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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여행

인물과 역사를 바로 알고 현재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 봄으로써 선조들의 지혜를 알아 봅시다.

지난 시간여행
제목 시간여행 제141호
등록일 2009. 11. 13.
첨부파일 첨부파일없음

국내 최대 사장교, 서해대교 개통 상세정보보기

이주의 이벤트와 시간여행 구독, 추천하기 시간여행 구독하기 일본 대장성인쇄국에 의뢰하고 우정총국의 개국과 동시에 발매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우정총국 개국일까지 5문과 10문 2종만이 도착되어 한성(서울)과 인천 간에 체송된 우편물에 사용되었을 뿐, 나머지 25문과 50문, 100문의 3종은 같은 해 12월 4일 발발한 갑신정변의 실패로 우정총국이 폐쇄될 때까지 현품

내용시작우리나라 근대우편의 시작은 1884년 4월 22일 고종황제의 칙령으로 그 장대한 첫 발을 내딛었다. 우리나라 근대 우편의 선구자인 홍영식 선생이 초대 우정총판으로 임명된 후 체계적인 제도를 마련하였고, 새로운 우편제도를 실시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우정총국은

1884년 11월 18일 역사적인 첫 업무를 개시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인 문위우표도 함께 탄생하게 되었다. 문의우표는 이 때 발행된 우표의 액면이 당시의 화폐 단위인 ‘문(文)’이었기 때문에 수집가들 사이에 붙여진 이름으로써 당초 우리 정부에서 5종의 우표 인쇄를

이 도착되지 않아 사용해보지도 못 하고 미발행으로 남게 되었다. 우리나라 신식우편제도의 요람인 우정총국이 갑신정변의 실패로 같은 해 12월 8일 왕명에 의하여 폐지됨으로써, 대한 민국 최초로 발행되었던 문위우표는 모처럼 이룩한 신식 우정 사업제도와 함께 불과 20여 일 만에 그 명을 다 했던 것이다.

반계 희귀조 황새, 제주 성산포서 발견

계 희귀조 황새, 제주 성산포서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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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희귀조 황새 1마리가 제주도 남제주군 성산포에서 발견됐다. 이 황새는 1976년 11월 16일 성산포수산고 양어장에 나타나 수만마리의 황로, 백로, 왜가리 틈에 섞여 지내는 것이 목격돼 언론에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이 황새를 1971년 4월 충북 음성군에서 쌍으로 살다 밀렵군에 의해 짝을 잃은 암놈 황새로 추정했다. 천연기념물 199호인 황새는 1920년대까지 세계적으로 40마리정도였던 것이 2차대전후에는 차차 줄어 1958년에는 21마리, 1966년에는 9마리뿐인 것

으로 보고됐다. 황새는 황새목 황새과의 조류로 몸길이는 약 112cm정도이며 날개길이는 약 66cm정도이고 온몸이 순백색이지만 날개 끝의 깃털과 부리는 검은색이다. 황새의 서식지는 뉴질랜드·오스트레일리아 및 북아메리카의 북부를 제외한 전 세계이다. 또한 황새는 명관이나 명관근이 없어 울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길조로 여겨져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서해와 충북 일대에서 번식하던 텃새였으나 6·25전쟁과 1960년대쯤 밀렵으로 모두 희생됐다.

사회
콩코드 여객기 첫 등장

내용시작1969년 11월 16일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 개발한 세계 최초의 초음속 여객기인 콩코드가 첫 선을 보였다. 세계 여러나라의 조종사들이 콩코드 여객기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등장한 콩코드 여객기! 그러나 콩코드 여객기는 과다한 연료소비와 큰 소음 등의 단점 때문에 저조한 판매실적을 보였다. 콩코드 여객기는 1979년부터 생산이 중단됐다.

콩코드 여객기 첫 등장 상세정보보기

 독립신문과 갑신정변의 주역, 서재필

독립신문과 갑신정변의 주역, 서재필

내용시작독립신문 발간 및 독립협회 창립 등 한말 독립운동에 활발한 활동을 한 서재필(徐載弼, 1864.11.20~1951.1.5)의 본관은 대구(大邱)이며, 호는 송재(松齋)이다. 전남 보성에서 출생한 그는 1884년 12월 김옥균, 홍영식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18세의 젊은 나이로 병조참판 겸 정령관(正領官)이 되었다. 그러나 정변의 실패로 일본을 거쳐 1885년 미국으로 망명, 1889년 조지워싱턴대학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세균학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



