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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여행

인물과 역사를 바로 알고 현재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 봄으로써 선조들의 지혜를 알아 봅시다.

지난 시간여행
제목 시간여행 제145호
등록일 2009. 12. 14.
첨부파일 첨부파일없음

위대한 인물은 조국의 생명의 피가 되어야 한다! - 이준열사 상세정보보기

이주의 이벤트와 시간여행 구독, 추천하기 시간여행 구독하기 所) 검사보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조신(朝臣)들의 불법과 비행을 들추어 파헤치다가 그들의 면관(免官) 운동 때문에 취임 1개월 만에 면직되고 곧 독립협회에 가담, 평의장(評議長)으로 활약하다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7년 6월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밀령(密令)으로 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鍾) 등과

내용시작한말의 항일애국지사였던 이준(李儁, 1859.12.18~1907.7.14)은 함경남도 북청(北靑)에서 출생하였다. 29세에 북청에서 초시(初試)에 합격한 후, 1894년(고종 31) 함

흥 순릉참봉(純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상경하여 이듬해 신설된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에 들어가 6개월 후에 졸업하고, 1896년 한성재판소(漢城裁判

합류, 헤이그에 도착했으나 일본측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7세 소녀, 유관순의 슬픔은?

내용시작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 입니다." 1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대한의 딸, 유관순(柳寬順, 1902.12.16~1920.9.28) 독립운동가의 유언이다. 유관순은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오내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전개하기 위한 연락원으로서 활동 하였다. 4월 1일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시작된 시위에 참가한 유관순은 일제의 무력진압으로 시위 도중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당하고 자신은 주동자로 잡혀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 유관순은 항소가 기각

17세 소녀, 유관순의 슬픔은?

되자 재판장에게 자신의 투쟁이 정당함을 역설하였으나 오히려 법정모욕죄까지 가산돼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불굴의 투혼으로 옥중항쟁을 계속하다가 1920년 17세의 나이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

다. 유관순이 참살된 지 이틀 후 당시 이화학당 교장 푸라이와 월터선생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의 시체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유관순의 학살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겠다는 위협과 강력

한 항의로 유관 순열사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으나, 그 시신은 비참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8·15해방 후 충청남도와 천안군의 협력으로 병천면에 유관순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건립되었고,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사회
 프랑스 건축가 에펠 출생

프랑스 건축가 에펠 출생

내용시작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1889년 파리 만국 박람회장에는 거대한 철탑이 세워졌다. 완성 당시 찬반이 엇갈렸던 이 거대한 철탑은 오늘날 파리를 대표하는 심벌로 자리잡고 있다. 에펠탑으로 불리는 이 철탑의 설계자는 프랑스 건축가인 에펠(Eiffel, Gustave, 1832.12.15~1923)이다. 1832년 디옹에서 태어난 에펠은 파리에서 기술을 배웠으며 1866년 철도자재 회사로부터 독립, 파리 근교에 에펠사를 창업하였다. 당시 프랑스혁명시기였던 국내 사정에 의해 주로 해외의 큰 공사를 맡아 일을 하였다. 혁명이후 활발한 국내 활동을 한 에펠은 도루강의 철도교를 비롯 가라비의고가교, 파리의 리옹역, 백화점, 천문대등을 시공하고 자유의 여신상내부설계에도 참여하였던 에펠은 1889년 기술협회 회장을 지냈다.

인류최초 남극점 도달 - 아문센

인류최초 남극점 도달 - 아문센

내용시작소년시절부터 북극탐험을 꿈꾸었던 아문센(Roald Amundsen, 1872.7.16 ~ 1928.6.18)은 벨기에의 남극탐험대에 참가 첫 탐험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그린란드의 탐험과 더불어 최초로 북서항로를 항해한 아문센은 북극점에 대한 도전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미국인 피어리에 의해 1909년 북극점이 정복되자 남극으로 대상을 변경 철저한 준비를 마치고 1910년 남극점 정복에 나섰다. 탐험선 프람호를 타고 남극에 도착한 아문센은 1911년 10월, 50여 마리의 개가 끄는 썰매를 이용 남극점을 향해 출발하였다. 출발한지 55일이 지난 1911년 12월 14일 영국의 스콧보다 35일을 앞서 역사적인 인류최초의 남극점 정복에 성공하였다.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

