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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여행

인물과 역사를 바로 알고 현재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 봄으로써 선조들의 지혜를 알아 봅시다.

지난 시간여행
제목 시간여행 제149호
등록일 2010. 1. 7.
첨부파일 첨부파일없음

이봉창의사 도쿄 의거 상세정보보기

이주의 이벤트와 시간여행 구독, 추천하기 시간여행 구독하기 내용시작에밀레종 또는 봉덕사종으로도 불리는 우리 나라 최대의 종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이 신라 혜공왕 때인 771년 1월 13일 완성됐다. 원래 35대 경덕왕이 제작하기 시작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 혜공왕이 구리 27톤을 들여 사업을 마쳤다. 원래 봉덕사에 걸었던 것을 1460년 영묘사에 옮겼다가 홍수로 절이 떠내려가고 종만 남았다고 한다. 1915년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고 1962년 국보 제29호로 지정됐다.

부처님 오신 날(석가탄신일)을 공휴일로 지정 비하인드 스토리

내용시작불교신자였던 용태영 변호사는 1973년 3월 총무처장관을 상대로 서울고법에 석가탄신일 공휴권 확인 등을 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즉 기독교의 성탄일인 12월 25일이 공휴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부처님 오신 날(석가탄신일)인 4월 8일도 공휴권(公休權)이 있음을 확인하고 이를 공휴일로 지정 공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부처님오신 날(석가탄신일)을 공휴일로 지정할 수 없다면 성탄절의 공

휴일 지정을 무효화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서울고법은 1974년 10월 “원고는 성탄절이 공휴일로 지정됨으로 말미암아 어떠한 권리나 법률상 이익이 침해 당하였다고 볼 수 없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부적법하다고 판결 각하해버렸다. 그러나 용태영 변호사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대법원에 상고했고, 대법원에 계류 중인 1975년 1월 15일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부처님오신 날(석가탄신일, 음력 4월 8일)'을 법정공

부처님 오신 날(석가탄신일)을 공휴일로 지정 비하인드 스토리

부처님 오신 날(석가탄신일)을 공휴일로 지정 비하인드 스토리

휴일로 지정 공포하였던 것이다. 국제연합(UN)에서는 1998년 스리랑카에서 개최된 세계불교도대회의 안건이 받아들여져, 양력 5월 중 보름달이 뜬 날을 석가탄신일로 정해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사회
담배의 심각성 토로

내용시작1964년 1월, 흡연의 유해성에 관한 최초 보고서 '흡연과 건강에 관한 공중보건국 보고서'(Surgeon General's Report on Smoking and Health)가 발표되었다. 미국 공중보건국 장관이 발표한 이 보고서는 그동안 꾸준하게 진행되어온 인간에게 흡연이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의 결과로서 그 심각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흡연이 인간의 폐에 끼치는 치명적인 영향과 더불어 오늘날 암환자 중 가장 많은 사망결과를 보여주는 폐암에 대

담배의 심각성 토로

한 경고이기도 하였다. 500여년 전 콜럼버스에 의해 담배가 전해진 후 가장 끊기 힘든 인간의 습관중 하나가 된 흡연은 최근 청소년에 대한 사회문제로 대두될 만큼 심각한 병폐를 낳고 있다. 이날 발표된 이

공식 보고서를 계기로 흡연을 억제하기위한 여러 정책들이 시행되었으며 이후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 곳곳에 금연열풍을 일으키는 밑거름으로 작용하였다.