고, 본국의 명성왕후 일파가 몰락하자 1896년 귀국 후 중추원(中樞院) 고문에 임명되었다. 정부예산으로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한편, 이상재(李商在) 및 이승만(李承晩) 등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결성 하고 모화관(慕華館)을 인수/개축하여 독립회관으로 활용 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The Evening

Ledger'와의 제휴를 통해 한국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한국에 친화적인 성향의 미국인을 규합하는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1925년 호놀룰루의 범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을 폭로/규탄하였으며, 1947년 미군정

장관 J.R.하지의 초청으로 귀국하여 미군정청고문(美軍政廳顧問)으로 있는 동안 국민의 추앙을 받았으나 이승만과의 불화 및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1977년 그의 독립운동 활약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수에즈 대운하 개통

내용시작프랑스의 외교관으로서 이집트의 여러 곳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였던 러셉스는 이집트 대운하의 꿈을 안고 있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두 대륙의 경계인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를 가로지르는 운하의 건설이야 말로 아프리카 대륙을 우회하지 않고 곧바로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여 조국 프랑스로 하여금 유럽과 아시아의 무역로를 지배하는 위치에 설수 있게 하는 중대한 사업이었던 것이다. 러셉스의 꿈은 그가 젊었을 때 친분을 맺었던 프랑스 유학생 사이드파샤가 부왕의 뒤를 이어 이집트의 왕이 되자 현실로 이루어 질 수 있었다. 그는 곧 운하 개발안을 제출, 국제 기술자위원회의 승인을 얻었고 이집트 국

왕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운하건설을 시작 할 수 있었다. 총 길이 168km에 달하는 수에즈 운하는 1854년 설립된 수에즈운하회사를 시점으로 어려운 공사를 성공리에 마치고 1868년 대운하를 완성하였다. 유럽과 인도양 및 서태평양을 연결하는 최단거리의 항로를 제공하는 수에즈 운하는 중동의 물류 요충지로서 오늘날 이집트의 주요 수입원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수에즈 대운하 개통

금강산관광 1호선, ‘현대금강호’ 첫 출항

금강산관광 1호선, ‘현대금강호’ 첫 출항

내용시작1989년 1월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이 방북하여 금강산 남북공동개발 의정서를 체결하였다. 이후 화해무드는 정부의 햇볕정책이 맞물려 1998년 6월 23일 금강산관광 계약체결, 8월 6일 통일부의 현대상선, 현대건설, 금강개발의 협력사업자 승인에 이어 10월 13일 장전항 공사를 위한 자재와 장비를 실은 배가 출항하며 오랜 기다림이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11월 14일 금강산 관광선의 첫 시험운항을 시작으로 마침내 11월 18일 금강호가 첫 출항하며 민간인들이 북한을 여행함으로써, 남북 분단 50년사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

부산 APEC 정상회의 개막

부산 APEC 정상회의 개막

내용시작2005 APEC 정상회의가 2005년 11월 18일~19일에 거쳐 부산에서 개최되었다. APEC(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아시아ㆍ태평양 경제협력체)은 아시아와 태평양 연안 국가들이 공동번영이라는 공동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1989년 창설한 지역 협력기구로, 현재 아ㆍ태 지역 21개국이 가입해 있다. APEC은 전 세계 GDP의 약 58%, 교역량의 46%를 점유하고 있어 우리나라 최대의 통상, 투자 시장인 동시에,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한반도 주변 4개국의 정상들이 모두 참여하고 있어 우리의

외교ㆍ안보에 특히 의미 있는 협의체다. '하나의 공동체를 향한 도전과 변화'라는 주제하에 아시아ㆍ태평양 21개국 정상 등 1만여 명의 국내외 인사가 참가하는 이번 정상회의는 우리나라의 국가이미지와 우리 기업의 브랜드 가치를 상승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2005 APEC 정상회의는 동백섬에 위치한 `누리마루 APEC하우스’에서 열렸으며 ‘누리’와 정상, 꼭대기를 의미하는 ‘마루’가 합쳐진 순수 우리 말로, 세계의 정상이 모여 APEC회의를 하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사적 제32호 독립문 완공

사적 제32호 독립문 완공

내용시작1963년 사적 제32호로 지정된 독립문은 광무 원년(1897) 서재필을 중심으로 한 독립 협회가 우리나라의 영구 독립을 선언하기 위하여 국민의 헌금으로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세운 것으로 1978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높이 14.28m, 너비 11.48m인 독립문은 1896년(건양 1)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徐載弼)이 조직한 독립협회 발의로 고종의 동의를 얻어 3,825원을 모금해 1896년 11월 21일 정초식을 거행하고 이듬해 11월 20일 완공했다.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 가 설계했으며, 당시 서양건축의