내용시작프랑스의 의사이자 철학자, 점성가였던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 1503 ~ 1566.7.2)는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예언가였다. 1529년부터 의술활동을 하였던 그는 프랑스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페스트나 풍토병의 치료에 독특한 투약과 치료법으로 명성을 얻었다. 프랑스 유대계 집안에서 태어난 노스트라다무스는 일찍이 언어와 수학, 점성술등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1547년경부터 예언을 하기 시작한 그는 당시 유럽에 유행이었던 점성술 붐을 타고 유명해지기 시작하였다. 명성을 바탕으로 왕의 주치의 자리까지 오르고 1555년 출판한 그

의 저서 ‘세기들(Centuries)’을 통해 미래를 예견 하였고, 그중 몇 몇은 그의 명성을 더욱 높이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예언은 그가 죽은 뒤 세상에서 격리되어야 했다. 여러 개의 언어를 사용해 마치 암호처럼 복잡하게 만들어 놓은 그의 예언서가 내용의 신비성 때문에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유죄판결을 받아 금서가 된 것이다. 세월이 흘러 그의 예언 900여 편이 번역되어 나오면서 또 다시 많은 화제를 몰고 왔고 그가 사망한지 400년이 훨씬 지난 현대에 이르러서도 그 예언에 대한 끊임없는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

정치
헌정사상 첫 정권교체, 15대 대통령에 김대중 당선

내용시작1997년 12월 18일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정부 수립 후 50년 만에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 졌다. 김대중은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선거 부정 의혹이 제기되는 가운데 박정희 후보에게 95만 표차이로 패배했다. 10월 유신 이후 반유신운동을 전개하며 온갖 시련을 겪었고, 1980년에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기도 하였다. 김대중은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의 여파로 사면 복권된 후, 12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과의 야권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채 선거에 출마했

다가 노태우 후보에게 패했고, 1992년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도 여당 후보로 탈바꿈한 김영삼 후보에게 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후 그는 정계은퇴를 선언했다가 1997년 다시 새정치국민회의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이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 총재와 대통령 후보단일화를 성사시킴으로써 여당인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김대중 전대통령은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1위 및 노벨평화상 수상 등의 파란만장한 삶을 지난 8월 마감하였다.

헌정사상 첫 정권교체, 15대 대통령에 김대중 당선

제2차 세계대전, 벌지 대전투 발발

내용시작1944년 6월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은 파죽지세로 독일군을 전선에서 몰아내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북부를 거쳐 벨기에까지 진격한 연합군은 상대적으로 넓게 퍼진 전선을 형성하며 흩어져 있었다. 노르망디에서 일격을 당하고 프랑스에서 퇴각한 독일군은 절치부심 전세의 역전을 노렸고 급기야 벨기에 남부 아르덴에서 미군 48사단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악천후에 의해 공중지원을 받지 못한 미군은 전선을 사수하지 못하였고 독일군 기갑부대와 제5군은 바스토뉴를 함락시키며 미군진영 깊숙이 진격하였다. 그러나 독일의 반격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전열을 정비한 미군이 조지 패튼이 이끄는 제3군을 앞세워 12월 26일 바스토뉴를 탈환하며 서부전선의 주도권을 다시 잡기 시작한 것이다. 1월 3일 제1군이 가세하여 전선을 더욱 밀어붙이자 독일군은 부족한 군수품과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계속되는 패배와 철수를 거듭하게 되었다. 아르덴 전투라고 불리기도 하는 발지전투는 결국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편 마지막 공격이 되었고 이후 독일은 패망의 길로 급격히 추락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벌지 대전투 발발

