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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여행

인물과 역사를 바로 알고 현재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 봄으로써 선조들의 지혜를 알아 봅시다.

지난 시간여행
제목 시간여행 제137호
등록일 2009. 10. 14.
첨부파일 첨부파일없음

성수대교 붕괴 상세정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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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시작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가 붕괴됐다. 출근길 차량들로 붐비는 아침 7시40분쯤, 성수대교 북단 5번째와 6번째 교각 사이 상판 50여m가 "꽝" 소리와 함께 북쪽 상판 이음새가 먼저 끊어지고 이어 남쪽 상판이 떨어져 나갔다. 버스와 승용차 6대가 상판과 함께 강물로 추락하고 북쪽으로 달리던 시내버스는 끊긴 다리 끝부분에 뒷바퀴가

걸리면서 한바퀴 빙글 돌아 떨어졌다. 사고현장은 비바람 속에 휴지처럼 구겨진 추락차량과 피투성이가 된 희생자들로 뒤범벅돼 있었고 바닥과 천장이 닿을 정도로 찌그러진 버스에서 학생들의 책가방, 안경, 볼펜, 도시락들이 비죽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이날 사고로 무학여중고생 9명을 포함, 모두 32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했다. 성수대

교 참사는 단순히 콘크리트 건조물 하나가 무너진 붕괴사고가 아니었다. 다리와 함께 온 국민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고, 나라가 함께 무너져 내렸으며 한국적 성장신화의 부끄러운 이면을 드러내는 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1997년 7월 3일, 32명의 귀중한 인명을 앗아갔던 성수대교가 붕괴 2년8개월 만에 재개통됐다.

사회
국제연합일(United Nations Day)

내용시작1945년 10월 24일,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유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국제협력을 증진하기 위한 목적으로 국제연합(國際聯合, United Nations)이 창설되었다. 국제연합은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구)소련과 여타 서명국 과반수가 국제연합헌장을 비준한 1945년 10월 24일 공식 출범하였으며, 이후 매년 10월 24일을 국제연합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본부는 미국 뉴욕시(市)에 있다. 국제연합일은 약칭으로 'UN-Day(유엔 데이)'라고 일컬어지며, 한국은 6·25전쟁 때 국제연합군이 참전한

국제연합(UN)의 날 상세정보보기

것을 기리는 뜻도 가진다. 1973년 3월 30일 대통령령(각종 기념일 등 에 관한 규정)으로 그날을 국제연합일로 정하였다. 국제연합의 주요

활동으로 평화유지활동, 군비축소활동, 국제협력활동으로 나눌 수 있으며, 주요기구와 전문기구, 보조기구로 구성되어 있다.

2007년 1월에는 한국인 최초로 반기문(潘基文, 1944.6.13~) 국제연합 사무총장이 취임하여 역임 중이다.

한강, 유람선 운항개시

내용시작한강유람선이 1986년 10월 25일 운항을 개시했다. 이날 오전 9시 서울 여의도 선착장과 잠실 선착장에서 (주)원광소속 새한강 1호와 새한강 2호가 뱃고동을 길게 울리면

서 출항, 한강유람선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양쪽 선착장에는 유람선 취항을 구경하려는 시민, 유람선운영회사인 (주)원광과 (주)세모측 직원 등이 모여 박수로 축하했

다. 첫 출항한 새한강 1호는 승객이 28명, 새한강 2호는 3명에 불과했으나, 오후2시 여의도선착장을 출발한 무궁화호에는 370명이 탑승했고, 일본인, 미국인 등 외국인도

한강종합개발준공기념 상세정보보기

눈에 띄었다. 여의도~잠실간을 운항하는 1시간30분동안 승객들은 대부분 "말끔히 정돈된 한강이 참으로 시원하다"고 입을 모았으나 일부 승객들은 "볼만한 것이 빈약하다", "속도가 너무 느려 지루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유람선에 이어 2007년 10월 11일부터는 "복잡한 도심 한가운데 있는 자연 생태의 보고, 한강을 만끽하는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슬로건을 내세운 한강 수상관광 콜택시가 선보여 운행 중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번 축구선수, 펠레