캐나나 출생, 백만장자 실업가 스티븐슨

내용시작캐나다 출생의 백만장자 실업가이자 영국 정보부의 수장으로 활약했던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인 스티븐슨(William Stevenson, 1896.1.11 ~ 1989). 목재소를 경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캐나다 공병단과 영국비행단 프랑스 주둔군으로 군생활을 하였다. 1차 대전 직후 스티븐슨은 제조업과 건축업에 진출해 많은 돈을 벌었다. 뛰어난 사업가 기질을 지닌 그는 1930년대 독일의 군비증강과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얻어 영국 정보부에 제공하였다. 이를 계기로 정보부와 인연을 맺은 스티븐슨은 1940년대 정보원의 훈련을 비롯하여 영국정보부의 해외 비밀기지의 설립 등 왕성한 첩보 활동을 하였다. 스티븐슨은 특히 막대한 자신의 부를 이용하여

캐나나 출생, 백만장자 실업가 스티븐슨

정보활동 분야에 상당한 자금을 조달하였으며 그의 활동으로 인해 제 2차대전 기간 동안 영국 정보부의 역량 강화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

다.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다시 사업가 로 돌아왔으며 영국정부는 그에게 1945년 기사작위를 수여하였다.

가난한 아이들의 아버지, 페스탈로치

내용시작가난한 아이들의 아버지이며 혁신적인 교육방식을 도입해 체계적인 방법을 제시했던 페스탈로치(Johann Heinrich Pestalozzi, 1746.1.12~1827.2.17). 오늘날 기초 교육의 모태가 되는 그의 교육철학은 프뢰벨, 헤르바르트, 카를 리터 같은 교육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그들로 하여금 현대 교육학의 기초를 세우는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루소의 교육 사상에 영향을 받은 페스탈로치는 자신의 이상적

가난한 아이들의 아버지, 페스탈로치

인 교육이념을 완성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자연주의적인 사상을 밑바탕으로 근본적인 인간의 행복은 자정의 안정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특히 아이들

의 초기 교육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하였다. 1805년부터 그가 머물렀던 스위스 뇌샤텔 근처의 이베르동 학교는 그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성공적인 모델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교육연구가들의 모범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최초의 한인 이민선 갤릭호 하와이 호놀룰루 도착

내용시작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1903년 1월 13일 이른 새벽, 한국 이민 선구자들이 미국상선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 호놀룰루 제2부두에 첫발을 내디딤으로써 꿈의 실현과 고난으로 점철된 한인 미국 이민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이민 초기 한인층의 직업은 다양하게 구성되었으나, 대부분의 이민생활은 고난에 찬 노동자로서의 생활로 시작되었다. 고된 노력과 역경을 함께 극복해 나간 이들의 노력과 희생은 주권을 상실한 조국의 광복을 위한

최초의 한인 이민선 갤릭호 하와이 호놀룰루 도착

기반이 되었고, 이후 교포사회는 판사, 변호사, 교수, 의사, 엔지니어, 조종사, 교사, 언론인, 기업인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꾸준히 배출해 내는 자랑스러운 민족으로 성장하였다. 급변하고 있는 세계정세 속에서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한인사회가 튼실한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은 한인사회 스스로 한민

족의 역사와 전통을 당당히 자랑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자신감은 한인사회의 경제적인 성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한국인이자 미국인으로서, 더 나아가 세계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할 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미국에 살고 있는 200만 한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뿌

리를 내리고 있는 모든 한인들이 세계 속의 한민족공동체라는 자각 아래 당당한 한국인, 세계인으로서 다른 민족과 화합하고 그들의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며 세계와 함께 성장해 나갈 것을 기대해 본다.

국전을 대한민국미술대전으로 개편

내용시작1949년부터 1981년까지 30회를 열었던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국전) 1982년 1월 16일 제도를 개편하면서 기성작가전과 분리하여 순수한 작가 발굴 및 육성을 위하여 실시하였다. 초기에는 반관반민(半官半民) 형태로 운영되다가 이후 한국미술협회가 주관하였고, 1986 년부터는 기존 국전의 10개 부문 중에서 사진과 건축 부문은 각 해당협회가 독자적으로 운영하도록 이관하였으며, 동양화·서양화 및 조각의 구상 ·추상 구분을 폐지, 통

국전을 대한민국미술대전으로 개편

합하였다. 전시회는 봄과 가을로 나누어 개최되는데, 봄에는 서예(사군자 포함)·공예 부문, 가을에는 회화 1(한국화, 조각) 및 회화 2(양화) 부문으로 구분하여 열린다. 특

