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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여행

인물과 역사를 바로 알고 현재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 봄으로써 선조들의 지혜를 알아 봅시다.

지난 시간여행
제목 시간여행 제142호
등록일 2009. 11. 20.
첨부파일 첨부파일없음

고인돌 유적지 세계유산으로 등록 상세정보보기

이주의 이벤트와 시간여행 구독, 추천하기 시간여행 구독하기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중 지난 2000년에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강화·화순·고창의 고인돌 유적은 밀집분포도나 형식의 다양성으로 고인돌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며, 장례 및 의식유적을 만들어냈던 선사시대 기술 및 사회발전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어

내용시작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중의 하나인 고인돌은 세계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지역에 따라 시기와 형태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동북아시아 지역이 세계적인 분포권에서 가장 밀집된 곳으로 그 중 우리나라가 그 중심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전국적으로 약 30,000여 기에 가까운 고인돌이

선사시대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보존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한-일간 해저 케이블이 개통

한-일간 해저 케이블이 개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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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1월 28일 한-일간 해저 케이블이 개통되었다. 해저 케이블이란 전기통신을 전송하기 위하여 해저에 시설된 케이블을 말한다. 해방이후 우리나라는 국력의 신장에 따라 국제 통신의 수요가 격증하여 왔는데, 1980년도 이후 더욱 급증할 국제 통신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대량 전송수단인 해저 케이블의 신설(新設)을 검토하게 되었다. 1977년도 기본계획이 수립되었으며, 한국 측에서는 체신부, 일본 측에서는 일본 국제 전신전화 주식회사가 공동으로 1978년 5월부터 해저 케이블의 건설을 위한 해양 조사 및 해저 케이블 건설 및 보수 협정이 체결되었다. 실제 케이블 시설 공사는 1980년 4월 7일부터

시작하여 8월 19일에 완료했으며, 개통 시까지 조정시험을 계속하여왔다. 부산 송정(松亭)에서 일본의 하마다(浜田)까지 전장 280km에 달하는 거리에 건설된 이 해저 케이블공사는 총 건설비 1백 37억 9천 8백만원이 소요되었으며, 해양조사를 시작한지 2년 6개월 만에 개통을 하기에 이르렀다. 한-일간 해저 케이블의 개통으로 서기 2천 년대 초반까지의 장기적인 통신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효과가 있고, 통신 보안이 강화되며, 통신의 품질이 향상되었으며, 또한 무선 통신 시설(스켓타 시스템:Scatter System)외에 유선시설을 설치함으로써 전송로의 2원화를 통한 통신 운용의 융통성을 기하게 되었다.

조선조 태조 한양으로 천도

한-일간 해저 케이블이 개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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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즉위한 이래 국가 통치체제를 정비하고자 수도를 개경(현재의 개성)에서 새로운 곳으로 옮길 필요성을 느꼈다. 당시 개경은 고려 왕조의 수도였으며 풍수지리설로 보아도 지덕(地德)이 이미 쇠퇴하였다고 믿었기 때문에 계룡산, 모악(母岳, 현재 신촌동ㆍ연희동 일대)등의 후보지를 살펴본 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한양을 새로운 도읍지로 정하자'는 상신(上申)에 따라 1394년 9월 27일 (음력 8월 24일) 도

읍을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한양은 도성(都城)과 성밖 10리까지의 지역을 경계로 1395년에 경복궁, 종묘(宗廟), 사직(社稷) 등을 건설하고 북은 백악(白岳), 동은 낙산(駱山), 남은 남산(南山), 서는 인왕산(仁旺山)을 연경하는 도성을 축조하였으며 출입문으로는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을 세웠다. 오늘날 서울은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아시아ㆍ 태평양시대를 주도하는 국제도시로서 도약하였다.

수원성곽 복원

한-일간 해저 케이블이 개통

내용시작조선조 성곽 건축 예술의 꽃이라 할 수 있으며 정조대왕의 애절한 효심이 서려있는 수원성(水原城)은 조선조 제22대 정조대왕께서 당쟁에 휘말려 뒤주 속에서 비운의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성심과 개혁 의지로 축조한 성이다. 원래의 명칭은 `화성(華城)`이며, 1794년에 착공 2년여 만에 완공되었다. 18세기 실학자들의 지혜가 결집되어 합리적이고 실용적으로 축조되었으며 거중기, 녹로, 활차 등 근대과학적인 장비를



개발·사용하여 축성한 수원성곽은 중국, 일본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정치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

