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우체국 각 서비스 바로가기 우표포털 본문내용 바로가기 우표포털 하단 바로가기

한국우표포털서비스 K-stamp

  • 우표배움터

    • 우표의역사
    • 즐거운우표수집
  • 우표정보

    • 한국우표
    • 세계우표
  • 우표시장

    • 우표장터
    • 온라인 구매
    • 오프라인 구매
  • 우표문화체험

    • 우표박물관
    • 우표전시회
  • 우표로보는세상

    • 해외우취소식
    • 우편 130년
    • 우표 명작을 말하다
    • 우정이야기
    • 우표수집정보
    • 시간여행
    • 우표디자이너 인터뷰
    • 우표 뒷이야기
    • 대한민국 방방곡곡
    • 우정문화웹툰
  • 어린이 우표세상

    • 우표야놀자
    • 청소년 우표교실
    • 우정문화 동영상
    • 우표배경화면
  • 인기
우표스쿨 우표갤러리 우표 샵 우표박물관 우표로 보는 세상 쥬니어 스탬프

지난 시간여행

인물과 역사를 바로 알고 현재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 봄으로써 선조들의 지혜를 알아 봅시다.

지난 시간여행
제목 시간여행 제151호
등록일 2010. 1. 21.
첨부파일 첨부파일없음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 맥아더
상세정보보기

이주의 이벤트와 시간여행 구독, 추천하기 시간여행 구독하기 사령관으로 임명된 맥아더장군은 1945년 9월 2일 도쿄만 미 해군전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열린 역사적인 항복 조인식에 승전국의 대표로 참석했다. 1945~51년에 일본 점령 연합군 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 일본의 무장해제와 군국주의자들의 제거, 경제복구 등에 힘썼던 그는 1950년 6.25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다시 한 번 전장의 지휘자로 나서게 되었다. UN군 최고사령관으로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 맥아더

내용시작태평양전쟁의 영웅이자 6·25전쟁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맥아더장군(MacArthur, 1880.1.26 ~ 1964). 그는 군인집안에서 태어나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으며 1930년 대장으로 진급, 육군 참모총장을 지내며 육군의 개혁과 더불어 전력증강에 주력하였다. 1937년 퇴역 후 태평양 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미국 극동군사령관으로 다시 복귀한 맥아더장군은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전세를 유리하게 반전시키며 승리로 이끌었다. 1944년 12월 육군 원수로 승진됨과 동시에 이듬해 태평양지역 미군 총

부임한 맥아더장군은 불리한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하여 적진의 한 가운데를 파고드는 인천상륙작전을 과감히 성사시켜 전쟁의 판도를 한 번에 뒤집어 놓았다. 압록강까지 적군을 몰아낸 장군은 중공군이 참전하자 중국본토를 폭격해야한다는 적극적인 공세를 주장하였으나 트루먼 대통령과의 대립으로 1951년 4월 사령관의 지위에서 해임되었다. 귀국 후 맥아더 장군은 상, 하원에서 열린 해임청문회 자리의 연설문에서 ‘노병(老兵)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며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였다.

철도박물관 개관(경기도 의왕시 소재)

내용시작한국의 최초 철도는 1899년 9월 18일 개통된 노량진-제물포 간 철도로서 110여 년의 세월을 우리생활과 밀첩한 인연을 맺으며 발전해 왔다. 지난 2004년에는 바야흐로 고속철도 개통의 시대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철도박물관은 1981년 10월 15일 용산 소재 철도고등학교 실습장에 문을 연 철도기념관을 모태로 하여 1988년 1월 26일 경기도 의왕시(부곡)에 개관되었다. 철도박물관은 철도역사실, 철도차량실, 모형철도 파노라마실 등 구성분야

철도박물관 개관(경기도 의왕시 소재)

별로 전시되어 있으며, 옥외전시장에서는 각종 열차 차량과 보선장비 등을 관람할 수 있다.

