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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여행

인물과 역사를 바로 알고 현재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 봄으로써 선조들의 지혜를 알아 봅시다.

지난 시간여행
제목 시간여행 제140호
등록일 2009. 11. 6.
첨부파일 첨부파일없음

국내 최대 사장교, 서해대교 개통 상세정보보기

이주의 이벤트와 시간여행 구독, 추천하기 시간여행 구독하기 있다. 개통과 함께 동북아 시대를 이끌어 갈 서해교역의 관문으로 꼽히며, 주탑 높이가 182m, 주탑 사이의 간격이 470m에 달해 이 다리 밑으로 5만 톤 급의 선박이 왕래할 수 있다. 총 연장 7.31km 중 사장교 구간은 990m이며 폭이 31.41m이다. 우정사업본부는 2006년 9월 26일 “한국의 다리 시리즈 - 세 번째 묶

내용시작사장교란 주탑에서 늘어뜨린 케이블에 의해 지지 되는 교량으로, 교각 사이의 간격이 큰 경우에 주로 사용되며 외관이 아름다운 것이 특징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사장교로 올림픽대교, 서해대교, 진도대

교, 창선·삼천포대교 등이 있다. 그 중 서해대교가 2000년 11월 10일 국내 최대 사장교로서 개통되었다.서해대교는 당간지주의 형상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서해대교는 경기도 평택시와 충남 당진군을 잇고

음”을 통해 서해대교를 우표로 담아 낸 바 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내정자 미국 뉴욕 입성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내정자 미국 뉴욕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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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낳은 ‘세계 최고 외교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내정자가 15일(현지시각) 오전 유엔본부가 있는 미국 뉴욕에 입성했다. 그는 다음달 14일 유엔총회장에서 코피 아난 총장의 퇴임사에 이어 취임선서를 하고 5년 의 임기 활동 중이다. 그는 5년이나 10년 뒤 총장에서 물러날 때까지 “완전히 신망받는 유엔을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힌 뒤,

“스스로 먼저 모범을 보일 것”이라고 다짐했다.

사회
경복궁 경회루 40여년 만에 개방

내용시작문화재청은 문화유산의 국민 접근성을 높여 활용을 극대화하고 관람객에 대한 서비스를 향상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경복궁 경회루를 2004년 11월 13일부터 11월 30일까지 일반인에게 시범적으로 제한 개방했다. 이는 2005년 본격적인 개방에 앞서 공개로 인한 문제점을 파악하고 여론을 수렴,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하루 세 차례(오전 10시, 오후 1시 30분, 오후 4시)에 걸쳐 1회당 60명을 선정, 입장시킨 것. 관람대상자 선정은 경복궁 입장객 가운데 경복궁 현장에서 경회루 관람 희망자를 대상으로 선착순으로 모집하고, 안내원 및 안전요원의 인솔아래 관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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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야생 반달가슴곰 발견

지리산 야생 반달가슴곰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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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시작2002년 11월, 지리산 야생 반달곰이 발견됨으로써 그간 추측만 무성했던 야생 반달가슴곰의 실체가 카메라에 포착됐다. 지리산에서 수는 적으나 반달가슴곰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공식 확인된 것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지리산 일대에서 5개월간 야생 반달가슴곰의 서식실태를 추적한 끝에 지난달 말 무인카메라로 그 실체를 촬영하는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이로써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안정적인 야생 반달가슴곰의 서식지 확보를 위해 지리산 일대 출입통제 및 밀렵 감시체제를 더욱 강화하고, 반달가슴곰 종 복원사업을 통해 근친교배에 의한 자연적인 도태를 예방하고 개체수를 유지하기 노력하고 있다.

아동문학 보급 및 아동보호운동의 선구자, 소파 방정환

내용시작어린이 인권운동의 선구자이자 실천가였던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 1899.11.9~1931.7.23)은 보성전문(普成專門)을 마친 후 도요[東洋]대학에서 철학과에 입학하여 아동문학 및 아동심리학을 수학하

였다. 일생을 어린이 인권신장에 힘쓴 방정환은 1917년 유광렬(柳光烈), 이중각(李重珏) 등과 청년운동조직체인 청년구락부를 조직해 기관지 '신청년'을 펴냈으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등사판 '독