징은 회화를 동양화·서양화로 구분했던 것을 공식적으로 한국화 및 양화로 개칭한 것과 민간단체에서 주관하는 순수한 작가 발굴을 위한 미술대전이라는 점에 있다. 한국

최대 규모의 신인미술작가 등용문으로 국전의 맥을 잇고 있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 - 무하마드 알리

내용시작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 1942년 1월 17일 ~ )는 1942년 '캐시어스 클레이' 라는 이름으로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태어났다. 지독하게 인종차별이 심했던 것으로 알려지는 켄터키주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알리는 60년 로마올림픽에서 라이트헤비급 금메달을 획득하였고, 같은 해 60년 10월 프로로 전향하였다. 그 후, 1964년 미국 S.리스튼으로부터 세계

트콩에게 아무 감정이 없다."며 월남전 참전 징집을 거부, 선수자격이 박탈되고 챔피언벨트도 빼앗겼다. 71년 링으로 돌아온 알리는 조 프레이저에게 타이틀을 도전하나 실패하고 다시 74년 10월 프로복싱아 3번째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다. 그 후 79년 6월 은퇴성명을 발표하였으나, 1980년 그의 스파링 파트너였던 래리홈즈에게 KO로 패하며 링과의 이별을 고했다. 알리의 상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 - 무하마드 알리

헤비급 타이틀을 빼앗은 뒤, 이슬람교에 입교하고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하였다. 64년 소니 리스턴을 KO로 잡고 챔피언이 된 알리는 9차 방어 성공 후 67년 "나는 베

대의 혼을 빼앗는 연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나비처럼 날아벌처럼 쏜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알리 이후 그의 복싱스타일을 흉내내는 선수들이 많았으나 홈즈

만이 제대로 따라했을 뿐이다. 통산전적은 61전56승(37KO)5패를 남겼다. 데뷔 때부터 갖은 기행을 일삼은 알리는 세계프로복싱계의 스타일을 바꾸어 놓았을 뿐만아니라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 - 무하마드 알리

100년복싱역사상 최고의 복서로 칭송받고 있다. 흑인 이슬람교도로 에 노력하였던 그는 80년대부터 심한 후유증으로 생긴 파킨슨병으로 고통받고 있으나 여전히 '영웅'시 되고 있다.

문화
아동문학의 아버지, 프랑스의 비평가겸 동화작가 페로

내용시작1697년 발간된 한권의 동화집은 오늘날 전 세계 수많은 버전들로 양산되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동화집이 되었다.
프랑스 시인이자 비평가, 동화작가인 페로(Charles Perrault, 1628.1.12~1703.5.15)에 의해 쓰여진 ‘거위 아주머니 이야기’라는 이 동화집은 그를 17세기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작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 동화집에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신데렐라’를 비롯하여 빨간모자, 장화신은 고양이,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 모두8가지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1670년 아카데미프랑세즈 회원이 되어, ‘루이 대왕(大王)의 세기(1687)’라는 시를 통해 격렬한 신구논쟁의 불씨를 지펴 진보파를 대표하는 비평가로서도 이름을 높이기도 하였던 페로는 동시대 최고의 상상력이 동원된 이 동화집으로 인해 훗날 프랑스 아동문학의 아버지라고

아동문학의 아버지, 프랑스의 비평가겸 동화작가 페로

까지 불리게 되었다.