442년간의 식민생활 마감 - 마카오, 중국에 반환

내용시작442년간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마카오가 1999년 12월20일 중국에 반환됐다. 이로써 아시아의 피식민 역사,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역사가 끝났다. 1987년에 있었던 '중국-포르투갈 마카오반환협정'의 약속에 따라 442년간 마카오를 점령·지배해온 포르투갈이 그동안의 영욕을 마감하고 아시아에서의 근거지에서 철수를 했던 것이었다. 포르투갈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짭짤한 세수원 하나가 떨어져 나가는 아쉬움이 있었겠지만, 반환되는 마카오를 맞이하는 중국의 입장에서는 깊은 감회가 만감하는 자리였다. 중국에 반환된 마카오는 카지노산업등의 관광산업에 집중투자 하여1999년 이전에는 700만명 수준이던 방문객의 수를 2010년에는 3000만명을 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할 정도다.

442년간의 식민생활 마감 - 마카오, 중국에 반환

문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영화 개봉

내용시작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1939년 12월 14일 첫 상영되었다. 마가렛 미첼의 동명의 세계적 베스트셀러 소설이자 퓰리처상을 받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영화화한 것이다. 장장 3시간 42분이라는 긴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당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MGM과 셀즈닉 프로덕션이 제작한 대작 멜로 드라마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완벽한 제작을 위해 3년의 촬영

기간이 소요되었다. 아카데미 작품 ·각본 ·감독 ·촬영 ·미술 ·편집 ·특별 ·주연여우 ·조연여우상 등 9개 부문을 휩쓴 이 영화는 여주인공 비비안 리를 세계적인 스타로 탄생시킨 작품이기도 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영화 개봉

찰스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 출간

내용시작1843년 12월 19일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70)의 '크리스마스 캐럴, A Christmas Carol'이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그가 1867년까지 거의 해마다 출간했던 크리스마스에 관한 책·수필·단편들 중 첫 작품이 되었는데, "자린고비 구두쇠인 주인공 스크루지는 인정이라곤 손톱끝만치도 없는 수전노로 등장하는데, 그가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본래 공동으로 사업을 하던 사나이의 유령을 만나 자기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습을 보게 되자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사람다운 마음을 찾게 된다"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이렇듯 그의 크

리스마스 이야기들은 비평적 찬사와 대중적 사랑을 동시에 얻었다. 디킨스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파산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공장에 다녀야 했는데, 이러한 경험은 후일 그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정부와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의식이 새롭게 인식되던 산업화시대에 소외 계층에 대한 애정과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탐구를 작품으로 그려냈다. 그는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소설가로 인정되며 생전에도 이전의 그 어떤 작가보다 폭넓은 인기를 누렸다.

찰스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 출간

아르누보 양식의 대표화가, 토로프

내용시작 아르누보 양식의 주요한 인물로 꼽히는 토로프(Toorop, Jan, 1858.12.20~1928.3.3)는 암스테르담과 브뤼셀에 있는 미술학교에서 공부했으며, 특히 마네와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 그의 양식은 후기인상주의 및 신인상주의의 점묘화법으로부터 당시 순수미술뿐만 아니라 디자인의 모든 분야에까지 퍼진 아르누보 양식을 낳은 상징주의 운동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양식 발전을 반영하고 있다. 1887년 그는 상징주의 미술의 정신성을 강조하며 브뤼셀을 중심으로 활동한 화가들의 그룹인 '20인(人)회'(Les Vingt)에 가입했다. 말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그 뒤로는 자신의 독특한 '선(線)이상주의' 양식에 따라 종교적인 주제를 자주 다루었다.