아동문학 보급 및 아동보호운동의 선구자, 소파 방정환

립선언문'을 인쇄해서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주일 간 구치소에 갇혀 지내기도 하였다. 1921년 5월 1일 김기전(金起田), 이정호(李定浩) 등과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한 방정환은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사랑하며 도와갑시다"라는 표어 아래 본격적인 소년운동을 전개하며, 1922년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한 방정환은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사랑하며 도와갑시다"

라는 표어 아래 본격적인 소년운동을 전개하며, 1922년 천도교 소년회 중심으로 5월 1일을 ' 어린이날'로 선포하고, '사랑의 선물'이라는 책을 펴냈다. 또한 방정환은 1923년 3월 20일 국내최초로 순수 아동잡지인 '어린이'를 창간했고, 그해 5월 1일 도쿄에서 손진태(孫晉泰), 윤극영(尹克榮), 진장섭(秦長燮) 등과 아동문화운동단체 색동회를 조직했다. 1957년부터 새싹회에서 그의 아동문 화운동과 아동문학

의 업적을 기리는 '소파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있으며, 1978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고, 1980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 색동회 : 어린이 문화운동과 인권운동을 전개한 한국 최초의 어린이문화운동단체로 1923년 5월 설립
※ 새싹회 : 한국아동문학의 발전과 복리증진을 목적으로 창립된 아동문화단체로 1956년 1월 설립

소방의 날 제정

소방의 날 제정

소방(消防)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지나치는 소방차를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화재신고=119라는 생각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싶다. 소방의 날은 화재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소방 의식을 높이고자 정한 날로서 1963년부터 실시하고 있다.(시행 당시의 소방의 날은 11월 1일 이었음) 우리나라의 소방은 1392년 조선 초기에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를 설치한 것이 시초이며, 1963년부터는 내무부가 주관하여 전국적인 규모로 “소방의 날” 행사를 거행하여 오다가 1991년소방법을 개정하면서 119를 상징하는 11월 9일

을 소방의 날로 제정하여 법정일로 정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행사의 명칭이 통일되지 못하였고 周年(주년)표기를 하지 않았는데, 1962년까지의 행사를 하나로 묶고 지역단위행사에서 전국적 행사로 전환된 1963년을 제 1주년으로 환산하여 1991년부터 행사명칭을 통일하게 되었다. 애초에 소방의 날은 전 소방인과 범국민적인 기념일로 시행된 것은 아니고 월동기간중의 대 국민 불조심 계몽행사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바야흐로 월동(越冬)의 계절이 돌아오고 있다. “자나깨나 불조심, 꺼진불도 다시보자!”라는 표어가 생각나는 요즈음이다.

정치
“적어도 동포끼리는 .... ” - 도산 안창호

내용시작도덕적 실력양성과 교육에 중점을 두고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1878.11.9~1938.3.10). 그는 독립협회(獨立協會), 한인공동협회(韓人共同協會), 신민회(新民會),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흥사단(興士團) 등에서 활발한 독립운동활동을 하였다. 도산 안창호의 기본사상은 자주독

립을 이룩하려면 넓은 의미의 교 육, 즉 국민운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을 기본으로 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으며, 200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프리웨이에 한국인의 이름을 딴 거리명이 처음으로 생긴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가 생겼다. 또한 2004년에는 로스앤젤레스

“적어도 동포끼리는 .... ” - 도산 안창호



에 '안창호 우체국'이 생겼다. 국내에는 그의 애국정신과 교육정신을 기리고자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소재에 '도산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가 활동한 독립운동 조직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① 독립협회(獨立協會) : 평양 쾌재정 연설회 및 만민공동회 연설을 통한 독립운동의 중요성 강조 ② 한인공동협회(韓人共同協會) : 190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한 항일

독립운동단체로 '신한국보(新韓國報)'를 발행하여 언론에 의한 국민계몽과 항일투쟁 전개 ③ 신민회(新民會) : 1907년에 국내에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 조직으로 민중계몽과 국권회복, 국민 실력양성에 힘씀 ④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 1909년 안창호(安昌浩)의 발의로 조직된 청년단체로 민족독립을 위한 청년교육에 힘썼으며, 그의 주요 사상인 민족개조론의 유행을 초

래하는 계기 마련 ⑤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 1909년 미국에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로 을사조약 폐기운동, 합병 반대운동, 파리평화회의 대표 파견을 주요 골자로 투쟁 ⑥ 흥사단(興士團) : 1913년 5월 도산 안창호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한 민족운동단체로 자력주의, 양력주의, 대력주의를 주창함