사이버 철도박물관 바로가기 :
http://info.korail.com/2005/flash/cyber/cyber_museum.html

철도박물관 개관(경기도 의왕시 소재)

사회
제1회 동계올림픽 개최(프랑스 샤모니)

내용시작근대올림픽의 아버지 쿠베르탱 남작에 의해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1회 올림픽 경기가 열린지 28년 만인 1924년 1월 25일 프랑스에서 첫 동계올림픽이 열렸다. 2월 5일까지 11일간 개최된 이 최초의 동계 올림픽 대회는 16개국에서 258명의 선수가 참가하였다. 1921년

국제올림픽위원회총회에서 결정되어 성사된 동계올림픽은 꾸준한 준비 끝에 남프랑스에 있는 해발고도 1,000 m의 소도시인 샤모니에서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당시 독자적인 동계대회를 개최하던 스칸디나비아반도 국국가들의 반대에 부딪혀 시험대회성격으로 치러진 1회

제1회 동계올림픽 개최(프랑스 샤모니)

제1회 동계올림픽 개최(프랑스 샤모니)

대회는 ‘국제동계올림픽주간(The International Winter Sports Week)’이라는 이름을 걸고 시작되었다. 첫 종합우승은 금메달 4개를 획득한 노르웨이가 차지하였으며 개인성적으로는 노르웨이의 하우그 선

수가 3관왕의 최고 성적을 거두었다.

제1회 국제 관세의 날

내용시작1983년 1월 26일은 제1회 국제 관세의 날이다. 우리나라가 제안하여 1981년 6월 관세 협력 이사회 총회에서 채택된 국제 관세의 날은 세계 무역 증대에 기여하는 관세 행정의 중요성을 일반에게 널리 알리고 국가간의 관세 협력을 촉진하기위한 목적으로 지정된 것이다. 관세 협력 이사회는 관세 제도의 국제적 표준화와 간소화를 통해 세계 무역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1953년 설립되었는데, 현재 우리나라를 포함한 159개국 국가가 가입되어

제1회 국제 관세의 날

있다. 우리나라는 1968년 7월 56번째로 관세 협력 이사회에 가입한 이래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한편, 이를 통하여 국제적 표준 관세 제도를 받아들임으로써 관세 행정의 국제적 표준화를 도모하여 왔다. 현재 수출입 업무에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관세율표는 그 대표적인 예

이다. 특히 1984년 관세 협력 이사회 연차 총회를 서울에서 열도록 유치하는 등 관세 행정 분야에서 선진국으로서의 지위를 다져 가고 있다. 관세 행정이 발전되어 국제 무역을 증진시키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각국간의 적극적인 협력과 이에 종사하는 관

세인의 끊임없는 개선 의지는 물론, 일반 국민의 이해와 협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선 선장 신순성(愼順晟) 출생

내용시작신순성 함장(1878-1944)은 경남 거창후인(居昌後人)으로서 1878년 1월 27일에 출생했다. 한성일어학교(漢城日語學校)에서 일어를 배우고 1895년에 관비유학생(官費留學生)으로 일본에서 2년간 수학하였고, 1897년 9월에 동경상선학교

선(汽船)이 없었다. 때마침 구한국 정부가 해군창설을 목적으로 1902년에 일본으로부터 군함도입을 계획하였고, 1903년 4월 1일 고종황제가 양무함(揚武艦)이라 명명하였다. 신순성은 8월 19일에 양무호의 초대 함장으로 임명되어 인천에

우리나라 최초의 기선 선장 신순성(愼順晟) 출생

東京商船學校)에 입학하여 한국인 최초로 근대식 기선 교육을 받았다. 1901년 8월에 졸업하여 귀국했으나, 그 당시는 승선할 만한 기

서 72명의 승무원을 선발하여 군함으로써 해군 창설에 참여했으나, 아무런 사전 준비 없이 이루어진 군함도입과 해군 창설은 조선 정

임하고, 1919년 인천에 조선총독부 체신국 해원 양성소가 설치되어 관선이 된 광제호가 그 실습선이 될 때 항해학 실습교관을 역임하는 등

우리나라 최초의 기선 선장 신순성(愼順晟) 출생

부의 무능과 무관심으로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같은 시기에 조선정부는 광제호(光濟號)를 일본에서 도입하여 등대 순시 및 세관 감시용으로 운용했는데, 이 배의 유일한 조선인 항해사로 신순성이 승선하기도 했다. 그 후 신순성은 조선우선 소속의 회령환 선장을 역