아르누보 양식의 대표화가, 토로프

콩쿠르 상의 주역, 프랑스 형제작가 쥘콩쿠르

내용시작병적일 정도로 날카로운 감수성의 소유자라고 자부한 프랑스의 형제작가인 형 에드몽(Edmond de Goncourt, 1822〜1896)과 동생 쥘(Jules Alfred Huot de Goncourt, 1830.12.17~1870.6.20)은 19세기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비평가로 사후에 '콩쿠르상'이 설립되었다. 형인 에드몽은 내향적인 공상가였고, 동생 쥘은 정열적인 활동가로 전해지며, "역사가는 과거를 이야기하고,

콩쿠르 상의 주역, 프랑스 형제작가 쥘콩쿠르

소설가는 현재를 이야기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정밀한 관찰기록에 입각한 소설을 잇달아 써서 '샤를 두마이(1860)', '피로멘 자매(1861)', '제르미니 라세르퇴, Germinie Lacerteux', '제르베제 부인(1869)'등을 발표하였다. 그들의 작품에는 급격히 발전한 물질문명의 소산으로서 얼마간 변질적인 인물이 그려져 있으며, 심리분석보다는 병리학이 적용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작품은 자연주의의 선구로 인정되고 있지만, 한편 ‘예술적 문체’라고 하여 특이하고 정교한 문체를 이루어, 예민한 감각만이 알아챌 수 있는 미묘한 뉘앙스를 조성함으로써 인상파풍의 시각적인 효과를 노렸다. 두 형제가 함께 쓴 '콩쿠르의 일기(9권, 1887〜1896)'는 19세기 후반기의 풍속과 문단에 관한 귀중한 자료이며, 일기문학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콩쿠르상(賞)'은 에드몽

의 유언에 의한 것이며, 그들의 유산을 기금으로 1903년에 설립되었다. 콩쿠르상은 프랑스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정평이 나 있다.

운명 따위에 결코 지지 않겠다! - 베토벤

내용시작전성기의 고전파에서 초기낭만파의 전환기에 56세의 생애를 보낸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2.17 ~ 1827.3.26)은 고전파 음악양식을 최고 정상까지 높이는 동시에 19세기 음악가들의 우상적 존재가 되었으며 후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베토벤의 음악세계는 하이든, 모차르트의 고전주의 전통에 입각했고, 문학계의 동시대 작가 괴테와 실러의 작품에 표현된 새로운 시대정신을 포괄했으며,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열정적으로 부르짖던 프랑스 혁명의 이상을 좇았다. 베토벤은 이전의 어떤 작곡가들보다도 생생하게 삶의 철학을 대사 없는 음악으로만 표현해 음악의 위력을 드러냈다. 그의 몇몇 작품

들에서는 인간의 의지에 대한 확신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그 자신은 낭만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를 따르는 여러 낭만주의자들의 작품들에 대해 사고의 원천이 되었다. 베토벤은 1796년에서 1800년 사이에 베토벤은 음악으로 더욱 이름을 떨치게 되었는데, 그 사이에 음악가에게 가장 치명적인 귓병을 앓게 되었다. 그리고 1800년에 완전히 청력을 잃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음악이 자살하려는 나를 말렸다. 아, 내게 주어진 창조의 능력을 전부 발휘하기까지는 이 세상을 버릴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밝힌 베토벤은 시련을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극복해 나간 인간 승리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운명 따위에 결코 지지 않겠다! - 베토벤

영화계의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스필버그

내용시작사상 최고의 흥행 성적을 거둔 영화를 감독, 제작, 기획한 인물로, 영화계에서 가장 성공했고 영향력이 큰 인물로 불리우는 미국의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 1946.12.18~). 그는 유대계 출신으로 캘리포니아대학을 졸업하고 텔레비전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슈가랜드 특급'으로 영화계 정식 데뷔해 '쥬라기 공원', 'ET', '터미널',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 '후', '영혼은 그대 곁에' 등 귀에 익은 많은 영화들을 만들었다. 최근에는 '우주 전쟁', '뮌헨'을 감독했고, '게이샤의 추억'을 제작하기도 한 스필버그는 '뮌헨'으로 감독상과 작품상 등 아카데미 5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고, '게이샤의 추억'으로 아카데미 의상상, 촬영상, 미술상을 받았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아카데미 감독상, 촬영상, 음향상, 편집상, 음향효과상, 골든글로브 감독상과 작품상을 받았고 미국 감독협회상, 영화 제작자협회상과 미국 영화의 역사적 공헌도를 인정하는 ‘마일스톤상’을 수상했다. 또한 1994년의 '쉰들러 리스트'로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해 아카데미 총 7개 부문을 휩쓸고 골든 글로브상과 미국 감독협회상을 받았다. 2000년에는 미국 정부로부터 평생공로상과 미국 영화연구소 제정 평생공로상과 영화예술과학 아카데미 어빙 G. 탈버그상을 받았다. 수상경력만으로도 20~21세기 영화계의 우상으로 불리어질 만한 스필버그의 지칠줄 모르는 행보를 기대해 본다.

