴리탄

1994년 오스트리아 발행

극장에서 데뷔했다. 1960년대 초반부터 바이로이트 음악제에서 지휘를 통해 바그너 작품에 가장 뛰어

난 해석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뵘은 모차르트 교향곡 전곡을 음반으로 발표하였는데 그의 연주와 음반

은 감탄할 만한 온화함과 섬세함, 그리고 서정성을 이끌어 냈다는 평을 받는다.

SF 과학소설의 선구자, 소설가 셸리

내용시작'프랑켄슈타인 Frankenstein'의 저자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영국의 작가 셸리는 윌리엄 고드윈과 메리

울스턴크라프트 고드윈 사이에서 태어났다. 퍼시 비시 셸리의 2번째 부인이었으며, 1822년 남편이 세상

을 떠난 뒤 그의 시를 모아 '유고 시집 Posthumous Poems(1824)'을 출판했고, 길고 값진 주석이 달린

1997년 미국 발행

'시 작품 Poetical Works (1839)'을 편집하기도 하였다. 그녀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한 프랑켄슈타인의 원제목은 '프랑켄슈타인 : 현대의 프로메테우스 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1818)'이다. 이 소설로 인해 영화사상 가장 널리 알려진 괴물이 창조되었다. 고딕 소설과 공상과학소설을 결합한 이 소설은 시체조각들을 모아 인조인간을 만들고 생명력을 불어넣었다가 결국 자신이 만든 피조물 때문에 목숨을 잃는 스위스의 신비학도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후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은 처음에는 애정을 추구하지만 결국 충동적으로 난폭해진 괴물 인조인간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널리 사용되기도 하였다. 영국의 작가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을 통하여 오늘날의 SF 과학소설의 선구자가 되었다.

빈민가 출신, 할리웃 영화스타 숀 코너리

내용시작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가난한 트럭 운전사였던 아버지 슬하에 태어난 숀 코너리(Thomas Sean Connery, 1930.8.25~ )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해군에 입대하였으나, 위궤양으로 전역하였다. 스포츠에 관심을 갖았던 그는 한때 축구선수의 꿈을 키워 가기도 하였으나, 1953년 스코틀랜드 미스터 유니버스대회에서 3등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연예계에 들어선 뒤, 텔레비전 드라마의 조역을 하면서 연기력을 키웠다. 1955년 영화배우로 데뷔해 여러 영화에 출연한뒤 1962

년 영국의 작가 플레밍(Ian Fleming)의 소설을 영화화한 007 시리즈의 첫 편 '007 살인번호 Dr. No'의 주연을 맡으면서 이름을 얻기 시작하였다. 그 뒤 1971년까지 007시리즈(세계 최다, 최장수 영화시리즈로 손꼽힘) 1~5편까지 총 6편의 주연을 맡으면서 주인공 제임스 본드 역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007 시리즈는 이후에도 여러 명의 배우를 교체하면서 현재까지도 계속 제작되고 있지만, 역대 제임스 본드 역 가운데서도 여전히 최고의 배우라는 평가를 받는다.

짙은 눈썹과 콧수염, 날카로우면서도 듬직한 눈매, 잘 생긴 얼굴, 능숙하고 노련한 연기 등으로 세계적인 사랑을 받아 온 20세기의 가장 남성적인 배우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70세를 훌쩍 넘는 노익장을 과시하는 숀 코너리는 스무살을 갓 넘은 나이부터 시작한 연기 인생동안 영화 속에선 숱한 본드걸들과 염문을 뿌린 그 였지만, 실생활에선 이렇다 할 스캔들 한 번 없이 성실하게 살아온 인물로도 존경을 받고 있다.

