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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여행

인물과 역사를 바로 알고 현재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 봄으로써 선조들의 지혜를 알아 봅시다.

지난 시간여행
제목 시간여행 제155호
등록일 2010. 2. 19.
첨부파일 첨부파일없음

청와대 앞길 & 인왕산 일반에 개방 상세정보보기

이주의 이벤트와 시간여행 구독, 추천하기 시간여행 구독하기 내용시작1993년 2월 25일 낮 12시, 제14대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 등산로가 일반에 개방됐다. 인왕산과 청와대 앞길은 북한 무장공비들의 청와대습격기도사건인 1968년 1.21사태 이후 금단의 구역이 된 후 25년 만의 일이었다. 이날 하루 200여 명의 관광객들이 청와대 앞 효자로와 팔판로에 몰려들었던 것으로 기록되었다. 청와대 앞길의 해금과 함께 경복궁의 우백호에 해당하는 해발 338m의 인왕산도 25년 동안의 입산통제가 풀려 시민들이 자유로이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사회
한국, 국제통신위성기구(INTELSAT) 가입

내용시작1960년대 세계 각국의 국제통신은 대체로 단파 무선과 해저케이블에 의존하였으며 여러 가지 애로와 불편한 점이 있어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국제통신 방식으로 위성을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1964년 8월 미국을 비롯한 11개국이 워싱턴에서 통신위성 사용을 위한 잠정조치에 관한 협정 및 특별협정을 체결하고 국제통신위성기구(INTELSAT)를 설치하였다. INTELSAT는 위성에 의한 세계통신망을 구성하기 위하여 최초의 상업통신위성

한국, 국제통신위성기구(INTELSAT) 가입

인 Early Bird를 미국에서 1965년 4월 대서양 상공에서 발사하여 미주와 유럽 대륙 간의 위성을 통한 통신 소통을 가능하게 하였다. 우리나라는 1967년 2월 24일 INTELSAT에 56번째로 가입하고 위성통신 지구국 건설을 위하여 68년도에 미국 수출입은행 및 필코포오드 회사간

에 차관 협정이 체결되어 충남 금산에 대지 11,511평 동, 건평 1,011평의 시설을 내·외자 18억 원으로 착공하여 카세그레인형 안테나를 기초 탑에 마지막으로 건립함으로써 완공되어 운용시험을 거쳐 6월 2일에 개통하였다. 이 지구국은 1969년 5월 발사되어 태평양 상공 경

도 174도의 적도 위에 정지한 INTELSAT Ⅲ호 F4와 연결, 미국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과는 직통으로, 기타 지역은 미국과 홍콩을 중계로 교신하게 되어, 전신, 전화, 텔렉스 및 사진전송은 물론 TV중계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 - 무하마드 알리 세계 챔피언 등극

내용시작1964년 2월 25일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복서 케시어스 클레이(무하마드 알리)가 생에 첫 번째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등극한 날이다. 철권 소니 리스턴에게 7회 KO승을 거두며 왕좌에 등극한 그는 통산전적 59전 56승 3패 37 KO승에 3번이나 세계 헤비급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며 자타가 공인하는 살아있는 링의 전설로 남아있다. 블랙 무슬림에 가입한 후 과거 흑인노예였던 그의

선조가 주인의 성을 따 붙인 이름이었던 ‘케시어스 클레이’를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하고 ‘흑인해방 운동’에 노력하였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자신이 최강의 복서임을 주장하였던 그는 은퇴 후 심한 후유증으로 인한 파킨슨병으로 투병하고 있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 - 무하마드 알리 세계 챔피언 등극

20억년 전의 비밀, 그랜드캐니언

내용시작1919년 2월 26일 미국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그랜드캐니언(Grand Canyon National Park)은 미국 애리조나주( f) 북부에 있는 거대한 협곡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그랜드캐니언은 길이 350km, 너비 6~30km, 깊이 약 1,600m로 이루어진 협곡으로 콜로라도강(江)이 콜로라도 고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곳에 형성되었다. 반건조지역이기 때문에 계곡 벽에는 수목이 간간이 있을 뿐이지만, 고원에는 수목이 무