우리나라 해운사에 크게 기여하였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창립

내용시작유네스코(국제연합 교육과학문화 기구)는 교육, 과학 및 문화를 통하여 국민 간의 이해와 협력을 촉진함으로써 세계 평화와 안전에 공헌함을 목적으로 1945년에 만들어진 유엔(UN) 전문기구 중의 하나이다. 한국은 1950년 6월 14일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열린 제5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유네스코에 가입했고, 유네스코 헌장이 권고하는 대로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설치령(1953년 7월 6일. 대통령령 제801호)

야에서 국내·외 협력을 통해 세계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유네스코 이념과 연구 성과 및 사업 실적을 국내에 소개·보급하는 한편, 국내 학문과 문화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이런 활동을 형태별로 나눠보면, 국가간 연락·자문에 응하는 활동 외에 국제 회의·워크숍· 훈련 과정 개최, 출판 활동, 정보 보급 활동을 하고 있다. 아울러 한국 문화와 전통 그리고 국내 학술 연구 성과를 해외에 소개함으로써 국제 사회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창립

에 따라 1954년 1월 30일 유네스코한국위원회를 설립하여 평화를 향한 세계적인 행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교육·과학·문화·커뮤니케이션·청소년 분

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

한국, 국제전기통신연합(ITU) 가입

내용시작국제전기통신연합(ITU)은 1865년에 설립된 국제전신연합과 1906년에 설립된 국제무선전신연합이 1932년 통합하여 발족한 국제연합의 전문기관으로 현존하는 국제기구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현재 189개 국가가 가입

하고 있으며 스위스의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있다. 국제전기통신연합은 모든 종류의 전기통신의 개선과 합리적인 사용을 위해 국제협력을 유지·증진하고, 전기통신업무의 능률 향상, 이용증대 및 보급의 확대를 위하여 기술적 수단의 발달과

한국, 국제전기통신연합(ITU) 가입

한국, 국제전기통신연합(ITU) 가입

효율적 운용을 목적으로 하는 범세계적인 정부 간 국제기구이다. 우리나라는 1952년 1월 31일 가입하여 제8차 전권위원회의부터 대표단을 파견하기 시작했으며 1989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이사국으로 선정되어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예술적 건축물, 조르주 퐁피두 문화센터

내용시작국립 조르주 퐁피두 예술 문화센터(centre national d’art et de culture Georges-Pompidou)를 줄여 퐁피두센터라 일컫는데, 너비166m, 안길이60m, 높이 42m에 이르는 파리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프랑스의 퐁피두 센터는 거대한 철골 트러스 속에 여러 시설(대규모 공공 도서관, 산업 디자인 센터, 영화박물관, 음악·음향 연구 센터 등)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으며, 설비 배관이 적색과 청색의 원색으로

예술적 건축물, 조르주 퐁피두 문화센터

칠해져 있다. '문화의 공장'이라고 할 수 있는 대담한 이미지와 자유롭게 내부의 변경이 가능한 설계가 파리건축계에 충격을 주었다. ‘퐁피두’라는 명칭은 당시의 프랑스

대통령 조르주 퐁피두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명칭으로, 1977년 1월 31일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이 정식으로 개장했다. 퐁피두 센터를 찾는 견학자의 70%는 문화시

설을 이용하지 않고 건물 내부를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해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정치
미국 32대 대통령 루스벨트 출생

내용시작미국의 4선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30~1945.4.12)는 법률전공 후 변호사 개업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다. 그 후, 민주당 상원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한 그는 1932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자, 지명수락 연설에서 “뉴딜(New Deal)”을 선언하였다. 1929년 이래 몰아닥친 대공황으로 천 수백만에 달하는 실업자를 배출하고 있던 당시 미국의 사정으로서는 뉴딜을 대환영하였고 마침내 H.C.후버를 물