1996년 노르웨이 발행

과학
근대화학의 창시자, 라부아지에

내용시작파리에서 태어난 라부아지에(Lavoisier, Antoine Laurent, 1743.8.26~1794.5.8)는 부친의 뜻에 따라 변호사 지망생으로 학업을 시작하였으나 수학·천문학·화학·식물학 등 과학연구에 더 큰 흥미를 느꼈다. 1768년 반복하여 증류가 가능한 증류기 페리칸을 이용, 물이 흙으로 변한다는 아스토텔레스 이후의 원소변환설을 완전히 뒤엎은 물의 성분을 분석한 논문으로 25세의 젊은 나이로 같은 해 아카데미 부회원(副會員)이 되었다. 획기적인 논문과 실험의 결과로 유명해지기 시작한 그는 전통적인 4개의 기본 원소체계 즉 흙, 물, 공기, 불에 관한 연구를 하여 당시까지의 일반적인 과학 이론에 대한 반론을 실험

과 보고서를 통해 입증하였다. 그의 화학적 업적의 핵심은 새로운 연소이론의 확립으로서 1789년 출판한 ‘화학요론 (Traité élémentaire de chimie)’에 의해 절정에 달했으며 화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법을 제시하고 적합한 과학적 탐구방법과 교수법에 대하여 말하였다. 또한 화학반응의 전후에 있어서 물질은 보존되며, 따라서 생성되거나 소멸되는 것은 없고 단지 변형만이 있다는 ‘질량불변의 법칙’을 만들어 내었다. 라부아지에는 근대화학의 창시자로서 과학의 여러 분야뿐만 아니라 1794년 프랑스 혁명의 희생양으로서 콩코드 광장에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기까지 재정, 경제, 농업, 교육, 사회사업 등 공

공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긴 위대한 과학자였다.
1983년 말리 발행

열기구 개발의 선구자, 몽골피에

내용시작 열기구 개발의 선구자로 불리는 몽골피에(Joseph Michel Montgolfier, 1740.8.26~1810.6.26)는 프랑스 남부 아노네 근처 비달롱에서 제지공장을 경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지원을 받으며 동생과 함께 가열된 공기로 물체를 하늘로 올리는 과학실험에 몰두했

던 그는 1783년 공개실험을 통해 그 가능성을 발표하였다. 최초의 실험으로 약 1,000m 상공에서 2.4km의 거리를 10분정도 날아가는데 성공하였고 그 후 작은 가축들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대형 기구를 만들어 1783년베르사유 광장에서 3km의 거리를 자유항행 하는데 성공

하였다. 이 실험의 성공에 힘입어 드디어 1783년 11월 21일 필라트르 드 로제에, 프랑수와 로랑 아를랑데 후작부인을 승객으로 태우고 처음으로 줄을 묶지 않고 파리 상공에서 약 25분 동안 9㎞의 유인비행을 성공시킴으로써 본격적인 기구비행시대를 열었다.

1977년 모나코 발행

금주의 노벨상

노벨 생리·의학상 세계최초, 갑상선 절제수술 시술, 코허

1969년 스웨덴 발행내용시작 스위스 베른에서 출생한 코허(Theodor Emil Kocher, 1841.8.25~1917)는 1865년 베른대학교를 졸업한 뒤, 베를린, 런던, 파리 등에서 유학하였고, 1872년부터 베른대학교의 외과학 교수로서 1917년까지 재직하면서 최초로 갑상선 절제수술을 하였다. 코허는 1912년까지 5,000회에 걸친 갑상선 절제술 시술을 통해 사망률을 18%에서 0.5% 이하로 낮추었으며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는 임상에서 얻은 경험으로 갑상선선종의 치료와 관련된 중요한 연구결과들을 남겼다. 또한 어깨의 탈구를 줄이는 방법과 인간의 장기에 대한 외과적 수술에 대한 혁신적인 개량방법들과 더불어 새로운 기구와 장치 등을 고안했으며, 그의 이름을 붙인 코허겸자와 절개술은 지금도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갑상선의 생리·병리 및 외과의 연구에 대한 공적으로 1909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노벨평화상 "나는 꿈이 있습니다" - 루터 킹, 워싱턴 대행진