조영경험이 있던 목수 심의석(沈宜碩)이 공사감독을 맡아 중국인 노동자를 고용해 만들었다(건물 설계자가 러시아인 사바틴이라는 설도 있음). 화강암 1,850개를 쌓아 만든 독립문은 가운데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虹霓門)이 있고 내부 왼쪽에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꼭대기에는 난간을 둘렀다. 이맛돌 위에 앞뒤로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 쓰고 그 좌우에 태극기를 조각한 현판석을 달아놓았다. 독립문은 1978년 현재의 위치(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 941번지)로 옮겨졌다.

제1회 폐의 날 제정

제1회 폐의 날 제정

내용시작대한결핵 및 호흡기학회는 국내 유병률이 높아지고 있는 ‘만성폐쇄성폐질환(COPD)’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2003년 11월 2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컨벤션홀에서 ‘폐암보다 고통스러운 COPD’를 주제로 ‘제1회 폐의 날’ 행사를 개최하였다. COPD는 흡연, 대기오염 등에 의해 폐 기능이 떨어져 숨쉬기가 어려워지는 질환으로, 미국에서는 4번째, 세계적으로는 6번째로 주요 사망원인이 되고있지만 일반인들의 인지도가 낮아 미국, 유럽 등에서는 매년 ‘COPD 데이’ 행사를 갖고 있다. 2003년 시행 이후, 대한결핵 및 호흡기학회는 매년 “폐의 날”행사를 개최하여 COPD의 위험성을 알리는데 노력하고 있다. 2009년 올해에는 광화문 청계광장에서 시민 대상의 “건강한 숨을 위한 COPD” 검문이벤트을 진행한 바 있다.

대한민국 정부, IMF(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 신청

대한민국 정부, IMF(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 신청

내용시작IMF는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의 약어이지만 한국에서는 ‘그 이상’이다. 기업 도산, 대량 실업, 노숙자, 자살, 가족 해체 등을 연상시키는 공포의 표상으로 우리 기억속에 남아 있다. 1997년 11월21일 밤 10시. 이틀 전 임명장을 받은 임창열 신임 경제부총리는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IMF에 유동성 조절자금 지원을 요청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임 부총리는 회견 직후 미셸 캉드쉬 IMF

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구제금융을 공식 요청했다. 구제금융 신청 20여일 전만 해도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여건)이 튼튼하다”(강경식 당시 경제부총리)던 정부는 이미 11월14일 내부적으로 IMF행을 결정한 터였다 IMF 그제금융 신청

이후 대한민국의 경제가 큰 위기를 겪게 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국제통화기금에서 요구하는 조건들을 수행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회사들의 부도 및 경영 위기를 초래 하였고 대량 해고와 경기 악화로 인해 온 국민이 큰 어려

움을 겪었다. 이러한 위기타파 노력의 일환으로 대국민 ‘금모으기’, ‘아나바다 운동’ 등을 통해서 2001년 8월 한국은 IMF에서 구제받았던 모든 금융 빚을 청산하였다.

정치
나치 독일, 바르샤바에 게토설치

내용시작역사적으로 게토의 의미는 중세 이후의 유럽 각 지역에서 유대인을 강제 격리하기 위해 설정한 유대인 거주 지역을 일컫는 것으로 1179년 제3회 라테라노공의회에서 그리스도 교도와 유대교도와의 교류를 금지한 데서 발단하였다. 14세기에 페스트의 창궐로 유대인 박해가 심했던 유럽 각지에서는 그리스도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설치되어 담장으로 둘러싸인 격리지구로 다른 지역과 분리되어 있었다. 시민권은 허용되지 않았고 단지 거주지 내의 자치권만이 인정되었던 게토는 중부 유럽에서 전형적인 형태로 이어져 내려왔으며 ‘게토’라는 말은 1516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 설치된 유대인 거주지역에 처음으 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18세기 말

이래 유대교도 해방과 더불어 차별주의는 붕괴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40년 이후 나치의 인종차별정책에 의해 그 악몽이 되살아나게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중세의 게토를 이어간 것처럼 보였으나 나치의 그것은 훗날 유대인 말살정책과 이어지는 것으로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유럽에서 유대인을 없애기 위한 히틀러의 '마지막 해결책'의 하나로 세워진 게토 중 가장 유명했던 바르샤바 게토는 기아와 질병으로 인해 매월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그 참혹함은 훗날 바르샤바 게토 봉기로 이어져 수백 명의 독일군이 죽고 5만 6,000명 이상의 유대인이 살해되거나 압송되는 비극을 낳았다.