던 국제무역의 불균형을 시정하였고 라틴아메리카 제국(諸國)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선린외교정책(善隣外交政策)을 추진하였으며, 먼로주의를 미국만의 정책으로 삼지 않고 아메리카주(洲) 전체의 외교정책으로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936년 대통령에 재선되었고, 1940년 3선되었으며, 1941년 일본의 진주만(眞珠灣)공격을 계기로 참전하였다. 대서양헌장의 발표를 비롯하여 카사블랑카·카이로·테헤란·얄타 등의 연합국 회의에서 전쟁의

미국 32대 대통령 루스벨트 출생

리치고 당선되었다. 대통령 취임 후에는 강력한 내각을 조직하고 경제공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뉴딜정책을 추진하였다. 외교면에서는 (구)소련의 승인, 필리핀의 독립과 함께 호혜통상법(互惠通商法)을 제정하게 하고 공황의 원인이 되었

결정적 지도권을 장악하여 영국의 총리 W.L.S.처칠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지도적 역할을 다하고 전쟁종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44년 대통령에 4선되고 국제연합 구상을 구체화하는 데 노력하였으나, 1945년 4월 세계대전의 종결을

보지 못하고 뇌출혈로 사망했다.

문화
음악의 신동, 모차르트

내용시작4살 때 건반악기를 다루었으며 5살 때 작곡, 6살 때부터 연주여행 등 수많은 에피소드를 남긴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전무후무한 음악의 신동 모차르트(Mozart, Wolfgang Amadeus, 1756.1.27 ~ 1791). 일찍부터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시기와 찬사를 함께 받았던 그

는 드라마틱한 삶을 살며 수많은 명곡들을 남겼다. 8살 때 이미 교향곡을 작곡하였던 모차르트는 1769년부터 이루어진 이탈리아여행에서 그의 창작에 풍부한 자극이 되는 경험을 하였다. 10대 때 오페라를 작곡하여 상연한 모차르트는 1977년부터 잘츠부르크에 머물면서

음악의 신동, 모차르트

음악의 신동, 모차르트

미사곡과 사교적인 작품에까지 범위를 넓혀갔다. 1985년 개봉한 영화 '아마데우스'에서처럼 그의 아버지에 의해 음악적 재능이 발굴되기는 하였지만 그로 인해 또래의 아이들이 누려야 할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었던 모차르트. 광기어린, 때로는 아이 같은 이 천재 작곡가의 짧은 생에는 그가 남긴 수많은 명곡들과 더 불어 그 어떤 수식어

로도 설명하기 힘들 만큼 음악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가곡의 왕, 슈베르트

내용시작'가곡의 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31~1828.11.19)는 샘솟는 듯한 아름다운 선율에 로맨틱하고도 풍부한 정서를 지닌 이채로운 작곡가로 비유된다. 19세기 독일 낭만파 음악의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인 그는 국민 학교 교장의 4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11세때는 빈 궁정 예배당의 소년 합창단 단원으로서 음악 생활을 시작하였다. 슈베르트는 1813년, 16세부터 그의 아버지를 도와 보조 교원으로 3년간 일한 외에는 아무런 공직도 없이 작곡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동료들과의 생활에서 보헤미안적인 일과를 거듭했다. 가난한 생활 속에서 31세의 짧은 생애였지만 600곡이 넘는 예술 가곡을 비롯하여 교향곡, 피아노곡, 실내악곡 등 많은 유산을 남겼다. 그의 음악은 자연스러우며, 베토벤과 같이 무겁거나 격

가곡의 왕, 슈베르트

하고 장중하지 않다. 기악곡에 있어서는 성악곡과 같은 맛을 볼 수 있는데, 질서 정연한 형식미보다는 자유로움을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생채적인 화성 기법은 낭만주의

음악에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음악은 슈만, 브람스, 볼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과학
미국, 대륙횡단 전화선 개통

내용시작1915년 1월 25일, 미국의 뉴욕-샌프란시스코를 잇는 대륙횡단 전화회선이 개통되었다. 1876년 3월 전선을 통해 음성을 전송하는 장치를 발명한 벨에게 특허를 주면서 시작된 전화의 역사가 거대한 대륙을 하나의 통화권으로 묶는 역사적 순간인 것이다. 미국의 장거리 통신사업은 1893년 보스턴과 시카고 사이에 연결된 도시간의 장거리 회선을 시작으로 수많은 문제점을 보완하며 비약적인 기술발전을 보였다. 장거리통신시 발생하는 신호의