면죄부(免罪符) 판매 VS 95개조 논제

면죄부(免罪符) 판매 VS 95개조 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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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시작1517년 10월 31일 마틴루터(Martin Luther, 1483.11.10~1546.2.18)는 면죄부(免罪符) 판매에 항의하며 비텐베르크성(城) 교회 정문에 95개조의 의견서를 내붙임으로써 종교개혁의 발단을 초래하였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계율에 따라 수도생활을 하며 1507년 사제(司祭)가 되었고, 오컴주의 신학교육을 받아 수도회와 대학에서 중책을 맡았으며, 1512년 신학박사

가 되고 1513년부터 성서학 강의를 하였다. 95개조 논제를 제시한 것이 성서학 강의에 전념하던 즈음 이었다. 이 사건으로 루터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칙령(破門勅令)을 받았으나 불태워 버린 것으로 알려진다. 그 이후 신성로마제국 의회에 환문되어 그의 주장을 취소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이를 거부, 제국에서 추방되는 처분을 받고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독일어 통

일에 크게 공헌하였다. 새로운 교회형성에 힘쓴 루터는 '루터파 교회'를 성립하는데 성공하였고, 성서강의/설교/저작/성서번역 등에 헌신함으로써 종교개혁 운동을 추진하며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신학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철저한 은혜와 사랑에 두고, 인간은 이에 신앙으로써 응답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하느님께 반항하고 자기를 추구하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 아 죄를 용서받고 ‘자유로운 군주’이면서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며, 신앙의 응답을 통하여 자유로운 봉사, 이 세계와의 관계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은 르네상스(중세와 근대 사이에 서유럽 문명사에 나타난 문화운동)와 함께 근세로의 전환점이 되었다.

한국해군 모체 해방병단 창설 /해군창설기념일

한국해군 모체 해방병단 창설 /해군창설기념일

내용시작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자 대한민국 해군 창설자인 손원일 제독은 조국의 해양수호에 관심이 많은 선각자 30여명과 함께 1945년 8월 21일 해사대(海事隊)를 결성하였으며, 11월 11일에 서울 안국동 표훈전에서 “해방병단”을 창단하여 1946년 1월 18일 미 군정청의 정식 군사단체로 인정받았다. 이로 인해 해방병단은 해군의 모체가 되었으며, 11월 11일을 현재까지 해

군 창설일로 기념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휴전협정 조인 -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제1차 세계대전 휴전협정 조인 - 제1차 세계대전 종전

내용시작1918년 11월 11일 동맹국과 연합국으로 대립한 제1차 세계대전의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4년간 계속되어온 전쟁이 막을 내렸다. 1914년 6월 28일 남부 슬라브족의 '해방'을 위해 사라예보를 순방 중이던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세르비아 청년에게 암살당함으로써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간의 갈등이 폭발했다. 이 사건은 각국의 이해와 맞물려 제1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연합국은 500만 명의 전사자를 포함해 2,20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으며, 동맹국은 330만 명의 전사자를

포함해 1,50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전쟁 중 굶주림이나 질병, 또는 대량 학살 등으로 많은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는데 군인 전사자보다 많은 1,300만 명가량으로 추정된다. 이 전쟁에서 동맹국측인 터키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이 차례로 몰락했고, 독일은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평화협정에 합의했다. 이로써 제1차 세계대전은 프랑스·영국·러시아·이탈리아·일본·미국이 주도한 연합국측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무리한 참전은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는 결과를 낳았고, 유럽의 불안정은 제2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되었다.

미국의 군인, 장군 패튼(Patton, George Smith, 1885~1945) 출생

내용시작캘리포니아주 산가브리엘 출생. 1909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1917년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 초창기 전차부대 편제를 구성하는 임무를 맡아 공을 세웠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뒤 1942년 북아프리카 상륙작전에 참가하였고, 1943년에는 미군 제7군사령관으로 시칠리아섬 전역을 신속히 장악하는 전공을 세웠다. 1944년 여름 노르망디상륙작전에서는 전통적인 작전법을 무시한 전격적 공격으로 프랑

미국의 군인, 장군 패튼(Patton, George Smith, 1885~1945) 출생

스 중부 전역을 제압하였으며 그해 12월에는 불주대전투에서 바스토뉴를 방어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45년 3월 독일로 진격, 라인강을 돌파하는 데 성공한 뒤 4월 말에는 독일 남부, 체코슬로바키아

서부, 오스트리아 서부를 차례로 점령하는 성과를 올렸다. 독일이 항복한 뒤 바이에른지방 군정장관에 임명되었으나 전후 연합군의 비(非)나치스화 정책을 비판하여 군정장관 및 제3군사령관 직위를 박

탈당하였다. 용맹하고 저돌적인 지휘자로 평가받은 반면, 병사 구타와 같은 실수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저서로 “내가 알고 있었던 전쟁(1947)”이 있다.