20억년 전의 비밀, 그랜드캐니언

성하다. 그랜드캐니언의 단구에는 하바수파이 인디언 보호지구가 있으며, 소규모의 농경이 이루어진다. 고원에는 나바호 ·카이바브 ·후아르파이 등 인디언 부족의 보호지구가 있다. 깎아지른 듯 한 절벽, 다

채로운 색상의 단층, 높이 솟은 바위산과 형형색색의 기암괴석, 도도히 흘러가는 콜로라도 강이 어우러져 장엄한 파노라마를 연출하고 있다. 1919년 미국의 국립공원(면적 2,600㎢)으로 지정되었으며, 1979

년 유네스코 자연유산에 등록되었다.

정치
바람둥이 제왕, 프랑스의 샤를 7세 출생

내용시작예술과 문학을 후원하며 평화를 사랑했던 프랑스의 왕 샤를 7세(Charles VII, 1403.2.22 ~ 1461.7.22). 비록 끊임없는 염문을 뿌리고 다녔던 바람둥이 왕이었다 할지라도 그가 통치했던 기간은 프랑스 군주제도의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잉글랜드-부르고뉴 동맹에 이어 1420년에 체결된 트루아 조약에 의해 한때 프랑스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샤를 7세는 부왕이 서거하자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규합해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계속되는 잉글랜드-부르고뉴 동맹과의 전쟁동안 어려운 제정상태와 더불어 불리한 전황은 그를 더욱 어렵게 몰고 갔다. 샤를 7세는 꾸준히 평화협상을 벌였지만 여의치 않았고 급기야 1428년경 오를레앙에서 포위당하기에 이르렀다. 모든 것이 절망적

바람둥이 제왕, 프랑스의 샤를 7세 출생

이었던 순간 1429년 샤를은 잔 다르크라는 시골 소녀를 만나게 되었고 이후 그의 모든 것은 변하기 시작하였다. 잔 다르크를 통해 새로운 힘과 사기를 되찾은 샤를의 군대는 연전연승하였고 결국 프랑스 땅에서 영국을 몰아내며 샤를 7세의 왕국을 건설하게 되었다. 국민

들은 그의 정통성을 인정하였으며 오랫동안 외세의 점령당했던 한을 군주에 대한 무한한 충성으로 풀었다. 절대적인 지지를 한 몸에 받은 샤를 7세는 제도와 군사를 정비하여 자신의 왕권을 더욱 공고히 다졌고 노르망디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 대한 성공적인 원정을 마무리하

며 오늘날의 프랑스 영토 대부분을 확정지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워싱턴

내용시작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 2. 22 - 1799. 12. 14). 버지니아 주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워싱턴은 버지니아 민병대의 부대장으로 있던 시절부터 부당한 통치에 대한 거침없는 항쟁을 하였다. 당시 유럽 열강의 식민지로서 수탈의 대상이었던 신대륙 이주민의 불만은 크게 고조되어있었다. 결국 1767년 제정된 불평등한 조세법인 타운센드법을 반대함으로써 식민지 의회가 해산되자 무력충돌로 번지게 되었다. 두 차례의 대륙회의에서 본국에 대한 무력항쟁을 결의 한 후 위싱턴이 독립혁명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절대적인 무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은 뛰어난 리더쉽을 발휘 요크타운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독립전쟁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승리 후 1787년 헌법제정회의가 열리게 되었고 새로 제정된 헌법에 따라 워싱턴은 1789년 대통령에 당선되고 같은 해 4월 30일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취임 후 워싱턴은 국내 세력 간 단합을 이끌어 내었고 중립적인 외교정책을 펴 건국 초기의 미국을 안정적인 기반위에 올려놓았다. 두 번의 임기를 끝으로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전통의 수립을 위해 본인 스스로 더 이상의 대통령직을 사양하였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워싱턴

