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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여행

인물과 역사를 바로 알고 현재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 봄으로써 선조들의 지혜를 알아 봅시다.

지난 시간여행
제목 시간여행 제154호
등록일 2010. 2. 16.
첨부파일 첨부파일없음

국채보상운동 상세정보보기

이주의 이벤트와 시간여행 구독, 추천하기 시간여행 구독하기 를 팔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과 어린 학생들, 걸인들, 외국의 유학생들까지 이 민족운동에 동참하면서 남녀노소, 신분과 계층을 초월하여 나라 사랑의 감동의 물결이 한반도에 넘쳐났다. 비록 일제의 방해공작과 모함에 의해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국채보상운동은 어려울 때 하나가 될 수 있는 우리 민족의 저력을 보여주었으며 지난 1997년 IMF 외환위기 시 다시 한

내용시작“무릇 신민이 충으로 행하고 의를 숭상하면 나라는 흥하고 백성은 평안을 누리며, 불충하고 불의하면 나라는 망하고 백성의 멸함은 고금의 역사에 근거함이라.” (1907년 국채보상 취지문 중) 1907년 2월, 대구에서는 김광제와 서상돈의 주도 하에

한국 식민지화를 위해 일제가 강요한 1,300만 원의 나라의 빚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2천만 동포가 석 달간 담배를 끊고 그 대금으로 나라를 지키자는 애국의 작은 불씨는 전라도, 함경도까지 전국적으로 빠르게 번져갔다. 부녀자들은 비녀와 반지

번 온 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을 통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

사회
스웨덴의 탐험가, 지리학자 헤딘

내용시작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교역로 실크로드. 과거 수많은 상인들이 오가며 양대 문명의 가교역할을 하였던 중앙아시아를 가로지르는 교역로를 탐험한 인물이 있었다. 1865년 스톡홀롬에서 태어나 베를린 등지에서 지리학과 광물학 동물학 라틴어 등을 공부한 그는 수십 년간 중앙아시아 곳곳을 탐험하며 수많은 유적지와 더불어 중요한 고고학적 발굴을 이룩한 인물이다. 스

스웨덴의 탐험가, 지리학자 헤딘

웨덴-노르웨이 사절단의 통역관으로 임명되면서 탐험 인생을 시작한 헤딘은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파미르고원과 죽음의 땅 타클라마칸, 티벳, 실크로드, 그리고 히말라야를 여행하고 이 광대한 지역에 대한 최초의 세부지도를 만들었다. 수차례의 목숨 을 건 탐험을 통해 만주와 신장 사이에서 300여개의 고고학 유적지와 함께 대규모의 석기문화가 있었음을 밝혀냈으며 그가 발견한 유물을 통해

당시의 생활이 사냥과 어로에 의존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타림분지를 지배하다가 6세기 이후 멸망하여 모래 속으로 사라진 고대도시 누란을 발견하였으며 히말라야가 하나의 산맥이라는 사실을 밝힌 최초의 유럽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목숨을 건 탐험과 화려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가 발견한 대부분의 유적들은 발견 직후 도굴되었으며 그의 동료들과 함께 얻은 수많은 유물들은 오늘날까지 중국으로 돌아

오지 못하고 있다.

미국 해병대, 일본 이오지마에 상륙

내용시작면적 20km2. 이오열도를 구성하는 서태평양상의 작은 화산섬 유황도. 1945년, 이 작은 화산섬에 사흘간 엄청난 양의 함포를 퍼붓고 상륙한(2.19) 미군은 2월 23일 스리바치산 정상에 성조기를 꽂고 섬을 점령하기까지 불과 며칠 동안 6천여 명의 전사자를 냈으며 일본군 수비병력 2만 여명을 거의 전멸시켰다. 태평양 전쟁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유황도는 미국의 일본 본토 폭격의 전초 기지가 되었으나 이 전투로 인해 미군 3개 해병사단이 작전 불능의 타격을 입었다. 훗날 제2차 세계대전중에 미국 해병대에게 줄 수 있었던 명예훈장의 4분의 1이상이 이오지마(유황도) 상륙부대를 위해서 주어졌으며 스리바치산 정상에 성조기를 꽂는 사진은 일본제국주의의 멸망을 상징함과 동시에 촬영기자인 AP통신 종군기자 ‘조 로젠탈’에게는 퓰리쳐상을 안겨주었다.