아동문학의 아버지, 프랑스의 비평가겸 동화작가 페로

연속만화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미국의 풍자만화가 아웃콜드

내용시작'옐로 키드, Yellow Kid'를 통해 창작연속만화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연속 풍자만화가 아웃콜드(Richard Felton Outcault, 1863. 1. 14~1928. 9. 25)는 오하이오의 신시내티와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한 뒤 1880년대초에 발간된 유머 잡지'저

의 개구쟁이 소년의 그림이 뽑혔다. 밝은 노란색 옷을 입고 있는 그 소년은 널리 인기를 끌었으며 '옐로 키드'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부터 그 소년이 입고 있는 잠옷에는 의미있는 속어가 씌어 있었다. 아웃콜트가 그해 말에 [뉴욕

연속만화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미국의 풍자만화가 아웃콜드

지, Judge', '라이프, Life'에 원고를 기고했다. 1885년에 이르러서는 조지프 풀리처가 1883년에 사들여 활기를 되찾은 [뉴욕 월드, New York World]에 빈민가의 삶을 다룬 풍자만화를 그렸다. 1896년 2월 16일 [뉴욕 월드]가 실시한 컬러 작품 심사에서 그가 그린 잠옷 차림

월드]를 그만두자 의 소유주인 윌리엄 랜돌프허스트가 그를 고용했다. 경매에서 그 그림의 소유권을 놓고 풀리처와 허스트 사이에 경쟁이 붙었으나 결국 풀리처가 포기하고 조지 룩스를 고용해 '옐로 키드'를 그리게 했다. 아웃콜트의 고용을 놓고 벌어진 신문 전쟁과 야

바위로 인해서, 그뒤 세상을 놀라게 하거나 무도한 출판업에는 ' 옐로 저널리즘'이라는 표현이 붙게 되었다. '옐로 키드'의 성공은 다른 많은 연속만화 창작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 화가, 모리조

내용시작프랑스의 화가로 집 안팎의 가정적 정경이나 정물화를 자유롭고 경쾌한 필치로 그려, 섬세하고 감미로운 감각을 나타내었던 프랑스의 화가 모리조(Berthe Morisot, 1841. 1. 14~1895. 3. 2)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하여 J.B.C.코로의 지도를 받았으나, 마네를 알게 되면서 인상파 화가들과 교제하였으며, 1874년에 시작된 인상파 그룹전(展)에 처음부터 참가하였다. 그 후 1886년의 제8회전까지, 제4회전(1

프랑스 화가, 모리조

879)을 빼고 매회 출품하였다. 1874년, 마네의 동생 우젠과 결혼하였

으며, '발콩', '휴식'등에서 자주 마네의 작품모델이 되었다. 모리조의

작품은 코로의 감화를 받은 초기의 풍경화로부터 차차 인상파의 밝은

프랑스 화가, 모리조

색조로 바뀌어갔으며, 집 안팎의 가정적 정경이나 정물화를 자유롭고 경쾌한 필치로 그려, 섬세하고 감미로운 감각을 나타내었다.
수채화에도 뛰어나서 유화 못지않은 경쾌하고 멋있는 가작들을 남겼다.

20세기 초, 뛰어난 소설가 미크사트

내용시작당대와 후세 작가들에게 20세기 초의 뛰어난 소설가로 인정받는 헝가리의 소설가 미크사트(Kalman Mikszath, 1847. 1. 16~1910. 5. 28)는 법률을 공부하여 의회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으나 곧 저널리스트가 되었다. 2편의 단편집 '슬로바키아 친척, (1881)'과 '착한 팔로치 (1882)'로 성 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1894년에 헝가리의 괴짜 귀족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첫번째 장편소설 '베스테르체 포위전, Beszterce ostroma'을 발표했다. 그

20세기 초, 뛰어난 소설가 미크사트

의 초기 작품은 낭만주의 색채를 띠고 있으나, 19세기말부터 사실주의로 기울었고 사회의 부조리를 예리하고 재치있는 풍자로 주저없이

꼬집었지만 대체로 동정심과 이해심을 갖고서 일상의 삶을 묘사했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이상한 결혼,(1900)', '노스티의 소년과 메리

토트, (1908)' 같은 본격적 소설 창작에 성공했다.