미국의 정찰병, 들소 사냥꾼 버팔로

내용시작미국의 코디(Cody, William F., 1846.2.26~1917.1.10)는 그의 나이 21세였던 1867~68년에 유니언퍼시픽철도 건설 현장의 노동자들에게 공급하기위한 들소사냥꾼으로 고용되어 18개월 만에 4,280마리의 들소를 죽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인해 코디는 버팔로 빌(Buffalo Bill)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실로 세계적인 기록이라 할만하다. 코디는 남북전쟁(1861~65) 참전은 물론, 저항을 계속하던 미시시피 강 서쪽의 인디언들을 완전히 진압하는 16 차례의 인디어 전쟁에 참여하여 미국정부를 위해 일했으며, 특히 제5기병대를 위해 정찰병과 안내인으로 일한바 있다. 미군 당국은 1989년 그에게 명예 메달을 수여하였다. 이러한 코디의 다채로운 무용담은 신문 및 작가들의 이야기 소재가 되어 서부의 영웅으로 만들어 주기에 충분하였고 1872년 번들린이 쓴 연극 '초원의 정찰병( The Scouts of the Prairie)'의 주연배우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1883년에는 '바펄로 빌의 와일드 웨 스트 쇼'를 조직한 코디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미국 서부에 대한 지워지지 않는 이미지를 만들어 냈으며, 미국 서부를 주제로 한 할리우드 영화나 TV 드라마의 모습을 빚어내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미국의 정찰병, 들소 사냥꾼 버팔로

 7년 전쟁의 영웅, 프랑스 몽칼름 장군

내용시작7년전쟁(슐레지엔 영유를 둘러싸고 유럽대국들이 둘로 갈라져 싸운 전쟁1756년 ~ 1763년)에서 주둔 프랑스군 총사령관을 역임하며 맹활약을 떨쳤던 몽칼름(Louis-Joseph de Montcalm-Grozon, 1712.2.28~1759.9.14). 그는 이미 12세 때 군대에 기수로 들어갔고, 15세 때 군에 입대한 후, 폴란드 계승전쟁에 처음 출정하는가하면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에서도 활약하였다. 1756년 7년전쟁이 일어나자 캐나다의 프랑스군 지휘관이 되어 퀘벡에서 천부적인 대담한 행동으로 오스위고 요새와 윌리엄 헨리 요새를 공략하여 영국군을 격파하였다. 1758년 타이칸달로가를 소수의 병력으로 사수하여 영국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혔으나, 원군이 오지 않아 고전하던 끝에 1759년 J.울프 장군의 공격을 받아 퀘벡은 함락되고 치명상을 입은 몽칼름은 전사하였다.

 7년 전쟁의 영웅, 프랑스 몽칼름 장군

문화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

내용시작염세주의... 간혹 세상에 대한 원망과 실망으로 가득한 자포자기 형태의 독설을 퍼붓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이나 사상을 말할 때 염세주의라는 말을 쓴다. 즉,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맹목적인 생명의 의지에 이끌려 불행하고 비참한 삶을 영위하며 이러한 자아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생명에의 의지를 부정함으로써 우리는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는 하나의 사상을 말하는 것이다. 독일 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주장한 이 위험한(?) 사상은 낭만주의적 태도에 물들어 있었던 당시 유럽인들의

정신세계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상은 때로는 현대사회가 주는 하나의 사회적 문제로도 우리에게 다가오는데 이 또한 쇼펜하우어가 주장했던 사상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즉,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내면에서 이러한 갈등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때로는 의지가 약하거나 결정적인 불행을 겪었을 때 밖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아무튼 쇼펜하우어의 철학사상은 헤겔이 주장한 관념 또는 관념적인 것을 실재적 또는 물질적인 것보다 우선으로 보는 관념론과 대치되는 사상으로서 동시대 사상을 이끈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

음악의 어머니, 헨델

내용시작음악의 어머니 헨델(Georg Friedrich H?ndel, 1685.2.23~1759.4.14). 바로크시대를 대표하는 이 위대한 작곡가를 칭하는 말이다.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바흐와 함께 동시대 서양음악의 기틀을 마련한 헨델은 예술가로서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도 평생 동안 그 명성을 유지하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독일의 할레에서 태어나 9살부터 체계적인 음악 수업을 받았던 헨델은 함부르크의 오페라극장을 거쳐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1712년 이후 주로 영국에서 활동한 헨델은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로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으며 작곡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헨델은 천재적인 작곡가 소질이외에도 대중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한 대중의 외면으로 자신이 세운 ‘왕립 음악아카데미’가 문을 닫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음악활동을 계속하였고 화려하고, 자유분방하며, 선율미가 돋보이는 작품들을 발표하며 대중들의 인기를 다시 찾게 되었다. 헨델은 숨을 거둘 때 까지 음악에 대한 열정적인 삶을 살았고 수많은 영국인들을 감명시키는 명곡들을 발표하며 화려한 인생을 살았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바흐와 함께 그가 남긴 발자취는 바로크 음악을 총정리 하는 한편 이후 서양음악사에 그들의 뒤를 잊는 여러가지 음악사조들이 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위대한 것으로서 평가받고 있다.