문화
프로레슬링 선수 역도산

내용시작 타고난 장골로서 거한이었던 역도산은 소년시절 씨름선수로 활약하며 14세 때 조선일보 주최 전국씨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39년 일본 스모계를 제패하는 꿈을 안고 일본에 건너가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하고 1949년 25세 때 세키와키[關脇]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나 슬럼프에 빠져 오래가지 못하고 1940년부터 역도산이라는 별명으로 프로 레슬링으로 전향하였다. 프로 레슬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프로레슬링 선수 역도산

시작한 역도산은 1957년 인터내셔널 챔피언에 오르는 등 세계적인 프로 레슬링 선수로 활약하며 강인한 체력과 가라데촙으로 강적들을 제압, 제2차 세계대전의 패망으로 실의에 빠진 일본인들에게서 정의의 상징', '불사신의 영웅'으로 불

리며 국민영웅으로 떠올랐다. 세계 프로레슬링계를 제패 하여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막대한 재산을 모아 일본 굴지의 부호가 된 역도산은 비록 일본인으로 귀화 하였으나 항상 자신의 조국을 생각하며 한국인으로서의 뿌리를 잊지 않았

다. 한국 민요를 즐겨 불렀던 역도산은 자 신의 조국으로 귀국, 한국의 체육발전을 위하여 서울에 스포츠센터의 건립을 약속하였으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도쿄[東京]의 나이트클럽에서 폭력배에게 피습되어 복막염으로 사망하였다.

미국 영화배우, 모나코왕비 그레이스켈리

내용시작미국의 영화배우이자 모나코의 왕비인 그레이스 켈리는 미국 필라델피아의 부유한 명문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사립학교를 거쳐 1947년 뉴욕 예술 아카데미에서 연기수업을 받았다. 브로드웨이의 연기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14시간 (Fourteen Hours, 1951)’ 은막에 데뷔해 ‘하이 눈 (High Noon, 1952)’ , ‘모감보 (Mogambo, 1953)’에서 게리쿠퍼와 클라크 게이블의 상대역으로 열연하였다. 탁월한 개성과 연기로 많은 인기를 모았던 그녀는 ‘시골 소녀 (The Country Girl, 1954)’등에서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주

미국 영화배우, 모나코왕비 그레이스켈리

었다. 1956년 모나코 왕 레니에 3세와 결혼한 그녀는 은막에서 은퇴하였으나 여전히 세인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스타로서 자리 잡고 있었다. 은막의 스타에서 한가정의

아내와 엄마로서 때로는 인자한 왕비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며 모든 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그녀는1982년 9월 모나코 근교의 여름별장에서 왕궁으로 돌아오

던 중 교통사고로 인하여 많은 이들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화려한 생을 마감하였다.

과학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저자 영국소설가 스티븐슨

내용시작보물섬, 지킬 박사와 하이드...제목만으로도 너무나 유명한 두 소설은 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스티븐슨에 의해 쓰여졌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가업을 잇기 위해 공과대학에 들어갔으나 그의 천부적인 문필가 기질은 그를 법률가로서 전향하게 하였다. 폐결핵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변호사 일을 그만둔 스티븐슨은 여행을 하며 본격적인 집필활동을 시작하였다. 유럽의 여러 지방을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저자 영국소설가 스티븐슨

여행하며 잡지에 글을 기고하였던 그는 집으로 돌아와 최초의 단편집을 출간 하였고 1883년 드디어 그의 출세작 보물섬을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보물섬으로 인해 완벽한

이야기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힌 그는 지킬박사와 하이드(1886), 발란트래경(1889)등 소설의 근원적 속성에다 새 생명을 불어넣은 작가로서 동시대 최고의 소설가이자 수필

가로서 평가받고 있다.