과학
내연기관 발명가, 기계기술자 르누아르

내용시작오늘날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교통수단의 동력원인 내연기관은 프랑스의 발명가 르누아르(Lenoir, Etienne, 1822.1.12-1900)에 의해 최초로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보편화 되기 시작하였다. 2행정 복동식 증기기관인 그의 발명품은 비록 에너지 효율은 떨어졌지만 강한 내구성에 의해 오랜기간 사용하여도 문제가 없을 만큼 우수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주로 작은 동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에 사용되었지만 1862년 개량된 그의 내연기관은 자동차에 장착되어 3시간동안 10km를 주행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내연기관 발명가, 기계기술자 르누아르

마운틴 고릴라에 대한 세계적 권위자, 여성 동물학자 포시

내용시작마운틴 고릴라(mountain gorilla)에 관한 세계적 권위자인 미국의 동물학자 포시(Fossey, Dian, 1932.1.16~1985.12.26)는 1954년에 새너제이주립대학교를 졸업하고 켄터키 주 루이빌의 아동병원에서 몇 년 동안 직업요법의사로 일했다. 1963년에 동부 아프리카를 여행했는데, 그곳에서 인류학자 루이스 리키를 만났으며 마운틴 고릴라를 처음 보게 되었다. 여행을 마치고 그녀는 미국으로 돌아왔으나, 1966년 리키의 권유로 아프리카에 가 마운틴고릴라의 자연 서식지에서 이 고릴라를 장기간 연구하게 되었다. 이 연구를 위해 포시는 1967년 카리소케 연구 센터(Karisoke Research Centre)를 세웠으며, 멸종 위기에 처했던 마운틴 고릴라의 마지막 서식지 중 하나였던 르완다 비룽가 산맥에서 은자(隱者) 같은 생활을 했다. 그녀가 모은 자료는 고릴라의 습성·의사소통, 사회구조에 대한 당시의 지식을 크게 발전

마운틴 고릴라에 대한 세계적 권위자, 여성 동물학자 포시

시켰다. 포시는 자신의 관찰을 잡지 기고문들과 ‘안개 속의 고릴라, Gorillas in the Mist(1983)’를 통해 상세히 기술했다. 1974년에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동물학박사학위

를 받았으며, 그후 뉴욕의 코넬대학교에서 강의하면서 동시에 카리소케 연구 센터에도 계속 관여했다. 포시는 비룽가고릴라를 밀렵꾼과 근처의 농부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계속해서 강력한 조치를 취했으며, 1985년 자신의 야영지에서 살해되었다.

독일의 식물학자겸 내과의사 푹스

내용시작식물의 체계적인 소개, 정확한 삽화와 묘사, 상세한 용어해설로 박물학 발전에 시금석을 이룩한 식물학 관련 도서인 '식물사, Historia Stirpium(1542)'를 저술한 독일의 식물학자겸 내과의사 푹스(Leonhard Fuchs, 1501. 1. 17~1566. 5. 10). 그는 가톨릭 정신에 입각한 인도주의적 교육을 받았지만 나중에 개신교로 개종했다. 의학을 공부하여 튀빙겐대학교의 교수가 된 그는 식물의 약용성질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저서는 주로 식물 수집에 관한 지침서로 작성되었다.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에 능통했으며 훌륭한 관찰자였던 그는 식물들을 정확하게 기술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름다운 식물 목판화는 정확

독일의 식물학자겸 내과의사 푹스

한 삽화를 가지고 식물을 설명하는 전통을 확립했다. 그는 식물을 알파벳 순서에 따라 소개했으며 각각에 대해 형태와 서식지, 최상의 채

집시기, 그리고 그가 식물의 성질과 힘이라고 불렀던 것들을 설명했다. 그는 식물의 힘에 대해서만은 고대의 이론을 참고로 했다. 그를

기념하기 위해 꽃피는 식물의 한 속(屬)을 푸크시아속(Fuchsia)으로 이름 붙였다.