음악의 어머니, 헨델

 한국 춤의 진수를 선보인 벽사 한영숙
독일의 풍자가 캐스트너

내용시작드레스덴에서 수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케스트너(Erich K?stner, 1899.2.23 ~ 1974.7.29)는 교사가 되기 위한 전문학교를 졸업 후 교사 생활과 함께 자유기고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신문 편집 위원을 하였던 케스트너는 틈틈이 풍자성이 강한 시나 무대비평을 발표하면서 재치 있고 함축성있는 글을 꾸준히 발표했다. 시인으로서도 인정받았던 그는 1928년 ‘에밀과 탐정들(Emil und die Detektive)’이라는 동화를 발표하여 아동문학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나치가 정권을 잡은 후 독일에서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되었으나 스위스에서 가명으로 책을 내는 등 지속적인 집필활동을 하였다. 케스트너

독일의 풍자가 캐스트너

는 아버지가 유태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독일인임을 늘 강조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그의 정치적 성향은 자유주의·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반 파시즘적인 성향이었고 이로 인해 자신이 출판한 책들이 나치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며 분서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하지만 케스트너 본인만큼은 나치

정권도 어쩔 수 없었다. 당시 케스트너의 인기는 최고조에 달했고 나치정권 조차 그가 발표한 몇몇 동화는 금서에서 제외시킬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읽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독일이 분단되면서 케스트너는 모친과 서로 떨어져야하는 생이별을 겪었다. 그러나 그의 업적과 반 나치적인 활동들을 인정

한 동독 정부는 그의 모친을 극진히 보살폈다고 한다. 케스트너는 초대 서독 팬클럽 회장이 되었으며 1960년 ‘내가 어린이였을 때 (Als ich ein kleiner Junge war, 1957)’라는 동화로 제 3회 국제 안데르센 상을 수상하였다.

스웨덴 문학사의 주역, 로-요한손

내용시작20세기 초 스웨덴 문학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로-요한손(Lo-Johansson, 1901.2.23~1990)은 19세기 후반의 사실주의에 이어 본격적으로 현대문학의 길로 접어드는 길잡이 역할을 하였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사회적 병폐에 대한 고발의 의미를 담은 사실적인 내용의 작품을 연달아 발표하며 작가로서 인정받았다. 요한손은 주로 자전적 소설을 많이 남겼는데 자신이 살아온 어려운 환경 속에서 겪어야 했던 계층간 갈등을 잘 표현하였으며 개인의 성격묘사 또한 뛰어났다.

스웨덴 문학사의 주역, 로-요한손

폴란드 현대문학을 이끈 비트키에비치

내용시작바르샤바에서 태어나 화가이자 작가로서 활동했던 비트키에비치(Stanisław Ignacy Witkiewicz, 1885.2.24 ~ 1939.9.18)는 폴란드 전위파의 선구자로서 잘 알려져 있다. 크라쿠프의 미술 아카데미에서 그림공부를 시작한 그는 화가 겸 사진가로 활동하기도 하였고 왕성한 집필 활동을 통해 훗날 부조리극으로 불리는 연극의 원형을 완성하였다. 비록 살아있을 때 보다는 그의 사후 근래에 들어 더욱 조명을 받은 작가였지만 20여편의 희곡과 함께 장편소설 ‘가을의 이별(1927)’, ‘채워질 수 없는 것(1930)등을 남기며 독창적인 시각과 뛰어난 구성으로 폴란드 현대문학을 이끈 인물이다.