하고 있다. 수원성은 ·축조이후 일제의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

성역의 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철강왕 카네기

철강왕 카네기

내용시작19세기 후반에 미국의 철강산업을 거대하게 성장시킨 장본인이며 당대 최고의 자선 사업가였다. 카네기는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직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1848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한 카네기는 어려서부터 방적공, 기관조수, 전보배달원 등의 여러 직업에 종사하다 1853년 펜실베이니아철도회사

에 취직, 1865년까지 근무하는 동안, 침대차회사, 철도기재제조회사, 운송회사 등에 투자하여 커다란 성공을 하였다. 미래에 대한 예측과 천부적인 사업가 기질을 가졌던 카네기는 투자수익으로 얻은 막대한 이윤을 기반으로 1865년부터 철강업을 시작하였다. 성공을 거듭한 카네기는 사업을 확장 1982년에



는 미국 철강 생산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규모의 카네기철강회사를 설립하였으며 1901년 인수합병을 통해 미국 철강시장의 65%를 지배하는 US 스틸사를 탄생시켰다. 자신의 회사를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고 은퇴한 카네기는 막대한 부를 교육과 문화사업에 투자하여 부의 사회 환원을 몸소 실천하였다. 인간의 일생은 부의 축적과 축적된 부의 사회 환원이라는 신념을 가졌던 카네기는 성공한 사업가로

서, 당대 최고의 자선사업가로서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로서 기억될 것이다.

투탕카멘 무덤 발굴

투탕카멘 무덤 발굴

내용시작1922년 고고학적으로 위대한 발견으로 일컬어지는 발굴이 이루어졌다. 이집트 테베 서쪽 ‘왕가(王家)의 계곡’에서 전대미문의 완벽한 보존 상태를 간직한 파라오의 무덤이 발굴된 것이다. 1922년 영국의 고고학자 H.카터와 카나본경(卿)에 의해 이루어진 이 발굴의 주인공은 이집트 제18왕조 제12대 왕

(재위 BC 1361〜BC 1352)인 투탕카멘이었다. 어려서 즉위하여 짧은 재위기간을 거쳐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는 투탕카멘은 역사상 별다른 업적은 없다. 이 묘가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며 도굴꾼들에게서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위에 있는 람세스 6세의 무덤에 의해 입구가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



다. 이 발굴에서는 당시까지 보지 못했던 수많은 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젊은

파라오의 얼굴모양대로 만들어져 씌워져 있었던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로서 고대 이집트의 화려한 문

화를 잘 표현해 주는 유물이다.

'집배원의 날' 제정

'집배원의 날' 제정

내용시작우리나라에 근대식 우편제도가 실시된 후 우정사업의 첨병으로 맡은바 임무에 충실하는 집배원을 위해 그 노고를 격려하고자 1967. 11. 27 체신부 훈령 제341호로 매년 5월 31일을 '집배원의 날'로 제정하였다. 집배원의 날은 1973년부터 고종황제께서 우정총국 개설을 명령한 날을 기념해 1972년 제정된 ‘체신의 날’과 통합되었으며 1996년 부터는 정보통신의 날로 개칭되어 매년 5월 30일 치러지고 있다.

정치
조선 성리학의 기본 틀을 정립한 퇴계 이황

내용시작퇴계(退溪) 이황(李愰, 1501.11.25~1570)은 한국이 낳은 위대한 철인으로 칭송 받는다. 그는 사대사화(四大士禍)로 선비들이 끊임없이 화를 당하던 시대를 살며, 철저한 학문을 통하여 진리를 바르게 인식하고 실천함을 통해서만 시대적인 난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학문에 전심전력을 기울여 내면에 진리가 축적되고 외적으로 실천의 힘이 쌓인 다음에야 체득한 사상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53세 이후에야 자신의 학문세계를 세상에 공개하기 시작한 대기만성(大器晩成)형학자였지만, 2000여 편의 주옥같은 시와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논문

에 비할 수 있는 장문의 편지를 통하여 죽음이 가까워질 때까지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였다. "군자의 자신을 완성하기 위한 학문은 깊은 산 무성한 숲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종일토록 향기를 발하는 난 초의 삶과 같다"고 말한 것처럼 그의 학문 사랑이 조선시대 성리학의 토대를 마련하는 뿌리가 되었다. ※ 사대사화(四大士禍) : 조선 시대에, 선비들이 화(禍)를 입었던 네 차례의 큰 박해를 일컫는 말로, 연산군 4년(1498)부터 명종 원년(1545) 사이에 일어난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를 뜻함.