세계최초, 원자력 잠사함 노틸러스호 시운전

내용시작원래 노틸러스란 영어로 ‘앵무조개’를 뜻하는데, 옛날부터 잠수함의 이름으로 쓰여 왔다. 최초의 노틸러스호는 1800년 미국의 공학자 R.풀턴이 프랑스에서 건조한 잠수함정으로서, 목조 위에 철판을 깔고 잠항 중에는 수동식 스크루로 추진하였다. 그 후 1886년 영국인 A.캠벌과 J.애시가 축전지를 사용하여 전동기에 동력을 공급하는 전동잠수함 노틸러스호를 건조하였

세계최초, 원자력 잠사함 노틸러스호 시운전

다. 특히 이 잠수함은 수중에서는 축전지로, 수면에서는 내연기관으로 동력을 공급하는 잠수함의 효시였다. 그 후 미국 해군이 건조한 역사상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이 등장하였다. 이 잠수함은 1952년 6월 기

공하여 1954년 1월 진수, 1955년 1월 17일 원자력에 의한 항행을 개시하였다. 1958년 8월 W.R.앤더슨을 함장으로 하여 극점에 도달, 북극해의 잠항(潛航) 횡단기록을 세웠다. 1980년 항해임무를 마친 후,

1985년부터 코네티컷주(州) 뉴런던에 있는 ‘미군함 노틸러스호 기념 및 잠수함박물관(Nautilus Memorial and Submarine Force Museum)’에 전시되어 있다.

금주의 노벨상

[노벨물리학상] 독일의 물리학자 빈

독일의 물리학자 빈 내용시작괴팅겐, 하이델베르크, 베를린 대학교 등지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빈(Wien, Wilhelm, 1864.1.13~1928)은 국립물리공업연구소의 소장이었던 헬름홀츠의 조수로서 연구생활을 시작하였다. 주로 열복사(熱輻射)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던 그는 당시까지 전혀 시도되지 않았던 새로운 방식의 이론적용을 통해 훗날 빈의 변위법칙으로 불리는 복사의 변위법칙(變位法則)을 이끌어 내었다.
또한 그는 흑체복사(黑體輻射) 실험에 착수하여 훗날 플랑크로 하여금 양자가설(量子假說)을 세우는데 기초가 되는 흑체에서 방출하는 복사에 관한 변위법칙을 공식화하여 이공로를 인정받아 1911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노벨평화상] 아프라키 밀림의 성자, 슈바이처

아프라키 밀림의 성자, 슈바이처 내용시작‘아프리카 밀림의 성자’로 불리는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14~1965.9.4)는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학자로서 음악가로서의 안정된 미래를 버리고 진정한 인류애를 몸소 실천한 사람이다. '우리는 모두 한데 모여 북적대며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고독해서 죽어 가고 있다....'는 자신의 말처럼 아흔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난과 질병 속에 있는 아프리카 흑인들을 구제하기 위해 의료 활동을 하며 진심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세계의 위인, 인도(人道)의 전사, 원시림의 성자로 불리기도 하는 그는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훗날 바흐에 대한 그의 연구는 유명하며 오르간의 결점을 보완한 연구로 오르간 개량에 있어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아프리카 흑인들의 어려움을 전해들은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청해서 의학공부를 하였다. 공부를 마치고 아프리카로 건너간 그는 갖은 고난과 몇 차례의 위기를 극복하고 병원운영에 성공하였고 이후 사망할 때까

아프라키 밀림의 성자, 슈바이처지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1952년 그의 인도주의적인 봉사정신을 기려 노벨평화상이 수여되었으나 그는 그 상금까지도 모두 나환자촌(癩患者村)을 세우는데 사용하였다. 1965년 전 세계인의 애도 속에 조용히 생을 마감하였다.