내용시작브라질의 축구선수로 17세 때 월드컵에 출전한 이후, 월드컵 사상 최초의 3연승을 이루고 브라질 국민의 영웅이 된 펠레(Pele, 1940.10.23 ~ )의 본명은 에드손 아란테스 도 나스시멘토(Edson Arantes do Nasscimento)이다. '펠레'라는 애칭은 그가 어렸을 때 헌 양말을 뭉쳐서 만든 공으로 축구놀이를 곧잘 하였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는 1958, 1962, 1970년 3차례에 걸쳐 브라질 대표 팀을 월드컵 우승팀으로 이끌어 냄으로써 브라질은 우승컵인 쥘리메트로피를 영구히 소장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축구의 신(神)' 혹은 '인간국보', '페롤라네그라(검은 진주)'라 불리며 브라질 국민의 인기를 독점 하였다. 그는 '축구 경기는 한 골 차이의 승부가 가장 재미 있고, 그 중에서도 3 대 2 스코어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해 펠레스코어(Pele score)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기도 하였으며, 1958년 스웨덴 월드컵 출전 당시 등번호를 10번을 달고 경기에 임하여 승리를 이끌어 내며 “펠레 넘버(10번)”라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였다. 펠레는 1978년에는 국제평화상을 수상하였고 1980년에는 금세기의 운동선수로 선정되었다.

1969년 브라질발행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준공

내용시작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국내 산업과 직결되는 기초과학 및 응용과학의 진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데 합의(1965년 박정희 전대통령 방미 당시)한 후, 미국 정부(존슨

미국 대통령 재임기간)의 지원하에 1966년 2월에 재단법인으로 설립되었다. 그 후, 1969년 10월 23일 한국과학기술연구소의 청사가 준공 되었다. 연구소의 주요 임무는 우

리 우리나라 산업발전에 기여도가 큰 분야의 연구개발과 각종 사업계획의 타당성을 조사하고 국제적인 과학기술의 조사 연구 및 응용, 기술 정보의 정확 신속한 공급 등으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준공기념 상세정보보기

로 되어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한국과학기술원법에 따라 1981년 한국과학원과 함께 한국과학기술원(韓國科學技術硏究院 , Korea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으로 통합되었다가 1989년 6월 12일 기초 및 원천 기술 개발을 위한 대형 국책연구과제를 수행하는 종합연구기관으로서 한국과학기술원 연구부를 독립시켜 발족하였다. 1999년 1월 29일에는 '정부출연 연구기관 등의 설립·운영 및 육성 등에 관한 법률'(법률 5733)에 따라 기초 분야 연구소 3개와 함께 국무총리 산하 기초기술연구회 소속으로 개편되었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개관

내용시작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 오페라하우스가 1973년 오늘 문을 열었다. 개관을 기념하는 불꽃놀이와 함께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이 연주됐다. 엘라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참석한 이날 개관식은 텔레비전으로 생방송됐다. 조개 껍데기 모양의 독특한 구조 때문에 공사기간과 비용이 계획보다 훨씬 증가했다. 착공 14년 만에야 완공됐다. 당초 예상 건설비의 15배에 가까운 1억2백만 달러의 비용이 투입됐다.

건물 안에는 극장 5개, 리허설 스튜디오 5개, 그리고 레트토랑과 기념품가게 등 천여 개의 공간(room)이

들어서 있다. 이 곳에서 매년 3천여 건의 행사가 펼쳐지고 해마다 2백만여 명의 관람객이 찾아온다.

단순히 건물만 구경하러 오는 관광객도 매년 20만명이 넘는다.

사상 첫 성(性) 박람회 개막

내용시작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1969년 10월 21일 인류사상 처음으로 막을 올린 성박람회(性博覽會, SEXPO)는 폭발적인 관심을 모았다. 이 박람회는 개막식부터 파격적이어서 수염을 기른 2명의 대회개최자가 대회장입구에 걸쳐놓은 여자의 속옷을 가위로 잘라 테이프를 끊는 것을 대신했으며 개회사도 일장의 연설대신에 반나체의 한 아가씨를 연단에 올려놓고 온몸에 페인트칠을 함으로써 전례를 깼다. 한편 이 박람회를 관람하려고 세계각

국에서 호기심 가득한 신사들이 대거 코펜하겐으로 몰려들었고, 특히 중동지역에서는 성문제 전문가들이 전세비행기에 몸을 실을 정도였다. 전시대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각도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폼으로 찍은 성기의 사진들로 장관을 이루었고, 가슴을 온통 드러내 놓은 토플리스 안내양이 있는가하면 가랑잎으로 국부를 겨우 가린 남자악단들이 비틀즈 선율을 연주했다.