 “말괄량이 삐삐”를 아시나요? 스웨덴의 동화작가 린드그렌

내용시작어렸을 때 TV에서 속칭 삐삐머리를 한 노랑머리의 말괄량이를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말괄량이 삐삐’라는 제목의 이 스웨덴 어린이 TV판 드라마는 동명의 소설 ‘말괄량이 삐삐’를 원작으로 한 것이다. 스웨덴의 여류 동화작가인 린드그랜이 1945년 주인공 삐삐를 중심으로 작품으로 발표한 이 소설은, 많은 재산과 엄청난 힘을 가지고 말과 원숭이를 데리고 혼자 사는 이상한 옷차림의 소녀를 주인

공으로 삼아 모든 아이들이 꿈꾸는 소망들에 대하여 통쾌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자녀들과 합작으로 쓴 이 소설로 일약 유명 동화가로서 등장하게 되었던 린드그랜은 이후 1950년 단편집 ‘꼬마 닐스 칼손(1949)’으로 제1회 닐스 호르겔손상(賞)을 수상, 1957년에는 ‘라스무스와 나그네 (1956)’로 국제 안데르센상 대상(大賞)을 수상하며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200여 편의 작품들을 남겼다.

“말괄량이 삐삐”를 아시나요? 스웨덴의 동화작가 린드그렌

 영국의 판화가 호가스 출생

내용시작금은세공사에게서 판화와 삽화기술을 습득한 영국의 화가이자 판화가인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11.10~1764.10.26)는 당시의 거장 손힐의 딸과 결혼하고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 초상화 제작에 몰두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그 후 일련의 설화화(說話畵)를 제작한 뒤 이것을 원화로 한 판화를 간행하는 시도를 하였으며 작품으로 “매춘부의 편력(1732)”, “서서크의 시장(1733)”, “당대 결혼풍속(1745)” 등 을 남겼다. 이 작품들은 날카로운 사회관찰을 바탕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풍자한 것인데, 변화가 풍부한 주제의 전개와 생생한 표현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미학적

저서 “미의 분석(1753)”을 통해 우아한 곡선에 최고의 미적 가치를 인정하는 이론을 제창하였다. 영국 태생의 미술가로서는 처음으로 국제적인 찬사를 받았으며, 재정적인 어려움에 부딪혀 그가 추구하였던 역사화가 겸 초상화가의 명성을 뒤로한 채 판화가로서의 인기를 얻었다. 낭만주의 문학에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알려진다.

영국의 판화가 호가스 출생

 미국의 기술자, 풀턴

내용시작어려서부터 기계학과 수학에 흥미를 가졌던 풀턴은 1786년 런던으로 건너가 운하공학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림을 그리기를 즐겼던 그였지만 화가로서의 별다른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그 열정을 공학 쪽으로 돌렸다. 브리지워터 공작, 스터냅 백작 등을 알게 되어, 운하와 선박을 개량하는 문제에 대한 많은 연구를 하였으며 내륙수로를 운항하는 선박에 대한 연

미국의 기술자, 풀턴

구로 큰 성과를 보았다. 풀턴이 자신의 연구 성과를 파리~디에프 간 운하에 적용하기 위하여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당시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로 있었던 리빙스턴의 관심을 받아 많은 원조를 받았으며 이 인연은 이후 풀턴이 미국에서 성공하는 밑거름으로 작용하였다. 1806

년 미국으로 돌아온 풀턴은 리빙스턴과 계획했던 증기선의 건조를 추진하였고 그의 획기적인 증기선은 당시 뉴욕에서 올버니까지 4일이 소요되는 항해를 단 32시간으로 단축시켜 놓음으로써 물류의 혁신을 가져왔다. 풀턴은 자신이 만든 기선을 이용하여 세계 최초로 기선에

의한 정기항로를 개설하였으며 끊임없는 연구와 개선으로 동시대 미국 내륙운송시장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얻음으로써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선구자로서 평가받고 있다.

 안창남, 한국 비행사 최초로 저공 비행에 성공

내용시작안창남은 도꾜-오사카 간의 우편 비행 경기에서 일본인들을 물리치고 우승, 당시 자전거 경주에서 일본인을 누르고 우승한 엄복동과 함께 일제 시대 우리 민족의 우상이 되었다. "하늘에는 안창남, 땅에는 엄복동"이 당시 유행어였다. 한국 최초의 비행사인 안창남이 1921년 11월 13일 첫 저공 비행에 성공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뛰어난 비행 실력으로 민족의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중국의 혁명 전선에 참여, 비행하던 중 1930년 추락사했다.