미국 해병대, 일본 이오지마에 상륙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 시작

내용시작우리나라 방송의 태동기로 일컬어지는 1920년대 초반, KBS의 전신인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은 1926년 11월 30일 조선총독부로부터 방송 무선전화시설의 인가를 받아 1927년 2월 16일 호출부호 JODK, 출력 1kW,주파수 690kHz로 본방송을 개시하였고, 6월에는 최초로 무선 중계방송이 시행되기도 하였다. 초창기의 방송은 단일 채널을 통한 한일 양국어의 혼합 방송으로 그나마 방송시간 비율도 1 대3으로 일본어 중심이었으나, 이해 7월 신문의 비난을 받자 2대 3의 비율로 바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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뀌어 교대 방송했다. 순수 한국어 방송으로는 창, 민요, 동화, 고담이 이따금씩 방송되었으며, 그밖에 한일 공동프로그램으로 양악 방송이 진행 되었다. 이 후,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방송 사업의 발전을 위해 전력이 증강되었고 한국어

와 일본어가 별도의 채널을 통해 이중방송 됨에 따라 정동연주소가 증설되고, 연희방송소가 착공되었다. 1935년에는 방송망의 규모가 팽창함에 따라 경성방송국의 명칭이 경성중앙방송국으로 바뀌었고, 2년 후에는 주파수 변경과 아

울러 제2방송이 출력을 증강함으로써 간이수신기로도 전국청취가 가능하게 되었다. 수신기도 고급화되어 스피커가 달린 수신기가 생산됨으로써 라디오 방송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 내한

내용시작1954년 2월 16일, 당시 최고의 섹시심볼로 여겨지던 마를린먼로(Marilyn Monroe, 1926.6.1 ~ 1962.8.5)가 한국전쟁에 참여한 주한미군을 위문하기 위해 내한하였다. 내한한 마를린먼로는 1954년 1월, 메이저리그 타자출신인 '조 디마지오'(Joe Dimaggio, 1914~1999)와의 화려한 결혼식 이후, 일본 동경에 신혼여행을 떠나온 상황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신혼여행지에 신랑을 남겨둔 채 마를린몬로는 한국을 향했고, 헌신적인 여자상을 기대했던 조디마지오는 그녀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국전쟁에 참가한 미군들에게는 위안이 되었을지언정, 영혼의 동반자로 불리는 그녀의 남편과의 사이가 멀어지는 대목이다. 먼로의 끝없는 남성편력과 디마지오의 결벽증은 잦은 충돌을 일으키다 뉴욕 지하철 환풍구위 노출장면으로 유명한 “7년만의 외출”을 촬영한 뒤 9개월 동안의 결혼생활을 청산함으로써, 당대 최고의 여배우와 스포츠스타와의 화려한 결혼생활은 일단락되었다.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 내한

독일의 지리학자 바르트

내용시작미지의 세계로 남아있던 아프리카 내륙을 탐험하고 그 결과를 저서로 남겼다. 인류학·역사학·언어학 등 막대한 양의 정보를 담고 있는 그의 저서 ‘아프리카 북부·중부 여행과 발견’은 오늘날까지도 특정지역에 관한 기록 중에서 가장 포괄적인 저작물로서 평가받고 있다. 유럽과 아랍어권의 다양한 언어에 능통했던 바르트는, 1850년부터 약 5년여 동안 1만 6천 km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탐험하며 건강의 악화와 동료들을 잃는 악조건 속에서도 상세한 그림과 더불어 4권에 이르는 기념비적인 기록을 남긴 것이다. 1855년 귀국 후 주로 유럽 지방을 여행 하였으며 1863년부터 자신의 모교인 베를린 대학의 교수를 역임 하였다.