나치 독일, 바르샤바에 게토설치

영국의 연합군 사령관 몽고메리 출생

영국의 연합군 사령관 몽고메리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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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시작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 사령관으로서 뛰어난 활약을 한 영국의 육군 원수 몽고메리(Bernard Law Montgomery, 1887.11.17~1976.3.24)는 1908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군에 투신하였다. 유능하고 다부진 지휘관으로서 명성이 자자했던 그는 1942년 8월 북아프리카 주둔 영국 제8군의 사령관으로서 사막의 여우 롬멜에게 패배하여 사기가 꺾여있던 부대를 맡아 엘알라마인 전투(1942. 11)로 롬멜

을 이집트에서몰아냈고 북아프리카 작전을 통해 아프리카주둔 독일군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1944년 아이젠하워 장군 밑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몽고메리는 육군원수로 진급한 뒤 영국군과 캐나다 제21군을 이끌고 프랑스 북부,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마침내 1945년 독일 북부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가터 기사작위와 자작작위를 받은 그는 항상 신중하고 완벽한 전략가로서 그 철저함 때문에 항상 느리다는 불만과 비판을 받기도 하였지만 덕분에 확고한 승리를 거둘 수 있

었던 휘하의 장교와 사병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다. 1946~48년에는 영국군 참모총장, 서유럽동맹 의장,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의 유럽 연합군 최고사령부(SHAPE) 부사령관을 지냈다.

무남독녀 간디, 인도의 여성총리되다

무남독녀 간디, 인도의 여성총리되다

내용시작인도의 정치가로 인도국민회의파 운영위원회에서 활동하며 후에 총리를 지낸 간디(Indira Priyadarshini Gandhy, 1917. 11.19~1984.10.31)는 알라하바드에서 태어났다. 인도의 초대 총리인 J.네루의 무남독녀이고 F.간디의 부인이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그녀는 12세부터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1938년 인도국민회의파에 입당하였으며, 13개월간 투옥된 일도 있다. 옥스퍼드대학 재학 중, 후에 하원의원이 된 F.간디와 결혼하였다. 독립 후에는 아버지 네루의 호스티스 역할을 하면서 정치가로서

의 훈련을 쌓은 그녀는 1955년 여당인 인도국민회의파 운영위원회에서 활동하여 1959년 당수가 되었고, 1964년 바하두르 샤스트리 내각에 입각, 1966년 샤스트리 사망으로 총리에 취임하였다. 경제안정에 힘썼으나 강권정치를 편다는 야당의 공격으로 1977년 총선거에서 야당에게 패배하여 한때 정계를 떠나 있었다. 그러나 인민당이 우유부 단한 정책으로 국민의 신임을 잃자, 1980년 총선거에서 승리, 총리에 복귀하였으나 1984년 경호원에 의하여 암살당했다.

제게티즈버그 연설(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을 아시나요?

게티즈버그 연설(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을 아시나요?

게티즈버그 연설이란 미국의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대통령이 1863년 11월 19일, 미국 남북 전쟁의 격전지인 펜실베이니아 주(州) 게티즈버그의 전사한 장병들의 영혼 을 위로하는 식전에서 행한 연설을 말한다. ※ 게티즈버그 전투 : 미국 남북의 분열을 막아, 미국이 세계 최강국으로 발돋움하는데 중요한 발판이 된 것으로 평가 받음. 당대의 웅변가로 통하던

에드워드 에버렛이 2시간에 걸쳐 청중에게 다가선 이후, 연단에 오른 링컨의 연설이 주목받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링컨은 "지금으로부터 87년전 우리

의 선조들은 새로운 나라를 세웠고 ~"로 시작된 연설은 간결하고도 감동적인 어조의 연설로 청중의 마음을 흔들기 시작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Of the peopl

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정부는 이 세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로 끝맺은 링컨의 연설은 훗날, 명연설의 고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의 미래를 건 카이로회담 개최