조선 성리학의 기본 틀을 정립한 퇴계 이황

독일의 사회주의자 엥겔스

독일의 사회주의자 엥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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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시작독일의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엥겔스는 초창기 F.오스발트라는 필명으로 많은 기고문을 신문 등에 실었으며 그의 주장들은 철학과 종교적인 논쟁에 대한 무서운 선전가로서 인정받았다. 1842년 베를린의 근위포병연대의 복무를 마치고 제대 후, 쾰른의 신문 편집소에서 처음으로 마르크스와 만난 엥겔스는 자본주의 분석연구에 관심을 가졌다. 이 연구를 통해 엥겔스는 자유주의 경제이론의 모순점을 제시함과 동시에 시회주의에 대한 과학적 해석을 내어놓았다. 마르크스와 지속적인 친분을 쌓은 엥겔스는 1845년 마르크스와 ‘독일

이데올로기’의 공동 집필을 통하여 유물사관(唯物史觀)을 제시,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와 함께 공산주의 단결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한편 공산주의 통신위원회를 거쳐 1847년 공산주의자 동맹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1848년 2월 엥겔스는 마르크스와 공동으로 그들의 필생의 역작 ‘공산당

선언’을 발표하였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유명한 말로 끝을 맺는 이 선언은 ‘공산주의자는 지금까지의 모두의 사회 질서를 강권으로 전복하는 것에 의해서만 자기의 목적이 달성된다.’로 공공연하게 선언하고 있다. 선언 직후 프랑스에서 일어난 2월혁명을 기점으로 온 유럽이 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을 당시 엥겔스는 마르크스

와 함께 그 중심에 서있었던 것이다. 1849년 혁명의 실패와 잇따른 망명생활을 거쳐 맨체스터에서 기반을 잡은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활동의 경제적 지원과 더불어 제1인터내셔널의 총무위원으로서 국제노동운동의 발전에 진력하였다.

중국군 한국전 개입

중국군 한국전 개입

내용시작1950년 6월 동족상잔의 비극을 알리는 포성이 울리고 낙동강 까지 몰렸던 남한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고 전세를 뒤집었다. 남한은 UN군의 참전과 함께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 주력을 거의 궤멸상태에 빠뜨리며 북으로 북으로 진군하였다. 10월 20일 평양을 탈환하고 10월 26일 압록강변에 도달한 연합군은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의 붕괴로 북한 전 지역의 점령



이 임박하게 되자 대규모의 중국인민군이 개입함으로써 전쟁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압록강을 넘어 물밀듯이 밀려오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압도된 UN군은 1951년 4월 또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말았다. 공산수중에 들어간 전선을 회

복하고자 UN군은 중국을 공식적으로 침략자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였다. 밀고 밀리던 전선에서 지루한 공방전이 연속되자 맥아더 장군은 중국본토의 전략적인 표적에 대한 공격을 주장하였으나 트루먼 대통령의 반대로 무산 되었

다. 맥아더장군의 해임과 후임 사령관의 부임은 전선을 상호 묵시적인 합의하에 전선의 이동이 없는 진지전의 형태로 만들어 버렸고 이후 휴전협정시까지 고착되었다.

리투아니아의 의민족운동 지도자 바사나비치우스

리투아니아의 의민족운동 지도자 바사나비치우스

내용시작1873년 역사학과 고고학을 공부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으나 1년 뒤 의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1879년 졸업하고 그로부터 25년을 거의 불가리아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보냈다. 리투아니아의 문화·정치를 다룬 중요한 잡지 〈아우슈라 Au ra〉(1883~86)의 창간호를 편집했다. 차르 체제가 리투아니아어 서적 출판을 금지했기 때문에 이 잡지는 동프로이센에서 인쇄되어 리

투아니아로 몰래 반입되었으며, 리투아니아 민족운동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05년부터 빌니우스에서 살았다. 리투아니아의 도덕적인 지도자로 대접받았고 1905년 리투아니아의 자치를 요구한 빌니우스 '대회의'의 의장을 맡았다. 1917년 리투아니아 의회(Lietuvos Taryba) 의원으로 뽑혔다

과학
덴마크의 공학자 포울센(Poulsen, Valdemar, 1869〜1942) 출생

내용시작덴마크 전기기술자·발명가. 코펜하겐대학을 마치고 코펜하겐전화회사에서 현재의 테이프 레코더의 선구인 <텔레그라폰(蓄音電信)>을 발명하였다. 그 뒤 계속 연구하여 지속전파(持續電波)를 발생하는 고주파용 아크를 발명, 1903년 무선전신용으로 실용화시켰다. 그 뒤 코펜하겐의 군항 및 기타 장소에 송신소를 건설하여 영국과 통신하였다.