독일의 지리학자 바르트

정치
잉글랜드 최초의 여왕 메리1세

내용시작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난 메리 튜더(Mary Tudor). 국 최초의 여왕으로 군림하였던 그녀는 재위기간 동안 로마 가톨릭 복고정책으로 개신교와 성공회를 탄압하여 훗날 ‘블러디 메리(Bloody Mary; 피의 메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바람둥이였던 아버지 헨리 8세 때문에 영국 왕위 계승권자로서 수많은 위기와 좌절을 겪었다. 부왕의 사망 이후 영국 국왕의 지위를 얻으려는 노섬벌랜드 공작 더들리의 책략으로 한때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귀족과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로 메리는 스스로 여왕으로의 즉위를 선언하며 사실상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 되었다.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 1세는 부왕이 이룩한 종교개혁의 결과를 전면 부정하고 로마 가톨릭의 복귀 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성공

회성직자들과 개신교 신자들을 차례대로 체포하여 처형시켰으며 300여명의 반대파를 화형에 처하는 등 3년 동안 공포정치를 폈다. 에스파냐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메리는 반대를 무릅쓰고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의 아들이자 아스투리아스 공인 펠리페와 결혼 하였고 이로 인해 프랑스 에스파냐 간 전쟁에 휘말려 프랑스에 패하여 대륙에 가지고 있던 마지막 영토인 칼레를 영원히 상실하게 되었다. 헨리 8세의 생전, 계모들로부터 그녀가 받았던 박해의 감정은 눈을 감는 순간까지 남아있었고 그녀가 결혼한 이후부터 자신의 후계를 잇기 위한 강박관념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 메리 1세는 5년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 재위한 후, 난소 종양에 걸려 1558년 11월 17일에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서거하였다.

잉글랜드 최초의 여왕 메리1세

영국의 외교관 하트

내용시작중국 청조 말기, 중국 세관의 운영을 책임짐으로써 청 왕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던 그는 최고 고문으로서 외교상의 중요 문제에 관여하였다. 중국 주재 영국 공사관 관리로서 중국생활을 시작한 그는 1859년 광둥의 세관조사관을 거쳐 1863년 외국 수입물품에 대한 관세를 징수하기 위해 조직한 해상 관세국의 조사국장에 임명되었다. 뛰어난 수단을 발휘한 그는 조직을 확대 시키는 한편 중국의 해안을

통제하고 정부의 항구시설을 운영했으며 전국적인 체신망을 운영하는 등 1908년 귀국할 때까지 45년간 해관 최고책임자로서 제직하였다. 베트남에 대한 청국의 종주권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청국 사이에 벌어진 청-프랑스전쟁 때 강화교섭(1885)에 나서기도 하였던 하트는 의화단운동에서 내외의 교섭을 맡는 뛰어난 정치적 수단을 발휘하가도 하였다.

영국의 외교관 하트

노르웨이 국왕 하랄 5세

내용시작부왕 올라프 5세를 계승하여 1991년 국왕이 된 하랄 5세는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 근교 아스케르에 위치한 스카우굼의 왕실 영지에서 출생하였다. 에드워드 7세 영국 국왕의 증손자로서 영국의 왕위 계승 서열에 포함되기도 하는 그는 국왕의 지위와 더불어 노르웨이 교회의 수장이기도 하다.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옥스퍼드에서 공부하였으며

훌륭한 운동선수로서 요트 올림픽 국가대표이기도 하였던 국왕은 부왕을 닮아 만능 스포츠맨 이었다. 1991년 많은 논란 끝에 평민인 소냐 하랄센과 결혼해 공주 마르타 루이스(1971년생)와 왕세자 호콘(1973년생)의 1남 1녀를 두었으며 최근 건강이 악화되어 2006년 9월부터 왕세자 호콘이 섭정을 맡고 있다.

노르웨이 국왕 하랄 5세

민초들의 투쟁, 동학농민운동 발발

내용시작갑오농민전쟁으로도 불리는 동학농민운동은 조선 후기 봉건제도의 모순과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반대한 대규모의 투쟁이었으며, 봉건지배층의 지주적 입장의 근대화노선과 농민적 입장의 근대화노선의 대결이었다. 1884년 (고종 31년)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전봉준 등을 지도자로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

으킨 농민 운동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와 착취에 대한 항거에서 발단하여 한때는 관군을 무찌르고 삼남 지방을 휩쓸었으나, 결국 청나라, 일본등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 이 운동은 훗날 항일 의병 투쟁과 3·1 운동으로 계승되었다.