내용시작미국, 영국, 중국의 수장들이 모인 1943년 11월 22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조선의 미래를 좌우할 논의가 진행될 회담이 개막됐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장제스 중국 국민당 총통 등 연합군 3국 수뇌부가 모여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처리 방법을 다루는 자리였다. 연합군의 공적(公敵)인 일본에 대한 처리도 의제에 들어가 있는 만큼 이 자리에서 조선 독립이 논의되는 것이

당연한 듯 보일 수 있으나 실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시점은 1938년으로, 조선이 일본의 영토로 편입된 1910년에서 28년여가 지난 때였다. 카이로 회담을 마련한 연합국의 목표는 2차 대전 이전으로 세계를 되돌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연합국 측에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이해시킨다는 것은 어려웠으며, 영국이나 미 국은 애초 한국을 신탁통치를 하고자 했다. 한국의 독립 문제를 집중

조선의 미래를 건 카이로회담 개최생



적으로 이슈화한 인물은 중국의 장제스 총통이었다. 그는 후반부로 예정된 한국 관련 논의를 앞당겼고 한국의 독립 보장 약속을 선언에 포함시키자고 기습적으로 제안했다. 한국 독립에 냉담했던 영국과 미국이었지만 아직 건재한 태평양 전선의 일본을 상대하려면 중국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결국 11월 27일 발표된 카이로선언에는 "한국민이 노예 상태에 놓여 있음을 유

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할 것을 결의한다"는 특별조항이 삽입되어 대한민국의 독립에 대한 국제적 보장을 확인받을 수 있었다. 최근 발굴된 중국 자료 ‘총재접견한국영수회담기요(總裁接見韓國領袖會談紀要)’에 따르면, 카이로 회담을 앞두고 1943년 7월 26일 장제스는 김구의 요청에 응해 김구 김원봉 등 6명과 비밀리에 만나 종전 후 한국의 완전독립을 쟁

취할 수 있도록 중국 측에 지지와 지원을 요청했다.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를 ‘빚’으로 생각해 온 장제스가 "중국 측은 힘써 싸우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 문서의 요지로 전해진다. 윤봉길은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들 계십시오"라고 결의한 바 있다.

문화
제1차 유네스코 총회 개회(프랑스 파리)

내용시작 유네스코라 불리는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는 세계 각국의 교육 및 과학, 문화의 보급 및 교류를 통해 국가간의 이해를 돈독히 하고 협력관계를 촉진함으로써 국제평화와 안전을 확보함을 목적으로 1946년 11월 4일 유네스코 헌장 발효와 함께 정식으로 발족했으며, 15일 뒤인 11월 19일 제1차 유네스코 총회가 개최되었다. 유네스코 헌장은 1945년 11월 16일 영국과 프랑스가 주축이 되어 런던에 소집된 44개 연합국 교육문화회의에서 채 택됐다. 이는 1942년10월 유럽 여러 나라의 문교장관들이 런던에서

문교장관회의를 열고 전쟁으로 파괴된 교육시설 및 문화재를 복구하기 위한 국제기구의 설립을 촉구하는 결의를 하자, 미국이 이에 동조하여 1944년 국제기구안이 제시됨으로써 설립이 구체화된 것이다. 대중교육과 문화보급, 지식의 유지·증대 및 전파, 세계유산의 보호를 주요활동으로 하는 유네스코는 192개국이 가입하여 활동중이며, 1950년 가입한 한국은 종묘, 불국사 석굴암, 팔만대장경, 창덕궁과 수원화성, 강화군·화순군·고창군의 고인돌과 경주유적이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제1차 유네스코 총회 개회(프랑스 파리)

한국 아동문학의 산증인, 아동문학가 이원수

내용시작외아들로 태어난 이원수(李元壽, 1911.11.17~1981.1.24)선생은 1927년 마산공립보통학교, 1930년 마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함안금융조합에 다니다가 당시 전라남도 광주에서 학생들이 조직한 항일학생 비밀결사조직인 독서회사건으로 검거되어 1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1945년 10월 경기공업학교 교사를 거쳐 박문출판사 편집국장, 소년세계 주간, 한국아동문학회 부회장, 서울특별시 문화위원회 문학분과위원 등을 지냈다. 1926년 소파 방정환 선생이 펴낸 ‘어린이’ 대표작 ‘고향의 봄’으로 당

선되어 등단하였으며 훗날 홍난파선생이 곡을 붙여 우리나라 대표적인 동요로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기존의 동요 형식에서 벗어나 현실참여적인 동시를 썼던 이원수선생은 해방 후 동시보다 동화를 많이 썼으며 방송용 아동극이나 아동문학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글도 다수 남겼다. 1970년 고마우신 선생님상, 1973년 한국문학상, 1974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78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80년 대한민국 문학상 등을 받았다.