폴란드 현대문학을 이끈 비트키에비치

프랑스 대표적 인상파화가 르누아르

내용시작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로 불리는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41.2.25~1919.12.3)는 후에 라파엘로등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화풍을 정립한다. 19세기를 대표하는 화가로서 뛰어난 색체가인 그는 1900년 프랑스 최고의 훈장인 레지옹도뇌르훈장을 받았다. 만년에 지병인 류머티즘성 관절염 때문에 휠체어에 앉아 손가락에 붓을 묶어 그림을 그렸을 만큼 예술에 대한 그의 열정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까지 계속되었다.

프랑스 대표적 인상파화가 르누아르

19세기 대표적 대중시인 롱펠로

내용시작미국의 대중적 시인이었던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2.27~1882.3.24)는 유럽의 시적 전통 및 유럽 대륙의 민요를 번안·번역하여 소개하였고, 식민지 전쟁을 배경으로 한 비련의 이야기 '에반젤린(1847)', '하이어워사의 노래(1855)', '마일즈 스탠디시의 구혼(1858)' 등의 장시로 유명한 인물이다. 하버드대학 활동하였던 그는 시 창작에 전념하기 위해 교수직을 사직하고, 미국 최초로 인디언을 소재로 한 '하이어워사의 노래(1855)'를 발표하여 미국내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우연한 화

재로 아내를 잃고(1861년) 화상을 입은 롱펠로는 사망할때까지 20여년간 고독하고 우울한 생활을 하며 단테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는데 전력을 기울인 것으로 전해진다(그가 수염을 기른 이유는 아내를 구하기 위해 불길에 뛰어들었다가 화상을 입은 부터라고 전해짐). 1882년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을 빗대어, 미국의 평론가겸 전기작가인 반 위크 브룩스는 "뉴잉글랜드의 아침을 비추던 모든 태양 가운데서 그는 가장 달콤하고 가장 큰 태양이었다"라고 극찬했다

19세기 대표적 대중시인 롱펠로

창법의 규범으로 불리는 카루소

내용시작이탈리아의 테너 가수이자 음악가인 카루소(Enrico Caruso, 1873.2.27 ~ 1921.8.2)를 일컬어 이태리 벨칸토 창법의 규범이라 불리는 사람, 그를 빼고는 아리아를 논할 수 있는 가수, 자신의 음성을 음반으로 남긴 최초의 음악가로도 불리우고 있다. 20세기 초반 이탈리아 최고의 오페라 테너 가수이자 자신의 음성을 음반으로 남긴 최초의 음악가인 카루소는 "내부로부터도 함께 노래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요컨대 음을 온몸으로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라는 말로도 유명하다. 1995년 12월 31일자 워싱턴 포스트지는 지난 천 년동안의 인류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과 인물을 설정 발표했다. 가장 위대한 음악으로는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꼽았다.

창법의 규범으로 불리는 카루소

에세이(Essai) 문학의 창시자, 몽테뉴

내용시작프랑스의 사상가, 문필가 몽테뉴(Montaigne, Michel de, 1533.2.28~1592)는 16세기 후반 프랑스의 광신적인 종교 시민전쟁의 와중에서 종교에 대한 관용을 지지했다. 인간 중심의 도덕을 제창하고 그러한 견해를 피력하기 위해, 또는 좀 더 정확히는 그러한 견해가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밝히기 위해 에세이(essai)라는 문학형식을 만들어냈다. 그의 '수상록 Essais'은 인간 정신에 대한 회의주의적 성찰과 라틴 고전에 대한 해박한 교양을 반영한다. 그는 이

'수상록'으로 프랑스에 모랄리스트의 전통을 구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이래의 프랑스 문학, 유럽 각국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에세이(Essai) 문학의 창시자, 몽테뉴

금주의 노벨상

[노벨화학상] 이탈리아 화학자 나타

이탈리아 화학자 나타 내용시작오늘날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인 플라스틱이나 합성고무는 이탈리아의 화학자 나타(Giulio Natta, 1903.2.26 ~ 1979.5.2)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1924년 밀라노 공과대학을 졸업한 나타는 화공학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대학과 연구소에서 화학물의 합성을 연구하였다. 주로 고분자 화합물에 대한 연구를 하였던 나타는 독일의 화학자 치클러와 함께 ‘치클러-나타’촉매를 이용 규칙적인 분자구조를 가진 폴리프로필렌을 얻었다. 이들이 함께 만든 화합물들은 충분한 경도와 더불어 내열성 또한 우수해 상업적으로 이용가능 했으며 이 연구결과를 인정받아 치클러와 함께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노벨생리/의학상] 캐나다 출생 미국의 신경생물학자 허블