민초들의 투쟁, 동학농민운동 발발

마지노선

내용시작우리가 흔히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마지노선'이라는 말은 더 이상 양보할 수 없거나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방어선을 뜻한다. 이 말의 유래는 일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침공을 막기 위하여 프랑스가 국경지대에 설치한 방어용 장벽을 일컫는 말이다. 막대한 자금을 들 여 프랑스와 독일 국경에 설치된 당시 최고 기술로 축조된 이 현대식 방어선은 난공불락의 요새화된 국경선 이었으나 이를 너무 믿은 프랑스는 독일의 재무장을 근본적으로 막지 못하였고 급기야 1940년 벨기에를 침공하고 마지노선을 우회하여 들어오는 독일군을 막지 못하고 무너지고 만다. 마지노선(Maginot Line)이라는 이름은 이 방어선을 제안하고 만들게 한 프랑스 육군 장관 ‘앙드레 마지노 : Andre(-Louis-Rene) Maginot'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오는 2월 17일은 ‘앙드레 마지노'의 생일이다.

마지노선

미국의 정치가 설리번

내용시작변호사로 일하다가 1774년 뉴햄프셔 식민지 의회에 선출되고, 같은 해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대륙회의 의원으로 일하던 미국 초기의 정치지도자이자 독립전쟁 때의 장교인 설리번은 1775년 6월 대륙군 준장으로 임명받고 보스턴 포위전에서 원군으로 활약했다. 워싱턴 장군의 우익부대를 지휘해 뉴저지 주 트렌턴 공격(1776. 12)을 승

리로 이끌고, 1779년 이로쿼이 인디언족과 국왕파 연합군을 뉴욕 서부에서 무찌른 일로 이름을 떨쳤다 건강상의 이유로 전역을 한 이후로도, 대륙회의 의원, 주 법무장관, 뉴햄프셔 지사 등을 역임하며 공직에 몸을 담았다.

미국의 정치가 설리번

과학
세계최초, 음속돌파비행 성공

내용시작음속, 즉 소리의 속도를 말하는 것으로 인간이 하늘을 나는 꿈을 실현 시킨 뒤 남은 장벽 중에 하나는 소리보다 빨리 날수 있나 하는 것이었다. 2차 대전 후 비행기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 왔지만 당시까지 가장 빨리 날 수 있는 비행기조차 소리의 벽을 넘지 못했다. 이 과제를 풀기 위해 미국 육군과 해군은 미국항공자문위원회를 공동

으로 구성하였고 1945년 벨사와 비행체 개발을 계약, 수차례 시험 끝에 드디어 1947년 켈리포니아 남부 상공에서 모선인B-29서 출발한 XS-1호기가 마하 1.06(시속 1,133km)에 도달함으로써 인류최초로 초음속 시대를 열게 되었다. 지난 2월 13일은 인류 최초로 음속의 장벽을 넘어선 미국 공군장교 이거(Charles Yeager)의 생일이다.

세계최초, 음속돌파비행 성공

콩코드 여객기 첫 선

내용시작영국과 프랑스가 공동개발한 초음속 여객기(SST) 콩코드(Concorde)! 1969년 오늘, 시험비행을 위해 프랑스의 뚤루즈 공항에 모습을 나타냈다. 알루미늄 합금으로 제작됐고 가늘고 긴 삼각날개와 4개의 엔

진을 지닌 콩코드기는 28분 동안의 처녀비행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7년 뒤인 1976년 상업운항을 시작했다.