나일론 스타킹, 윌링턴에서 첫 시판

내용시작미국 듀폰사가 1938년 10월 27일, 나일론의 공업화를 발표하고, 이듬해인 1939년 10월 24일, 델라웨어(Delaware) 윌링턴(Willington)에서 나일론 양말을 첫 시판했다. 1939년의 뉴욕 만국박람회에서 나일론은 가장 인기있는 품목이었고, 1940년 5월 (15일), 뉴욕에서 여성용 나일론 스타킹의 판매가 시작되자 많은 여성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어 스타킹을 사고서 치마를 걷어 붙이

고 즉석에서 신어 보았다고 한다. 값싸고 질 좋은 나일론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만했다. 그러나, 정작 이 제품의 개발자 캐러더즈(Carothers, Wallace H., 189

6-1937)는 자신의 발명품이 날개 돋힌 성황을 이루는 행복한 장면을 볼 수가 없었고, 그로 인한 부와 명성도 누리지 못했다. 캐러더즈 박사는 뒤퐁사가 나일론의 발명을 발

표하기 전해인 1937년 4월, 필라델피아의 한 호텔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살을 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정치
시온주의 선구자, 이스라엘 정치가 에슈콜

1970년 이스라엘발행

내용시작1963~69년 이스라엘의 총리를 역임한 에슈콜(Levi Eshkol, 1895.10.25~1969.2.26)은 시온주의 선구자로 팔레스타인에 최초의 키부츠(이스라엘의 집단농장) 중 하나인 데가니아 베트를 건설하는 작업을 도왔다. 후에 그는 시온주의 노동당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히스타드루트(노동총연합)의 창립자가 되었다. 1948년 이스라엘이 정식으로 독립국이 되자 에슈콜 은 재무장관직(1952~63)을 포함한 정부의

여러 요직을 섭렵했다. 1963년 다비드 벤 구리온이 총리 사퇴 성명을 내자 에슈콜이 그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다. 그는 집권기간 동안 3개의 주요노동당을 이스라엘 노동당으로 통합함으로써 의회 내 다수파를 이루는 제1당을 이루었다.
※ 시온주의(Zionism) : 고대 유대인들이 고국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 유대민족주의 운동

제3차 아시아-유럽 정상회의 개최

내용시작`새 천년의 번영과 안보협력`을 주제로 한 제3차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가 의장국인 우리나라를 비롯해 26개국의 정상 또는 정상급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2000년 10월 20일 서울 COEX 컨벤션센터에서 개막됐다. 이틀 일정으로 열린 이번 회의에서 정상들은 두 대륙간 정치-안보-경제-정보통신 분야의 협력 강화방안을 모색했다. 회의는 `한반도 평화에 관한 서울선언`을 비롯, `2000 아시아-유럽협력체제(AECF 2000)` `의장 성명서` 등 3개 문건을 채택했다. 아셈 기간동안 사회, 시민단체, 학생과 `

제 3차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기념 상세정보보기

아셈 민간포럼` 참가자 1만5000여명은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반대하는 대규모집회를 열기도 했다. 이번 회의는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국제적 제어장치`를 한층 더 강화했다는 점과 유라시아 초고속 통신망 사업

을 비롯해 모두 23개 사업을 채택하는 등 구체적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한편, 화려한 외양과는 달리 내실이 미흡해 각국 정상들간의 `고급 사료장`이라는 지적과 북한의 인권과 대량 살상무기에 대해서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는 점 등이 문제점으로 제기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은 이번 회의가 한국정부 수립 후 최초의 다자간 정상회의였고, 최대 규모의 외교행사였다는 점에서 한국 외교역량이 한단계 성숙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북한, 김일성의 후계자로 김정일 공식발표

내용시작김정일이 조선노동당에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1973년부터 전개된 3대혁명 소조운동을 조직·지도하고 1975년에 '3대혁명 붉은기쟁취운동'을 발기하는 등 새로운 대중운동을 주도하면서 당내의 기반을 넓히는 한편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다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1973년 9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7차 전원회의에서 비서국 비서로 선임되었으며, 이듬해인 1974년 2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8차 전원회의에서 정치국 정치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조선노동당의 실권자로서 북한사회 전반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후계자로서의 김정일의 위상이 공적으로 확인된 것은 1980년 10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6차 당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최초로 대중 앞에 자신의 모습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그의 당내 서열은 4위였지만 김일성을 빼고는 유