영화계의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스필버그

거문고의 명인 송사 이수경 출생

내용시작본관 경주(慶州). 호 송사(松史). 서울 출생인 이수경(李壽卿, 1882.12.19~1955.3.12)은 11세 때 장악원(掌樂院) 악공(樂工)이 되고 1902년에 전악(典樂), 1914년에 아악수장(雅樂手長), 1933년에 아악사(雅樂師)를 역임한 뒤 1940년 사퇴하였다. 현금(玄琴)이 전공이나 악기제작에도 능하여 많은 명기를 제작하였으며, 아악부 악사(樂師)로 있을 때에는 거문고 ·정재(呈才) ·악장(樂章) 등을 가르치는 등 아악의 보존과 전승에 힘을 썼다. 단소(短簫)와 시조창(時調唱)에도 일가를 이루었으며 거문고에서는 《영산회상(靈山會相)》의 탄주(彈奏)에 뛰어났었다.

거문고의 명인 송사 이수경 출생

과학
에스페란토 창안자, 자멘호프

내용시작자멘호프(Lazarus Ludwig Zamenhof, 1859.12.15~1917.4.14)는 모국어인 러시아어 뿐만 아니라 폴란드어, 독일어를 유창하게 하였고 또한 모든 언어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함께 뛰어난 언어학적 소질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자멘호프는 민족간의 사이에 일어나는 불화와 불신에 의한 잦은 충돌에 대하여 해결책을 고민하였다. 그는 미움이나 편견의 주된 원인이, 민족적, 언어적인 기반이 다른 사람들의 사이에 중립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도구인 공통의 언어가 없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상호불이해에 있다고 생각했

다. 바르샤바의 학교에 다니면서 자멘호프는 일종의 국제어를 만들려고 시도했다. 그것은 문법이 매우 풍부한 한편, 몹시 복잡한 것이기도 했다. 그의 연구는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계속되었고 훗날 의학공부를 마치고 안과의사로 일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장인의 도움으로 1887년 마침내 연구결과를 발표하였고 그가 발표한 국제어는 이때 사용한 자멘호프의 필명인 ‘에스페란토(희망자라는 뜻)’에 의해 ‘에스페란토 어’로 오늘날까지 불리게 된 것이다.

에스페란토 창안자, 자멘호프

금주의 노벨상

DNA 분자구조를 밝힌 영국 생물물리학자 윌킨스

제1회 노벨상 시상식 내용시작1962년 DNA에 대한 연구로 노벨상을 공동 수상한 영국의 생물학자인 윌킨스(Maurice Hugh Frederick Wilkins, 1916.12.15~2004.10.5)는 물리학자의 아들로 태어난 윌킨스는 케임브리지 등에서 공부하며 고체의 발광등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제2차대전 발발 후 미국에 건너가 맨해튼 계획에 참가하였던 윌킨스는 귀국 후 강의와 연구에 몰두하였다. DNA의 구조 결정과 RNA의 결정화에 대한 연구를 하였고 런던대학교 킹스 칼리지의 의학연구부 생물물리실의 소장을 역임하였다. 연구소에 근무하면서 DNA에 대한 X선 회절 연구를 시작하였고 동료인 제임스와 크릭이 DNA의 분자구조를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60년에 미국의 공중보건협회로부터 앨버트 래스커 상을 받았으며 세포화학적 연구를 위한 광학현미경 기술에 대한 중요한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고고학/지질학 발전 공로자, 미국화학자 리비