콩코드 여객기 첫 선

이탈리아 물리학자 볼타

내용시작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전기적 전압의 단위로 쓰이는 볼트(V)는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볼타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탈리아의 코모에서 출생한 볼타는 코모 왕립학교에서 화학과 전기현상을 연구하였고, 이 학교의 물리학 교수를 거쳐 1779년 스위스 파비아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의 초기 연구는 기체에 관한 성질을 밝히는 것으로서 1778년 메탄 기체를 발견하여 분리시키는 연구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또한 전기에 관한 특별한 관심과 더불어 전기현상에 대한 논문의 발표와 더불어 정전기를 발생시키는 데 사용하는 기구인 기전반을 발명하였고 축전 기, 미량의 전기를 검출하는 검전

기 등을 제작하였다. 1791년 동료 과학자 갈바니의 ‘개구리다리 실험’을 지켜본 볼타는 새로운 가설을 세우고 1800년 ‘볼타의 열전기더미’를 고안 이를 증명함으로써 화학전지의 발명으로 이어지는 이후의 전기현상 연구에 크게 공헌하였다. 인류 최초의 전지를 통해 전지가 전류를 일으키는 것을 성공적으로 보여준 볼타는 이 업적으로 1794년 영국 왕립학회에서 코플리상을 수상하였다. 나폴레옹 1세의 초청에 의해 1801년 파리에서 열린 성공적인 강연으로 볼타는 백작작위와 함께 롬바르디아 왕국의 원로원 의원 직위를 받았으며 1815년 오스트리아 파도바대학교의 철학부 책임자가 되었다.

이탈리아 물리학자 볼타

미국의 천문학자 톰보, 명왕성 발견

내용시작지난 2006년 수십 년 동안 과학의 상식으로 알려졌던 태양계 행성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태양을 중심으로 총 9개의 행성이 공전하고 있다는 상식은 이제 명왕성을 제외한 8개의 행성으로 고쳐져야 하게 된 것이다. 애리조나 주 플래그스태프의 로웰 천문대에서 1930년 2월 미국의 천문학자 톰보에 의해 발견된 명왕성은 그간 행성의 크기와 공전쾌도에 의해 행성 인정 여부를 놓고 유럽과 미국의 학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거리를 제공해 왔다. 1846년 해왕성이 발견된 이후 주변의 지속적인 행성 탐사활동 중 발견된 명왕성은 반경 1,151km로서 달보다도 작은 크기로서 망원

경으로 봐도 밝기가 14등급을 넘지 않을 정도로 비교적 어둡다. 명칭 공모에 의해 영국 옥스퍼드에 사는 한 소녀 Venetia Burney가 제안한 로마 신화에 나오는 저승신의 이름을 딴 명왕성(Pluto)로 명명 되었으며 지난 76년간 태양계의 한 행성으로서 당당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태양계의 막내 행성으로서 미국인이 발견한 유일한 태양계 행성이기도 한 명왕성은 2006년 8월 국제천문학회에서 제정한 새로운 행성기준안이 통과됨으로써 이제 더 이상 행성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왜소행성으로 분류되어 새로운 분류명칭을 부여받았다.

미국의 천문학자 톰보, 명왕성 발견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

내용시작‘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말은 독일의 철학자 칸트가 ‘대상의 인식은 우리들의 주관 구성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로 표현하면서 쓴 말이다. 기존의 생각이나 이론에 반하는 획기적인 주장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하며 대담한 발상, 관점의 변화로 사고의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와 관련이 있다. 오랜 연구 끝에 지동설을 주장한 16세기 폴란드의 천문학자인 코페르니쿠스는 당시까지 우주의 중심은 지구이며 태양과 별들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으나 우주의 중심은 태양이며 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우주관을 주장하였다. 이는 당시 사회 분위기상 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질만큼 커다란 사건이었다. 동시대 서

구사회는 당시까지의 진리로 여겨졌던 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가 거의 종교적인 교리의 수준에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가 주장한 이 충격적인 이론은 지구가 더 이상 우주의 중심으로서 자리 잡을 수 없으며 이는 곳 지금까지의 모든 종교적 권위와 우주에 대한 철학적인 개념을 원천적으로 뒤집어 버리는 획기적인 혁명이었다. 1520년 프라우엔부르크 대교구장으로 귀임하여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을 만큼 평생을 교인으로서 삶을 살았던 그였지만, 현실에 안주하기 보다는 끊임없는 탐구심과 의문을 풀기위한 노력을 통해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였고, 이는 곳 훗날 새로운 과학의 시대를 여는 기폭제가 되어 과학의 혁명을 가져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

오스트리아 이론물리학자 볼츠만

내용시작‘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인 볼츠만은 열에 관한 연구로 이론 물리학의 한 분야인 통계역학의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근대 물리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다. 1866년 빈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볼츠만은 1870년대 그의 가장 중요한 이론중의 하나인 에너지 교환과 관계된 열역학 제2법칙에 과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열역학 제2법칙의 비가역성을 역학의 입장에

서 해명한 그는 엔트로피 개념을 통계역학적으로 정식화하였으나 그의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의 사후 볼츠만의 원자론은 20세기 초 천재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 의해 증명되었다.