일하게 당내 3대 권력기구라 할 수 있는 정치국(상무위원회 상무위원)·비서국(비서)·군사위원회(군사위원)에 모두 참여하게 됨으로써 사실상 2인자의 자리를 굳혔다. 조선노동당 6차 당대회가 끝난 직후 북한의 언론·출판물들에 의해서 '영광스러운 당중앙'이라는 익명으로 호칭되었다. 그러나 곧 북한의 언론·출판물들이 그를 '친애하는 지도자'로 호칭함으로써 후계자로서의 위치가 공식화되었다.

헝가리, 반(反) 소련 봉기

내용시작1953년 스탈린 사후, 소련이 일시적이나마 동구권에 대해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면서 헝가리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그해 7월, 철권통치를 행사해온 라코시(Rakosi Matyas)가 당 총서기로 물러나고 개혁주의자 임레 나지(Nagy Imre)가 총리에 올랐다. 나지가 자유화

정책을 펼쳐 국민의 지지를 모으자 라코시는 2년도 안돼 나지를 우익편향이라는 이유로 해임하고 시계추를 과거로 되돌렸다. 1956년 2월,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으로 동구권에 또 한번 희망이 싹트자 그해 6월 폴란드가 첫 반소(反蘇)봉기의 불을 지폈다. 불은 헝가리에

까지 번져 10월 23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대규모 반소(反蘇)봉기가 일어났다. 소련군 철수, 나지 복귀, 자유선거 등을 요구하는 10만명의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한 것이 발단이었다. 공산당은 무마책으로 나지를 총리로 다시 앉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계엄령 선포와 소련

군을 끌어들였다. 시민ㆍ헝가리군이 소련군을 상대로 헝가리 전역에서 격렬한 시가전을 펼치며 반소를 외치자 나지는 사태수습을 위해 일당독재 폐지와 자유선거를 약속하고 30일에는 소련군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11월 4일 소련군이 탱크를 앞세워 다시 부다페스트를 유린하면서 수천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헝가리는 다시 소련군 군홧발 아래 놓였다. 나지는 2년뒤 체포돼 처형됐다.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폭로

내용시작1995년 10월 19일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에 나선 박계동 민주당 의원은 “노태우(1932년 12월 4일 ~, 제13대 대통령) 전 대통령의 비자금 4천억 원이 시중 은행에 백억원씩 40개 계좌로 분산 예치돼 있으며, 이중 3백억 원은 신한은행 서소문지점에 예치돼 있다”고 주장하고, 박 의원은 관련 계좌번호와 잔액 조회표를 증거로 제시했다. 이에 검찰이 곧바로 수사에 착수하여 같은 달 22일 노태우 전 대통령의 경호실장이 검찰에 출두하는 것을 시작으로 은행관계자들과 재벌 총수들의 검찰 소환조사가 잇따랐다.

 제13대 대통령 취임기념 상세정보보기

노태우 전 대통령은 결국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기소 되었고 재벌총수 등 기업인 35명이 불구속 기소되었

다. 노씨는 항소심에서 징역 15년에 2천6백28억원의 추징금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 1997년 12월 사면복권 되었다.

육영수 여사 저격범 문세광 사형선고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여사 추모 특별우표 상세정보보기

내용시작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영부인 육영수(1925. 11. 29 - 1974.8.15, 제5대~8대 대통령 영부인) 여사에게 총탄을 발사해 숨지게 한 문세광(1951 ~ 1974.12.20, 재일 한국인 암살자). 그는 범행 두 달 만인 1974년 10월 19일 사형을 선고를 받았다. 서울지방법원은 이날 판결공판에서 내란목적 살인과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등 문세광의 공소 죄목 6가지를 모두 인정하고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했다. 문세광은 같은해 12월 17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고 12월 20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문화
현대시조의 선구자, 노산 이은상

내용시작 ‘가고파’ ‘성불사의 밤’ 등 귀에 익은 시조를 쓴 현대시조의 선구자,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 1903.10.22~1982.9.18)은 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나, 그의 아버지가 설립한 마산 창신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하고,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사학과를 공부했다. 귀국 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지냈고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구 금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었고 1945년 사상범 예비검속으로 광양경찰서에 유치 중 광복이 되어 풀려났다. 같은 해 호남신문사 사장을 지냈고 영남대학교와 서울대학교 교