캐나다 출생 미국의 신경생물학자 허블 내용시작인간의 가장 중요한 신체기능중 하나인 시각은 사물의 형상을 받아들여 뇌에 전달 인지하는 능력을 갖게 한다. 캐나다 태생 미국의 신경생물학자 허블(David Hunter Hubel, 1926.2.27~ )은 가장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기능중 하나인 시각체계에 대한 신경전달과정을 규명한 공로를 인정받아 위즐, 스페리 등과 함께 1981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았다. 몬트리올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의사자격을 취득한 허블은 몬트리올 신경학연구소를 거쳐 존스홉킨스 대학교 의과대학 제직시절 훗날 획기적인 발견을 함께할 동료 위즐을 만났다. 1959년 위즐과 함께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의 교수가 된 허블은 망막에서 뇌의 감각 및 운동중추로 전달되는 정보를 분석하는 메커니즘을 연구하여 시각체계의 정보처리 과정을 규명하는 놀라운 업적을 이뤄낸 것이다.

[노벨물리학상 / 노벨평화상] 노벨상 2관왕 폴링

노벨상 2관왕 폴링 내용시작인간의 신체에 일어나는 방어기전인 항원과 항체에 관한 연구로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물리화학자 폴링(Linus Carl Pauling, 1901.2.28~1994.8.19)은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한 후 유럽유학을 통해 양자역학을 공부하였다. 1931년 미국으로 돌아온 폴링은 화학결정에 관한 이론을 연구하여 발표하였고 더불어 화학이론에 대한 새로운 개척을 시도하여 큰 성과를 얻었다. 다방면에 걸친 그의 업적은 양자역학과 화학분야를 접목시키는 것을 비롯하여 인간의 체내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했다. 또한 그는 여러 유능한 학자들과 활발한 교류를 통하여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더불어 늘 새로운 영역에 대한 결합을 시도해 어김없이 놀라운 결과를 얻어 내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의 수많은 업적 가운데 독일의 혈청학자인 란트슈타이너와 함께한 항체에 관한 연구는 인간의 체내에서 일어나는 화학기전에 대한 명확한 연구결과를 발표함으로써 폴링에게 첫 번째 노벨상의 영광을 가져다주었다. 평화주의자이기도 하였던 폴링은 1945년 이후 핵무기 사용에 대한 반대의견을 개진하였고 ‘전쟁은 이제 그만!’(No More War!,(1958)‘이라는 책을 통해 전쟁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등 적극적인 평화운동을 펼쳤다. 1962년 노벨위원회는 폴링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하여 그의 생에 두 번째 영광을 안겨주었다.

온라인미술관
미국의 화가 호머
미국의 화가 호머

내용시작평생 동안 미국 각지의 풍경화와 풍속화를 그렸던 호머(Winslow Homer, 1836.2.24~1910.9.29)는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밝은 색채와 광선을 중요시하는 야외 사생활동과 더불어 ‘하퍼스 위클리’의 삽화가로서 활동했던 경험을 살려 그만의 독특한 화풍을 수립한 화가이다. 보스턴에서 태어나 석판화를 배우며 예술가의 길로 들어선 호머는 자신이 직접 현장에서 그린 남북전쟁 당시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다룬 삽화들을 통해 유명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생전에 그다지 큰 평가를 받지 못한 화가였다. 하지만 호머는 항상 발전적인 화가였다. 1870년대 초반부터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한 호머는 자신이 추구하는 효과를 얻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했고 그 결과 수채화의 한계를 극복한 그림으로 평가 받는 뛰어난 수작들을 남길 수 있었다. 화실에 머물지 않고 항상 현실세계로 뛰어나가 생생한 그림을 그렸던 호머는 당시 유럽화풍에 길들여져 있었던 미국 화단에 신선한 자극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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