한국 아동문학의 산증인, 아동문학가 이원수

민원형사 ‘딕 트레이시’를 저술한 미국만화가 굴드

내용시작탐정활동을 그린 “딕 트레이시, Dick Tracy”는 '형사와 도둑'이라는 주제를 다룬 연재물 가운데 처음으로 대중의 인기를 얻은 작품으로 기록된다. 통신교육으로 만화를 공부한 미국의 만화가 굴드(Chester Gould, 1900.11.20~1985.5.11)는 오클라호마에서 잠시 스포츠 만화를 그리다가 ‘시카고 데일리 뉴스’에서 일했다. '딕 트레이시'는 시카고 트리뷴 뉴욕통신회사가 1931년 처음으로 배급했는데, 이 만

화에 깔려 있는 '범죄는 나쁘다'는 기준과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철저히 법대로 해야 한다는 주장은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다. 강한 윤곽과 밝은 색깔을 사용했고, 범죄와 범죄수사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정확하게 다루었다. 툭 튀어나온 강한 턱을 가진 말쑥한 사복형사 딕 트레이시는 셜록 홈스를 연상시키는 수사방법을 동원하여 우스꽝스럽게 그려진 범죄자들에게 벌을 주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민원형사 ‘딕 트레이시’를 저술한 미국만화가 굴드

금주의 노벨상

[노벨문학상] 현대소설에 자극을 준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지드

[노벨문학상] 현대소설에 자극을 준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지드 내용시작 1869년 11월 22일 파리에서 출생한 앙드레지드(Andre-Paul-Guillaume Gide, 1869.11.22~1951.2.19)는 어린시절 병약하고 학업습득도 불규칙하여 지능발달도 늦은 편이었으나, 18세경부터 문학에 대한 열정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신프랑스 평론”지(誌) 주간의 한 사람으로서 프랑스 문단에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어 20세기 문학의 진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사전꾼들”, “좁은문” 등의 작품 발표를 통해 현대소설에 자극을 줬다. 한편 평론가로서의 지드의 활동도 의의가 깊다. 유명한 “도스토옙스키론”을 비롯한 여러 논문에서 외국문학을 새로운 각도에서 소개·해석하였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문학에 관한 비평에서도 종래의 견해를 뒤엎는 형안(炯眼)의 소유자였다. 문학의 감성과 지성을 다각적으로 재검토하고 갱신한 그의 공적을 높이사 194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노벨생리.의학상] 영국의 생리학자 헉슬리

[노벨생리.의학상] 영국의 생리학자 헉슬리 내용시작1963년 앨런 호지킨, 존 커루 에클스와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한 영국의 헉슬리(Andrew Fielding Huxley, 1917.11.22~ )는 주로 신경과 근육섬유를 연구 하였다. 생물학자 T. H. 헉슬리의 손자이며 전기작가이자 문학자였던 레너드 헉슬리의 아들이었던 헉슬리는 1963년 호지킨 등과 함께 말초신경섬유의 흥분과 이 흥분의 전도에서 나타나는 기본적인 현상들을 생리화학적으로 분석, 연구하여 ‘신경세포막의 말초 및 중심부의 흥분과 억제에서 나타나는 이온기구에 관한 발견’으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노벨상 수상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연구 외에 헉슬리는 근섬유의 수축과정에 대한 지식에도 매우 중요한 공헌을 했다.

온라인미술관
20세기 미술의 거장,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트
20세기 미술의 거장,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트

20세기 미술의 거장,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트

내용시작기발한 발상, 관습적 사고의 거부, 신비하고 환상적인 분위기, 시적인 조형성 등의 글귀는 ‘초현실주의자’로서의 마그리트(Rene Magritte, 1898.11.21~1967.8.15)를 대변한다. 벨기에 레신 출생인 마그리트의 작품은 철저한 계산에 의해 만들어진 논리적이며 철학적인 근거를 가진다. 실제로 철학에 조예가 깊었고, 화가라는 이름 대신 '생각하는 사람'으로 불리길 원했던 마그리트는 철학자처럼 끊임없이 존재와 세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그림을 통해 시각적으로 재현하고자 했던 작가였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단순히 보는 그림이 아니라 생각하는 그림, 상식을 뒤엎는 창의적인 사고를 자극하며 우리가 속해있는 세계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하는 철학적인 그림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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