안창남, 한국 비행사 최초로 저공 비행에 성공

금주의 노벨상

[노벨물리학상 수상]영국의 물리학자 레일리

[노벨물리학상 수상]영국의 물리학자 레일리에 내용시작 영국 에식스의 맬던에서 출생한 레일리는 유년기 건강문제로 학업을 지속하기 어려워 집에서 가정교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1861년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한 그는 1865년 수학 우등졸업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며 졸업하였다. 일찍이 물리과학에 관심을 보였던 그는 1871년 색에 대한 연구(레일리산란의 법칙 도출)로부터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광학분야를 시작으로 이후 음향학, 파동론, 전기역학, 유체역학 등 물리학 거의 전반에 걸쳐 연구하였다. 1870년 음향학에 대한 연구의 시초가 된 논문 ‘공명(共鳴)의 이론에 대하여’를 발표 하였고 1871년부터 77년까지 음에 관한 중요한 이론서(음의 이론, Theory of Sound)를 집필하였다. 1879년 맥스웰의 후임으로 캐번디시연구소장을 거쳐 1905∼1908년 왕립학회장, 1908년 케임브리지대학 명예총장이 되었다. 1894년 물의 성분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문제에 대한 실험에서 질소의 질량을 측정하는 과정 중 W.램지와 함께 대기 중의 비활성 기체인 아르곤(Ar)을 성공적으로 분리해 낸 공로로 1904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노벨생리.의학상 수상]덴마크 생리학자 크로그

[노벨문학상] 프랑스 소설가겸 극작가 카뮈 내용시작덴마크의 생리학자인 크로그는 주로 기체의 압력에 관한 연구에 관심을 나타내어 수중에서 동물의 생리에 관한 기압을 연구하였다. 1902년 그린란드 원정대에 참가하여 북극의 동물들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조직으로의 산소 공급을 조절하는 순환 메커니즘에 관한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였다. 1903년 동물의 물질대사에서 질소의 역할에 관한 연구로 빈 학사원상을 받은 크로그는 1920년 조직이 혈액을 요구하는 정도에 따라 모세혈관이 수축되거나 확장된다는 가느다란 모세혈관의 운동 조절 메커니즘을 발견하였고 이공로를 인정받아 1920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았다.

온라인미술관
프랑스의 조각가 로댕
프랑스의 조각가 로댕

프랑스의 조각가 로댕

내용시작오늘날 로댕은 근대조각의 시조로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현대의 미켈란젤로이자 조각의 거장 또는 비범한 천재성의 화신으로 오랫동안 추앙받아왔으며 그의 유별난 여성 편력조차도 뛰어난 재능의 상징으로서 용납되었다. 14살 때 국립공예실기학교에 입학, 조각가로서의 기초를 공부한 로댕은 궁핍한 청년시절을 보내며 어렵게 미술공부를 하였다. 1864년 처음 살롱에 출품하였으나 그의 뛰어난 사실적인 묘사덕분에 오히려 많은 거부감을 주어 낙선하고 만다. 1870년 보불전쟁에 전쟁에 참전 후 제대하여 벨기에의 브뤼셀에 머물며 건축장식업에 종사하였다. 조각가로서의 그의 미술적 영감과 예술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1875년부터의 이탈리아 여행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나 중세 프랑스 조각으로부터 많은 자극과 감화를 받았으며 이를 더욱 연구 발전시켜 완벽한 자신만의 내면적인 깊이가 가미된 생명력 넘치는 작품들을 창조 하였다. 1878년 파리로 돌아온 그는 로댕예술의 출발점이며, 그의 사실적 표현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걸작 ‘청동시대(靑銅時代)’를 출품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로댕은 ‘지옥의 문(1880∼1900)’, ‘생각하는 사람’ ‘아담과 이브’, ‘발자크상(1898)’ 등 수많은 사실적 작품들을 남기며 다채롭고 정력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가 추구한 웅대한 예술성과 기량은 동시대까지 건축의 장식물에 지나지 않던 조각에 생명과 감정을 불어넣었으며, 예술의 자율성을 부여하며 후대의 조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회화의 인상파와 더불어 근대조각의 전개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로댕은 서양 조각의 근본적인 힘이 되어온 인체에 대한 지식과 그 풍부한 묘사를 되살려 놓은 위대한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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