[노벨평화상] 스웨덴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쇠데르블롬

스웨덴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쇠데르블롬 내용시작스웨덴의 신학자 쇠데르블롬(Nathan Soderblom, 1866.1.15~1931.7.18)은 1893년 목사의 자격을 얻어 종교인으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한 그는 1894년 파리의 스웨덴인 교회에서 목사로서 일을 하였다.
스웨덴과 독일에서 종교사 및 종교철학 교수를 지낸 그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마나, 애니미즘, 기인자(起因者) 신앙의 3요소의 복합으로 정의한 중요한 학문상 업적을 남겼다. 1914년 웁살라의 교회 감독을 맡은 그는 상징적이고 학문적인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생활의 일부분으로서 노동과 실천을 중시하는 운동인 범세계적인 교회일치 운동을 벌여 교회통합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산물로서 1925년 스톡홀름 교회회의를 성립시켰으며 그 공적을 인정받아 193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노벨평화상] 오늘도 내일도 어려움은 첩첩이 쌓여 있으나... 나는 꿈이 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어려움은 첩첩이 쌓여 있으나... 나는 꿈이 있습니다! 내용시작미국의 침례교회 목사이자 흑인해방 운동가였던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15~1968.4.4) 목사는 비폭력 저항과 인종차별 철폐 및 식민지 해방과 사해동포론(四海同胞論) 등을 주창한 간디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아 비폭력주의에 입각한 '공민권 운동'의 지도자로 활약하며 미국의 흑인해방운동에 앞장선 장본인이다.
'자유를 향한 위대한 행진(1958)', '우리 흑인은 왜 기다릴 수 없는가, Why We Can’t Wait(1964)', '흑인이 가는 길(1967)'등의 저서를 남기기도 하였다. 루터 킹은 1963년 8월 29일 인종차별에 반대하며 공민권운동을 주창하며 그의 지지자들과 함께 워싱턴 대행진을 펼쳤다. 수십만 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그는 "I have a dream!"이라는 연설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오늘도 내일도 어려움은 첩첩이 쌓여 있습 니다. 그러나 나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미시시피 주 까지도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로 변하리라고. 나

아프라키 밀림의 성자, 슈바이처 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4 남매가 피부의 색깔로가 아니라 인격의 내용으로 판단되는 나라에 살게 될 거라고. 나는 꿈이 있습니다. 남쪽 앨러바마 주에서도 검고 흰 아이들의 손이 정답게 뭉쳐지리라고. 이 꿈만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망의 동산에서 희망의 반석을 캐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꿈만 놓치지 않는다면 미국내에 꽉 차 있는 불협화음을 형제애의 아름다운 심포니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 1964년 흑인인권 신장의 공로로 노벨평화상 수상하였으며, 1968년 4월 테네시주(州)의 멤피스시(市)에서 흑인 청소부의 파업을 지원하다가 백인에 의해 암살당함으로써 미국의 젊은 흑인인권 운동가는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온라인미술관
마니에리스모 양식을 정착한 이탈리아 화가, 파르미자니노
마니에리스모 양식을 정착한 이탈리아 화가, 파르미자니노

마니에리스모 양식을 정착한 이탈리아 화가, 파르미자니노

내용시작독특하고 세련된 마니에리스모 양식을 개발해 르네상스 이후 세대를 형성하는 밑거름이 된 이탈리아의 화가 파르미자니노(Parmigianino, 1503.1.11 ~ 1540.8.24)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숙부에게 교육 받으며 자랐다. 르네상스시대의 거장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그는 동시대 상상하기 어려운 독특한 화풍의 환상적인 그림들을 많이 남겼다. 가장 잘 알려진 초상화가 중 한 사람이기도 하였던 그는 많은 자화상과 함께 ‘잔 갈레아초 산비탈레(Gian Galeazzo Sanvitale)’, ‘안테아 (Antea)’ 등 아름답고 젊은 여성을 주제로 한 뛰어난 초상화를 다수 남겼다.
또한 그는 뛰어난 기교와 화려한 작품들을 통하여 르네상스 말기인 1520년대부터 바로크 양식이 시작된 1590년경까지 이탈리아에서 성행했던 미술양식인 마니에리스모 양식을 정착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 마니에리스모 양식 : 르네상스양식으로부터 바로크양식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유행한 특정의 미술양식을 지칭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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