손실을 막기 위한 증폭기(增幅機)가 개발되어 미국 전역의 전화통신망 가설이 가능해지고, 이후 1926년 단파중계에 의한 대양 횡단 통화시설이 도입되었다. 이어 수명이 긴 중계기 개발로 대양 바닥에 케이블을 깔아 통화하는 방법이 가능해짐으로써 1956년 영국에서 미국에 이르는 최초의 대서양 횡단 케이블이 가설되어 전 세계의 단일 통화권 실현의 첫 시발점이 되었다.

독일의 항공기 설계자 하인켈

심해잠수선 ‘배시스케이프’의 제작자, 피카르

내용시작스위스 바젤 출생의 물리학자이자 탐험가인 피카르(Auguste Piccard, 1884. 1. 28~1962. 3. 24)는 미국으로 귀화한 화학자겸 항공기술자인 J.F. 피카르와 쌍둥이형제이다. 그는 취리히대학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하고, 1907년 모교에서, 192

2년부터는 벨기에 브뤼셀대학 물리학 교수로 역임하였다. 대기(大氣)전기와 방사능을 관찰하기 위해1932년 취리히에서 기구(氣球)를 사용, 1만 6200m를 비행하는 등 성층권 연구의 영역을 열었다. 어린시절 해양어류에 만료되었던 그는

심해잠수선 ‘배시스케이프’의 제작자, 피카르

심해잠수선 ‘배시스케이프’의 제작자, 피카르

심해탐사에도 도전하여 1948년 최초의 심해잠수조사선 배시스케이프를 제작, 1960년 아들 잭의 도움으로 약 1만 m의 깊은 바다를 연구하였다.

상자연(box kite) 발명, 항공학의 선구자 하그레이브

내용시작영국의 발명가이자, 항공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하그레이브(Lawrence Hargrave, 1850. 1. 29~1915. 7. 6)는 잉글랜드에서 태어나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하여 1866년 제도공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1872, 1875, 1876년에는 뉴기니 탐사에 참가했고, 1877년에는 시드니 천문대의 보조천문관측자로 정착했다. 1883년 비행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이곳을 떠난 뒤 새와 곤충의 비행을 주의깊게 연구했고 1884~92년에는 단엽기(單葉機) 모형을

상자연(box kite) 발명, 항공학의 선구자 하그레이브

제작하여 이전과 다른 추진법(推進法)으로 실험했다. 1889년에는 압축공기를 이용하는 불안전한 로터터리 기관을 개발했다. 그는 굽은 날개면의 양력(揚力)이 평평한 날개면보다 2배가 됨을 발견한 뒤인 1892년에 연을 이용하여 연구하기 시작해서, 1894년 11월 12일 뉴사우스웨일스의 스탠웰 공원에서 직접 제작한 4개의 상자연을 4.8m의

상공으로 띄웠다. 또한 비행기 모형을 사용하여 수직꼬리부분이 안정성을 증가시킨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1899년에는 잉글랜드를 방문하여 자신의 실험결과를 기술한 논문을 발표했으며, 자신의 모형들도 전시했다. 1903년 그는 중병에 걸려 다른 일을 하게 되면서 그가 제작한 비행기 모형들을 박물관에 기증했다. 상업적인 욕심이 없었던

탓이었는지 그는 그의 발명품을 특허신청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 당시 유럽에 등장한 몇몇 비행기 설계는 외형상 그의 설계로부터 착상을 얻은 듯하다.