수로 재직했다. 1954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에 선임되었고 1965년 민족문화회장 등을 맡아 다년간 민족적 위인에 대한 사업을 전개했다. 이후 시조작가협회장, 한글학회 이사, 문화재 위원, 한국산악회장, 독립운동사편찬위원장, 성곡학 술문화재단 이사장을 거쳐 1981년에는 국정자문위원에 위촉되었다. 시조의 형태나 내용면의 현대화에 크게 이바지한 그는 문단뿐 아니라 언론계, 민족문화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쌓았으며, 1963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69년 대통령상, 1970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 1973년 5·16민족상 등

을 수상하였다. 대표작으로 ‘가고파’,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노산 시조집’ 등이 있다.
음악시리즈(네번째묶음)

20세기 최대의 거장, 피카소

내용시작 20세기 최대의 거장으로 불리는 피카소는 1881년 스페인의 한 도시 말라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시골 학교 미술교사였는데 피카소가 13세에 그린 '비둘기를 든 소년'을 보고, 어린 아들이 이미 자신을 능가하고 있음을 알고 화구를 아들에게 넘겨주어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재능은 스페인의 문화 중심지였고 유서 깊은 도시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론잔 미술학교 입학시험에서 여실히 드러났는데, 한 달 동안 치를 수 있는 실기 시험을 14살의 나이로 단 하루 만에 그려내 모든 이를 놀라게 했고, 16살에는 모든 미술 콩쿠르를 석권할 정도였다. 1900년 19세 되던 해 바르셀로나 뒷골목 '검은 고양이' 선술집에서 시인 작곡가, 예술가의 얼굴을 스케치한 150여 점의 작품으로 첫 전시 개최하며, 20세기 최고 화가의 화려한

탄생을 예고하였다.
* 피카소(Pablo Ruiz y Picasso, 1881.10.25~1973.4.8) : 에스파냐의 화가로 브라크와 함께 입체주의를 창시하고 현대 미술의 영역과 양식을 개척하였으며, 평화 옹호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아비뇽의 아가씨들(1907)', '한국에서의 학살(1951)', '전쟁과 평화(1952)', 대벽화 '게르니카(1937)'등이 있다.

1981년  스페인 발행

과학
 최초의 낙하산 시범낙하

내용시작공중에서 사람이나 물자를 안전하게 낙하시키기 위하여 사용되는 우산 모양의 기구인 낙하산을 연구하고 시범낙하에 열중하였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낙하산 원리 연구에 관심을 가진 최초의 인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전해지며, 그 후, 1783년 세바스티엥 르노르망은 양손에 파라솔을 하나씩 들고 2층에서 뛰어내려 본 후에 낙하산을 직접 제작하고, 몽펠리에 관측탑에서 자신이 발명한 낙하산에 동물을 매달아 밑으로 날려 보낸 후, 자신도 직접 뛰어 내리는 시범낙하를 시도하였다. 1797년 10월 22일 파리에서 앙드레 자크 가른느렝은 세

계 최초로 고도1,000미터의 기구에서 낙하산을 타고 강하하여 안전착지에 성공했다. 더불어 그의 아내 잔느 쥬느비에브는 최초의 여성 낙하산 강하자로 인정되며, 그들의 질녀인 엘리자 가른느렝은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전문 낙하산 강하자라는 칭호를 얻었는데 그녀의 다양한 낙하법은 미국과 유럽에서 인기를 끌었다. 20세기에 들어, 1913년 3월 1일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알버트 베리가 최초로 비행기에서 낙하산을 타고 강하에 성공한 후, 1939년 소련에서 최초의 낙하산 부대가 조직되었다. 하지만 낙하산부대가 실전에 참가한 것은

1940년 5월 독일 낙하산부대의 네덜란드 공격이 최초로 낙하산을 전투에 사용하였다.
1994년  크로아티아발행

미국 최초의 전보가 켈리포니아-워싱턴 간에 송달

내용시작 미국의 웨스턴유니언전신회사(Western Union Corporation)는 1851년 (H.시블리에 의해) 처음 설립된 미국의 전기통신 회사이다.