덴마크의 공학자 포울센(Poulsen, Valdemar, 1869〜1942) 출생

찰스 다윈, ‘종의 기원’ 출판

내용시작영국의 생물학자인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2.12~ 1882.4.19)의 생물의 진화에 관한 저서인 “종의 기원”이 1859년 11월 24일 출간 되었다. 1931~36년에 비글호를 타고 세계일주 항해를 한 경험을 통해 생물의 진화에 대해 알게 된 다윈은 해당 자료를 수집하고 T. 맬서스의 인구론에서 힌트를 얻어 생물의 변이성, 적응 및 생존경쟁, 자연선택, 적자생존 등의 견해를 중심으로 생물의 진화와 그 요인에 대해 설명했다. 영국의 A. 월리스가 똑같은 진화이론을 착상 한 것을 알고 1858년에 공동으로 학회에 발표했으며 이듬해 책으로 출판했다. 이 책은 생물학에서의 업적으로서 뿐 만 아니라 사상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전문14장으로 구성된 ‘종의 기원’은 간행 직후 종교계의 심한 공격받기도 하였다.

찰스 다윈, ‘종의 기원’ 출판

일본의 세균학자 히데요

내용시작노구치 히데요(野口英世, 1876.11.24~1928.5.21)의 본명은 노구치 세이사쿠[野口淸作]이다. 그는 전신마비로 고통 받는 환자의 뇌 속에서 매독을 일으키는 병원체인 “트레포네마 팔리둠”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1897년 도쿄의 일류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1900년에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펜실베이니아대학교로 가서 사이먼 플렉스너 밑

에서 뱀의 독을 연구했다. 1904년에 뉴욕시티의 록펠러 의학연구소에 연구원으로 들어갔으며 그 후 거의 25년 동안 이곳의 후원을 받았다. 시험관에서 배양하지 못했던 미생물을 배양하는 방법을 창안해냈으며 척수성소아마비와 트라코마를 연구했고, 황열병 예방백신과 혈청제를 만들기 위해 애썼다. 아프리카에서 황열병을 연구하다가 그 병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일본의 세균학자 히데요

스웨덴의 물리학자 셀시우스

내용시작우리들이 과학 및 일상생활에서 가장 널리 사용하는 온도눈금으로 섭씨눈금과 화씨눈금이 있다. 이중 섭씨눈금은 1742년 스웨덴의 물리학자 셀시우스가 제안한 한란계가 그 시초로서 이후 개량을 거듭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온도의 표시단위는 ℃로 표시하며, 1기압 하에서 얼음의 녹는점을 0℃, 물의 끓는점을 100℃로 하여 그 사이를 100등분한 것으로 한 눈금의 온도차를 1℃로 한다. 또한 셀시우스는 천문학자로도 많은 활약을 하였다. 1730년부터 웁살라대학의 교수를 지냈고 1740년 웁살라천문대 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6년동안 오로라를 관측, 그 결과를 발표하였고 유럽 최북단 지역인 라플란드 지방의 자오선 측정을 제안하고 1736년 이를 위해 조직된 프랑스 탐험대에 참가하여 극지에 관한 뉴턴의 이론을 증명하였다.

스웨덴의 물리학자 셀시우스

독일의 기술자 벤츠

내용시작독일 카를스루의 공업학교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한 벤츠는 공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1871년 만하임에 기계공작 공장을 설립하였다. 1883년 벤츠사(Benz & Cie.)를 설립 1884년 세계 최초로 전기점화 장치를 장착한 2행정 가스기관을 만들었으며 1885년 초 3륜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벤츠 자동차를 재작 운행하였다. 1886년 특허를 획득한 벤츠는 내연기관(內燃機關)으로

동력을 얻는 세계 최초의 실용적인 자동차를 설계, 제작하는 회사로서 1893년 최초의 4륜 자동차에 이어 1899년부터는 경주용 자동차를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벤츠가 설립한 자동차회사는 1926년 다임러사와 합병하여 다임러벤츠사가 되었고 1936년 세계최초의 디젤승용차 생산, 항공기, 전차에 이어 오늘날 최고급 승용차의 대명사로 자리 잡고 있다.