고고학/지질학 발전 공로자, 미국화학자 리비 내용시작미국 콜로라도 출생의 화학지 리비(Willard Frank Libby, 1908.12.17~1980.9.8)는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수학하고, 1945년 시카고대학 교수, 1959년 캘리포니아대학 교수가 되었다. 1954〜1959년에 미국 원자력위원, 1959년에는 캘리포니아대학 지구물리학 연구소장으로서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그는 방사화학(放射化學)의 연구자로서 유명하며, 특히 탄소의 방사성동위원소 14C에 의한 절대연대(絶對年代) 측정의 연구로 고고학·인류학·지질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 공적으로 1960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방사성 탄소연대측정법, Radiocarbon Dating(1952, 2판 1955)'이 있다.

폴라로그래피 발명가, 물리화학자 헤이로프스키

폴라로그래피 발명가, 물리화학자 헤이로프스키 내용시작프라하대학교에서 화학·물리학 등을 배운 후 런던대학교에서 유학한 체코슬로바키아의 물리화학자 헤이로프스키(Jaroslav Heyrovský, 1890.12.20~1967.3.27)는 프라하대학과 런던대학에서 각각 학위를 받았다. 그 후, 프라하대학교 교수 및 물리화학연구소장을 거쳐, 1950〜1963년에는 신설된 중앙 폴라로그래피연구소(現 이로프스키 물리화학·전기화학 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적하수은전극(滴下水銀電極)을 이용하여, 용액 중에 흐르는 전류의 세기와, 거기에 가해진 전압 사이의 관계를 자동적으로 그리게 하는 폴라로그래피를 발명, 그것을 이용한 여러 물질의 산화환원반응을 밝히기 위한 연구를 하여, 분석화학 및 용액화학 등 다른 분야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폴라로그래피 발명의 업적으로 1959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미국인 최초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마이컬슨

미국인 최초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마이컬슨 내용시작미국의 물리학자였던 마이컬슨(Albert Abraham Michelson, 1852.12.19~1931.5.9)은 운동하는 매질 속에서의 광속 문제를 연구하고, 카드뮴광(光)의 파장을 기준으로 하는 표준미터의 값을 실측하여 도량형에 공헌하였으며, 분해능이 큰 계단격자를 제작하였으며, 광속의 정밀측정에도 종사하였다. 1885년경부터는 운동하는 매질(媒質) 속에서의 광속 문제를 다루어 E.W.몰리의 협력하에 마이컬슨몰리의 실험을 실시, 빛을 전하는 에테르는 매질의 속도와 관계 없음을 확인하였다고, 이어서 에테르에 대한 지구의 상대운동을 검출하는 실험을 간섭계를 사용하여 실시, 부정적 결과를 확인하였는데, 이것은 후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길을 열어 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893년 같은 간섭계를 사용하여 카드뮴광(光)의 파장을 기준으로 하는 표준미터의 값을 실측하여 도량형에 공헌하였고, 1898년 분해능(分解能)이 큰 계단격자(階段格子)를 제작하였다. 만년에는 광속의 정밀측정에 종사하는 한편, 천체관측에도 관심을 기울여 목성의 위성의 지름 측정도 하였다. 1907년 미국인으로서 최초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온라인미술관
비구상회화의 선구자, 칸딘스키
비구상회화의 선구자, 칸딘스키   비구상회화의 선구자, 칸딘스키

내용시작추상 미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청기사파를 창립해 미술사에 중요한 획을 그은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2.16~1944.12.13). 러시아태생인 그는 현대 추상미술의 선구자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프랑스에 귀화한 칸딘스키는 1896년 뮌헨에서 화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910년 최초의 추상화를 그리기 시작한 그는 1911년 뮌헨의 예술가 집단인 청기사파를 프란츠 마르크와 조직하였으며 이후 비구상회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러시아에서 미술학교 교수를 지냈고 베를린에서 바우하우스 교수로 지내며 후진양성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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