오스트리아 이론물리학자 볼츠만

러시아 유인 우주정거장 미르호 발사

내용시작인류최초의 인공위성, 인류최초의 유인 우주선발사성공 과거 냉전시대 구 소련은 경쟁국인 미국을 앞서 미지의 세계인 우주공간을 선점 하였다. 그러나 1969년 미국의 아폴로11호의 달 착륙으로 인하여 그 위치가 흔들리자 인류최초의 우주정거장 설치하여 이를 만회할 계획을 세웠고 이 계획에 따라 1986년 2월 20일 인류 최초의 우주정거장인 미르호중앙모듈 발사에 성공하였다. 이듬해 부속 모듈의 발사 후 우주공간에서 조립되어 본격적

러시아 유인 우주정거장 미르호 발사

인 연구 활동 공간으로 활용된 미르호는 1990년대 후반까지 지속적인 성능개선과 추가 모듈을 탑재하였고 구 소련의 붕괴 이후 국제협력의 일환으로 활발한 연구 활동들이 이루어졌다. 2001년 3월 인류 최

초의 우주정거장 미르호는 노후된 설비와 러시아의 재정고갈로 인한 천문학적인 비용의 감당이 어려워 15년간의 임무를 마치고 남태평양에 수장되어 폐기되었다. 지구궤도를 8만 8000여 회 돌며 12개국 우주

인 104명이 이곳에서 1만 6500여 건의 과학실험을 하였던 미르호는 국제우주정거장(ISS) 건설 계획의 초석으로 자리 잡으며 인류문명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청진법의 창시자 라에네크

내용시작청진기를 발명한 프랑스 의학자 라에네크(Rene Theophile Hyacinthe Laennec, 1781.2.17~1826.8.13)는 그의 나이 20세에 샤리테 병원학교에 들어가서 나폴레옹의 주치의였던 코르비자르에게 사사하여 정식으로 의학을 수학하였다. 1806년 보종병원의 의사가 되어 병리해부학에 관심을 가지고 그 분야의 문제에 관한 몇 가지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1816년 어린이의 놀이에서 힌트를 얻어 비대한 여성을 진찰할 때 종이를 말아서 관 모양으로 하여 가슴에 대고 청음하였다가

청진기를 발명하였다. 그 후 3년 동안 환자를 청진하여 여러 가지 음을 기록하고 죽은 후의 병형과 대조하여 이러한 음이 어떠한 병에서 나오는가를 알아냈다. 아이들의 놀이에서 힌트를 얻어 청진기를 발명한 그의 일화는 주위의 사소한 것에서 위대한 발명품을 발견할 수 있는 대표적인 발명사례로 전해지고 있다.

청진법의 창시자 라에네크

온라인미술관
프랑스의 화가 메소니에
프랑스의 화가 메소니에

내용시작동시대 가장 인기 있는 화가중의 한사람으로서 마치 사진과 같은 사실적인 그림을 남겼던 메소니에. 그는 주로 군사적 주제 또는 역사적 장면을 배경으로 한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 특히 나폴레옹을 주제로 한 작품들로 많이 알려진 메소니에는 ‘1814년(1864)’, ‘솔페리노의 나폴레옹 3세(1863)’과 같은 대표작들을 남겼다. ‘쥘 포티에’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메소니에는 출판업자를 위한 삽화를 그리며 시간을 보내는 한편 꾸준히 프랑스 살롱전에 출품하여 좋은 평을 받았다.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한 그의 방식은 영감에 의한 그림보다는 문헌 등을 통한 철저한 사전준비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같은 노력은 그를 1840년대 최고의 화가로 만들었고 1855년 나폴레옹 3세에게 그림이 팔리면서 절정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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