새뮤얼 모스(Morse, Samuel F. B., 1791~1872)가 최초의 전보를 발신한 지 7년째 되던 해인 1851년 뉴욕-미시시피인쇄전신회사가 설

립되었다. 5년 뒤 (1856년) 다른 여러 독립 회선을 얻으면서 이 회사는 웨스턴유니언전신회사로 재조직되었으며, 1861년말에 포니익스

프레스를 대륙횡단전신선으로 대체했다. 이때부터 전신 사용량이 최고에 달했다가 그뒤 감소하기 시작하여 1976년에는 전신 운영으로 얻은 수입은 회사 전체 수입의 0.1%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스턴전신회사는 전보와 전보발신지 외에 개인용 회선 임대, 현금 서비스 등을 통해 운영을 확장하여 텔레타이프라이터까지 갖춘 이 회사의 중요한 자회사의 지위를 점했다

금주의 노벨상

‘죽음의 상인’으로 불린 이상적 평화주의자 노벨

2001년 스웨덴 발행 내용시작 스웨덴의 발명가 노벨(Alfred Bernhard Nobel, 1833년 10월 21일 - 1896년 12월 10일)은 이탈리아의 화학자 Ascanio Sobrero 가 발명한 폭약 니트로글리세린을 처음으로 실용화하는 것에 성공, 개량해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한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다. 다이너마이트는 공사 현장에서의 암반의 파괴 등 작업의 효율화를 진행시키는 것으로서 넓게 보급했지만 또 다른 치명적인 목적으로서 전쟁에 폭약으로 사용되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죽음의 상인’으로 불리기도 하였고 한편으로는 ‘이상적인 평화 주의자’로, ‘현실적이고 비정한 금융가’로 불리며 실제로 엄청난 살상효과를 지닌 무기 제조를 통해 벌어들인 막대한 부를 평화 공헌 활동에 사용한다는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 노벨은 다이너마이트가 전쟁에서 인명을 살상하는 폭탄으로서 사용되는 것에 많은 회의를 느꼈고 유언을 통해 다이너마이트의 발명과 유전 개발로 얻은 막대한 재산을 기금운용을 통해 인류발전에 공헌한 사람에게 상금을 주도록 하였다. 그의 유지대로 노벨상이 창설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었지만 다이너마이트에 의해 전쟁이 없어질 것이라고 믿었던 그의 빚나간 기대는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노벨문학상러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부닌

1990년 러시아발행 내용시작 러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1933년 노벨 문학상을 받으며 러시아 최고의 명문장가로 손꼽히는 부닌(Ivan Alekseevich Bunin, 1870.10.22~1953.11.8)은 언론인이자 사무원으로 활동하면서 시를 쓰거나 번역했고 1891년 첫번째 시집을 출간하며 문단에 발을 디뎠다.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2.27~1882.3.24)의 “히아와타, Hiawatha”를 번역해 1903년 러시아 아카데미로부터 푸슈킨 상을 받았고 1909년 아카데미 명예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주로 푸슈킨 계열의 전통에 속하는 고답풍의 시를 썼으며 전위적인 모더니즘 경향을 거부했다. 부닌은 단편소설 작가로 명성을 떨쳤는데 그중 한 단편집의 제목으로 삼았던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 Gospodin iz San-Frantsisko(1916)”는 걸작으로 손꼽힌다. 1943년에 마지막 단편집 “어두운 거리, Tyomnye alley”가 출판되었다. 혁명 후 1920년에 프랑스로 망명한 부닌의 작품은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최후라 칭송받는다.

온라인미술관
미래파 조각파, 보초니
1976년 이탈리아 발행

내용시작카남(南)이탈리아의 레조디칼라브리아 출생의 미래파 조각가 보초니(Umberto Boccioni, 1882.10.19~1916.8.16)는 1898∼1902년 로마에서 활동하던 중 전위파(前衛派) 화가인 G.발라 및 G.쇠라의 영향을 받고 파리에 갔다가 러시아를 거쳐서 귀국하였다. 1910년에 시인 F.마리네티 및 G.세베리니를 중심으로 한 '미래주의 선언(未來主義宣言)'에 참가하여, 이 파의 가장 중요한 화가·조각가·이론가로서 활약하였다. 과거의 전통에서 벗어나 기계문명·스피드·폭력·감각의 세계를 찬미한 매력적인 새 형식을 시작하여 전위파의 문을 열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 출정하여 33세로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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