1979년 미국 발행내용시작 미국의 침례교회 목사이자 흑인해방 운동가였던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15~1968.4.4) 목사는 비폭력 저항과 인종차별 철폐 및 식민지 해방과 사해동포론(四海同胞論) 등을 주창한 간디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아 비폭력주의에 입각한 '공민권 운동'의 지도자로 활약하며 미국의 흑인해방운동에 앞장선 장본인이다. 루터 킹은 1963년 8월 29일 인종차별에 반대하며 공민권운동을 주창하며 그의 지지자들과 함께 워싱턴 대행진을 펼쳤다. 수십만 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그는 'I have a dream!'이라는 연설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오늘도 내일도 어려움은 첩첩이 쌓여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미시시피 주 까지도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로 변하리라고. 나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4 남매가 피부의 색깔로가 아니라 인격의 내용으로 판단되는 나라에 살게 될 거라고. 나는 꿈이 있습니다. 남쪽 앨러바마 주에서도 검고 흰 아이들의 손이 정답게 뭉쳐지리라고. 이 꿈만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망의 동산에서 희망의 반석을 캐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꿈만 놓치지 않는다면 미국내에 꽉 차 있는 불협화음을 형제애의 아름다운 심포니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1964년 흑인인권 신장의 공로로 노벨평화상 수상하였으며, 1968년 4월 테네시주(州)의 멤피스시(市)에서 흑인 청소부의 파업을 지원하다가 백인에 의해 암살당함으로써 미국의 젊은 흑인인권 운동가는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노벨물리학상 물리화학의 창시자, 네덜란드의 호프

1991년 네델란드 발행내용시작 물리화학의 창시자이며 제1회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호프(van't Hoff's, 1852.8.30~1911.3.1)는 반응속도, 화학평형, 삼투압에 관해 연구한 공로로 1901년 최초의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네덜란드에서 공부한 후 그는 본대학교의 아우구스트 케쿨레 밑에서 잠시 동안 연구활동을 했으며, 그후 샤를 아돌프 뷔르츠의 파리 연구실에서 일했는데 그곳에서 조제프 아실 르 벨을 만났다. 1874년에 그와 르 벨은 서로 독자적으로 유기화합물의 3차원 구조연구(입체화학)의 기초가 된 개념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탄소가 만들 수 있는 4개의 화학결합은 정4면체의 꼭지점 쪽을 향한다는 것이었다. 이 개념은 광회전의 성질을 설명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는 1878~96년에 암스테르담대학교의 화학·광물학·지질학 교수를 지냈다. 1884년에 그는 “화학동력학 연구 Etudes de Dynamique chimique”를 출판했다. 이 책은 반응속도론의 원리들을 포함하고 있고, 반응차수를 결정하는 새로운 방법을 기술하고 있으며, 열역학 법칙들을 화학평형에 응용하고 있다. 그는 또 근대적인 화학 친화력 개념을 도입했다. 1886년 그는 실제로 묽은 용액과 기체의 반응 사이에 유사성이 있음을 밝혔다.

온라인미술관
프랑스의 신고전조의 화가 앵그르
1981년 프랑스 발행
1980년 프랑스 발행

내용시작자크 루이 다비드가 죽은 뒤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회화를 이끈 지도자로 활약한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80.8.29~1867.1.14)는 차분하고 투명하며 정교하게 균형잡힌 작품들을 만들어 냄으로써 당대 낭만주의 작품과 대조를 이루었다. 특히 초상화(오송빌 부인 Mme d'Haussonville, 1845)에 뛰어났는데 선과 윤곽을 강조하는 그의 화풍은 신고전주의 미술에서는 유일한 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가 서양미술사에서 뛰어난 대가들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그가 오귀스트 르누아르, 파블로 피카소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도 널리 인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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