금주의 노벨상

[노벨화학상] 벨기에의 화학자 프리고진

[노벨화학상] 벨기에의 화학자 프리고진 내용시작모스크바 태생, 벨기에의 화학자이자 물리학자인 프리고진(Ilya Prigogine, 1917.1.25~2003.5.28)은 브뤼셀대학교를 졸업한 후 1941년 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51년부터 모교 교수를 역임하며, 물리학·화학 연구소장(1959〜) 및 텍사스대학 통계열역학센터 소장(1967〜)을 겸임했다. 비가역과정(非可逆過程)의 열역학을 체계화하고, 산일구조(散逸構造)의 개념을 제출하여 거기서부터의 요동(搖動)을 통한 질서형성을 연구하는 등, 비평형개방계(非平衡開放系)의 물리학·화학을 일관적으로 추구하였다.
비평형 열역학의 기본을 이룬 산일함수를 체계화한 업적으로 1977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다.

[노벨생리/의학상] 신경계질환 공로자 생리학자 에클스

[노벨생리/의학상] 신경계질환 공로자 생리학자 에클스 내용시작호주의 멜버른에서 출생한 에클스(John Carew Eccles, 1903.1.27 ~ 1997)는 멜버른대학교 의학부를 거쳐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신경생리학을 연구하였다. 1937년부터 시드니병원의 카네마추연구소장을 거쳐 호주와 뉴질랜드 대학교의 생리학 교수를 역임한 그는 1963년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에서 연구하면서 중요한 연구적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가 발견한 신경세포에 대한 이온 메커니즘은 신경세포의 말초 및 중추부에 있어서 신경세포가 충격을 전달하거나 차단하는 것에 대한 것으로 인간의 신경계 질환에 대한 의학적 치료와 신장, 심장, 뇌의 기능 연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에클스는 1963년 앨런 호지킨, 앤드루 헉슬리와 함께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노벨생리/의학상] 유전정보의 해독에 중추적 역할, 생화학자 홀리

[노벨생리/의학상] 신경계질환 공로자 생리학자 에클스 내용시작미국의 생화학자인 홀리(Robert William Holley, 1922.1.28~1993.2.11)는 1948~64년 코넬대학교와 코넬의 연방농업실험연구소에서 생화학적 문제들에 대한 다양성을 연구했다. 1955~56년 그는 캘리포니아공과대학에서 J. F. 보너와 함께 1년간 공동으로 연구한 후, 리보핵산(ribonucleic acid/RNA)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1960년경 홀리와 다른 사람들은 운반 RNA(transfer RNA/tRNA)로 알려진 RNA의 작은 분자들이 아미노산을 단백질로 합성하는 데 관여함을 보였다. 홀리와 그의 동료들은 세포 내의 혼합물로부터 여러 가지 종류의 tRNA를 분리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1965년경 그는 아미노산인 알라닌(alanine)을 단백질 분자에 결합시키는 tRNA의 염기서열을 결정했다. 핵산에서 뉴클레오티드의 서열을 최초로 결정한 이 업적은 RNA 분자를 효소로 분해하고 각 조각들을 동정한 다음, 그 조각들이 서로 맞추어지는 방식을 결정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동시에 유전정보(遺傳情報)의 해독(解讀)에 중요한 기여함에 따라 H.G.코라나, M.W.니런버그와 공동으로 1968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이후에 모든 tRNA들은 비슷한 구조를 갖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68년 홀리는 캘리포니아의 라졸라에 있는 솔크 생물학연구소의 펠로가 되었다.

[노벨물리학상] 이슬람국가 출신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살람

[노벨물리학상] 이슬람국가 출신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살람 내용시작파키스탄의 물리학자인 살람(Abdus Salam, 1926.1.29~1996.11.21)은 케임브리지대학 이학부를 거쳐 라호르국립대학에서 공부하고, 1951〜1954년 이 대학 수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1952〜1954년 라호르의 펀자브대학 수학과 주임교수가 되었고, 1954〜1956년 케임브리지대학 강사로 있다가 1957년 런던대학 이공대학 이론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그 후, 파키스탄 원자력 위원회 위원, 파키스탄 과학평의회 회원, 대통령 과학 수석자문관, 국제 순수 및 응용물리학연합(IUPAP) 부회장,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 연구원, 소련 과학아카데미 외국인 회원, 미국 예술·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79년 통일장 이론의 영역에서 전자기력과 소립자간의 약한상호작용과의 통일장이론 형성에 공헌한 업적으로 S.L.글래쇼, S.와인버그와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그의 다양한 경력이 말해주듯, 그는 이슬람 국가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노벨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노벨문학상] “세상에는 오직 하나만의 진리가 ... ” 로맹롤랑