독일의 기술자 벤츠

남극조약 가입

내용시작지구 자전축의 남쪽 끝인 남극점 주변의 대륙과 섬을 말하는 남극은 1949년부터 대규모의 국제협력에 의한 남극관측이 이루어졌다. 관측에 참가한 12개국은 1959년 남극조약을 체결하고, ‘남극지역은 평화적인 목적을 위한 항구적 이용과 더불어 국제적인 불화의 무대 또는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 전 인류의 이익이 된다’는 데 합의하였다. 오늘날 남극은 매장된 석탄, 석유 등 막대한 양의 지하자원과 고래, 크릴새우등의 해양자원으로 인하여

세계각국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미지의 세계이다. 우리나라는 1985년 11월 6일부터 12월 9일까지 남극 관측탐험대를 파견하여 국력신장의 대외 과시, 남극자원 개발시의 참여권 확보 및 남극조약에 가입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한 바 있으며, 1986년 11월 28일 세계에서 33번째로 남극조약 가입국이 되어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정치적 비중을 높이는 계기가 됨과 동시에 미래의 자원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남극조약 가입

세계최초의 조력발전소

내용시작1966년 영국해협에 면한 프랑스의 랑스강 하구에서는 세계 최초의 조력발전소가 준공되었다. 조수 간만의 차를 이용하여 전기를 발전하는 방식으로 완공당시 프랑스 수력발전량의 약 1%에 해당하는 544GW를 생산하였다. 조력발전은 경제적이며 친환경적인 발전 방법으로 인해 유망한 발전방법으로 주목받고 있으나 까다로운 입지조건으로 많은 제약이 따른다.

세계최초의 조력발전소

금주의 노벨상

독일의 응용화학자 치글러

독일의 응용화학자 치글러 내용시작 저압(低壓) 폴리에틸렌합성법의 발명자로 유명한 치글러(Ziegler, Karl, 1898.11.26~1973)는 1963년 플라스틱의 질을 크게 향상시킨 연구를 한 공로로 줄리오 나타와 함께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1920년 마르부르크대학을 졸업한 치글러는 마르부르크대학교,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등지에서 강의하며 연구를 계속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그는 유기알루미늄 화합물 연구에 전념하던 치글러는 1953년 사염화티탄을 촉매로서 이용하면 통상적인 환경에서 에틸렌중합이 급속하게 진행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으며 이어 저압법으로 폴리에틸렌을 제조할 수 있는 길을 열어 고분자화학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노벨평화상]스웨덴의 정치가 브란팅

[노벨평화상]스웨덴의 정치가 브란팅 내용시작20세기초 20여 년 간 융화적인 외교관계를 펼친 사회민주주의의 선구자로서 1921년 그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스웨덴의 정치가 브란팅(Karl Hjalmar Branting, 1860.11.23~1925.2.24)은 학생시절부터 급진민주주의적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저널리스트”, “사회민주주의, Socialdemokraten” 등의 편집장으로 활약하며 일찍부터 노동조합과 접촉을 가졌다. 1889년 사회민주당을 창립하여 1896년 이후부터 국회의원, 1907년에는 사회민주당의장이 되었다. 그의 목표는 의회주의적 방법으로 노동자의 지위를 강화하는 데 있었고, 이를 위해 국회에서 노령연금, 여성참정권, 8시간 노동제(1919) 등의 보장을 위해 활동하였다. 재무장관과 사회민주당 내각의 수상을 역임하기도 한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중립주의를 엄수하여 전쟁 종결을 위해 노력하였고, 1919년 베를린에서 개최된 제2인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집회에서는 반(反)볼셰비키파(派)의 입장을 강조하여 끝까지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였다.

온라인미술관
프랑스의 화가 로트레크
프랑스의 화가 로트레크
  20세기 화가 마그리트

내용시작로트레크(Toulouse-Lautrec, Henri de, 1864~1901)는 풍자적인 화풍의 유화와 석판화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날카롭고 박력 있는 표현으로 근대 소묘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많은 작품들을 남겼으며 중후한 느낌과 신선하고 아름다운 색조가 풍부한 독자적인 작풍을 통해 독특한 예술세계를 구축하였다. 고흐, 고갱 등과 교류하였으며 파리의 몽마르트르에 아틀리에를 차리고 환락가 정경을 소재로 삼아 정력인 작품 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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