 [노벨문학상] “세상에는 오직 하나만의 진리가 ... ” 로맹롤랑 내용시작프랑스의 대표적인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롤랑(Romain Rolland, 1866.1.29~1944.12.30)은 프랑스 부르고뉴의 클람시에서 출생하여, 어린시절부터 바그너, 베토벤, 리스트에 심취하였으며, 스피노자, 톨스토이, 셰익스티어, 소포클레스를 탐독하며 문학적 자질을 키워갔다. 고등사범학교 미술사 교수, 이어 파리 대학교 음악사 교수가 되었고, 이 무렵부터 극작을 시작해 “성왕루이(1893)”, “아에르트(1898)”, “이성의 승리(1899)”등 3부작을 발표했다. 이후 수 편의 극작과 위인전을 쓴 뒤, '반월수첩'지에 “장 크리스토프, Jean Christophe(10권, 1904〜1912)”를 연재했고, 이 작품으로 1915년에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얻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국제 적십자 전시 포로 정보국'에 근무하며 평화운동에 헌신하고 또 파시즘이 유럽을 휩쓸던 시기에는 반파시즘 운동에 앞장서는 등 실천적 휴머니스트로 현실에도 적극 참여했다. ‘장 크리스토프’ 이외의 작품으로 극작 “이리 떼(1898)”, “당통(1900)”, “사랑과 죽음과의 유희(1925)”등과 소설 “콜라 브뢰뇽(1919)”, “피에르와 뤼스(1920)”, “매혹된 영혼(1922~1933)”등을 주요작품으로 남겼다.

[노벨평화상] 스웨덴정부의 핵보유의지 포기선언을 이끈 뮈르달

 [노벨문학상] “세상에는 오직 하나만의 진리가 ... ” 로맹롤랑 내용시작스웨덴 웁살라에서 출생한 뮈르달(Alva Reimer Myrdal, 1902.1.31~1986.2.1)은 1924년 문학사 학위 취득과 함께, 1974년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K.G.뮈르달과 결혼하였다. 인구, 여성, 육아 문제 등의 전문가로 1934년 첫 저서 '인구 문제의 위기'를 출간한 이래 많은 저서를 내놓았으며, 가정문제 연구 몰두, 여성의 취업기회 보장, 국가아동연금제 실시 등을 요구하였다. 1949~1950년 유엔의 사회국장, 1955년 스웨덴 최초의 여성대사가 되어 인도·미얀마·스리랑카 등지에서 6년간 외교관 생활을 하였다. 세계 최초의 군축장관이 되어 1968년 스웨덴 정부가 핵보유 의지 포기선언을 공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공로를 인정받아 알폰소 가르시아 로블레스와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노벨상 이외에도 1970년 서독 평화상(남편 군나르와 공동수상), 1980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평화상, 1981년 자와할랄 네루 상을 각각 수상하였다.

온라인미술관
이탈리아 화가, 벨로토 출생
이탈리아 화가, 벨로토 출생

이탈리아 화가, 벨로토 출생

내용시작이탈리아 화가 벨로토(Bellotto, Bernardo, 1720.1.30~1780.10.17)는 북이탈리아 각지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1747년 드레스덴에서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의 궁정화가가 되고, 1770년에는 폴란드 스타니스와프 2세의 궁정화가가 되어 그 뒤 바르샤바에서 살았다. 주요작품으로는 드레스덴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드레스덴의 풍경'(1757)과 폴란드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바르샤바의 풍경'(1768) 등이 있다.

독자 여러분의 투고를 기다립니다. 원고보내주실 곳 : kstamp@kstamp.go.kr
지난 시간여행 이전글 다음글 보기
이전글 시간여행 제150호
다음글 시간여행 제152호(3)

기 발행된 모든 우표류(우표, 엽서, 원화, 우표책, 우표첩, 날짜도장)의 이미지 및 내용을 사용할 수 있으나, 이미지와 내용을 변경하여 사용시에는 우정사업본부의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