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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여행

인물과 역사를 바로 알고 현재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 봄으로써 선조들의 지혜를 알아 봅시다.

지난 시간여행
제목 시간여행 제148호
등록일 2009. 12. 31.
첨부파일 첨부파일없음

이봉창의사 도쿄 의거 상세정보보기

이주의 이벤트와 시간여행 구독, 추천하기 침체에 빠져있던 우리 임시정부는 1932년 1월 8일 일본육군관병식(日本陸軍觀兵式)에 참석하러 가던 히로히토 일본왕의 무리에 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의사의 의거로 새로운 활력소를 얻게 되었으며 전 세계에 한민족의 용기 있는 민족적 역량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에 있었던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와 더불어 어려울 때마다 나라와

내용시작'제 나이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 앞으로 저는 서른 한살을 더 산다고 해도 지금까지 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 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하이에 왔습니다.' 이

봉창의사가 김구선생께 토로한 이 말은 우리들이 가슴 깊이 새겨야할 금언이라 할 수 있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營圈)'이란 미명(美名) 아래 동양평화를 유린하고 있던 일본 제국주의는 한, 중 갈등을 야기하여 중국정부로 하여금 상하이에 있던 우리나라 임시정부활동에 제약을 가해왔다. 이로 인하여

민족을 위하여 바친 선열들의 숭고한 회생정신은, 오늘날 일부 사회계층에 만연되어있는 개인주의와 집단이기주의에 경종을 울려주고 있으며, 세계 곳곳에서 추진되고 있는 블록경제체제의 구축에 따른 총체적 어려움을 극복해야 할 우리의 나아갈 길을 밝혀주고 있다.

사회
독일의 고고학자 슐리만

내용시작독일의 고고학자 슐리만(Schliemann, Heinrich, 1822.1.6~1890.12.26)은 그리스와 터키에서 고대 트로이·미케네·티린스 문명 유적지를 발굴한 독일 태생의 고고학자이다. 인디고 무역과 군수사업으로 재산을 모은 후 1850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민권을 얻었다. 36세에 사업에서 은퇴한 그는 어려서부터 꿈꿔왔던 고고학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호메로스 시(詩)에 등장하는 트로이가 실존했음을 증명하기 위해 애썼으며,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고대문명 연구에 몰두했다. 1870년부터 그는 총 4차례에 걸쳐 터키의 히사를리크 유적지를 발굴해 그곳이 고대 트로이 유적임을 입증했다. 1876~85년에는 그리스에서 미케네, 이타카, 오르코메노스, 티린스 등의 유적지를 발굴했다. 그는 발굴 결과를 여러 권의 책으로도 남겨 고고학을 대중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독일의 고고학자 슐리만

미국 철강왕, 카네기 재단 설립

내용시작"나는 정신적 삶을 고양시키는 일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그것은 사회와 나누는 일이다. 재산을 안고 죽는 사람은 천국에서 명패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 앤드류 카네기 미국의 산업자본가로 “철강왕”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1.25〜1919.8.11)는 1901년 1월 4일 매각대금을 모두 털어서 카네기재단을 세웠다. 그는 1902년 워싱턴카네기협회를 시작으로 카네기홀, 카네기멜론대 등 20여 개의 자선 및 교육 및 문화사업을 벌이면서 18년 여생을 살았다. 카네기재단은 직접 지원보다는 빈자들에게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방식을 택했다. 음식을 나눠주기보다는 비료를 제공하고 도서관을 지어주는 식이었다. 그는 “자선은 자비가 아니다”라는 철학에 충실했다. 카네

기의 자선활동은 부를 이룬 노력을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기에 가능했다. 카네기나 존 D 록펠러 등 당시 이름난 자선활동가들은 산업독점에 대한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미국 산업화의 일등 공신이라는 사회적 존경을 한 몸에 받는 기업가들이었다. 카네기재단(Carnegie Trust)은 크게 뉴욕카네기재단(Carnegie Corporation of New York - 미국인 및 영국연방 주민 간의 지식보급과 이해의 증진을 목적으로 함)과 워싱턴 카네기 협회(Carnegie Institution of Washington - 조사, 연구, 발견 등 인류의 복지향상을 위한 지식의 응용을 장려할 목적으로 주로 자연과학 분야를 원조), 카네기 교육진흥재단(Carnegie Foundation for the Advancement of Teaching - 교육진흥을 목적)으로 나뉜다.

미국 철강왕, 카네기 재단 설립

정치
카이사르 루비콘강을 건너다

내용시작“주사위는 던져졌다” 갈리아의 총독 카이사르(Caesar, Julius, BC.100~BC.44)는 이 유명한 말을 남기고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입성하였다. 로마 공화정 시기 삼두정치의 균형이 무너진 로마는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당시 갈리아 총독으로 있던 카이사르는 성공적인 정복전쟁의 결과 로마인들에게 전폭적인 지지와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이러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에게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이에 폼페이우스는 로마의 오랜 전통에 따라 부속영토의 총독이 로마에 돌아올 때 자신의 군대를 로마 밖에

두고 와야 한다는 것을 이용하여 카이사르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카이사르의 갈리아총독 임기의 연장을 거부한 원로원은 그를 로마로 돌아오게 하였고, 자신의 암살계획을 미리 알았던 카이사르는 로마와 갈리아의 경계인 루비콘 강가에서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고민 끝에 개혁의 길을 선택한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대와 함께 루비콘강을 건넜고 결국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이때 남긴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과 함께 ‘루비콘강을 건넜다’는 고사는 오늘날 중대한 결단을 뜻하는 말로써 자주 사용되고 있다.

카이사르 루비콘강을 건너다

아이젠하워 독트린

내용시작알래스카(Alaska)는 1741년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에게 고용된 덴마크인 베링이 발견한 뒤, 러시아 모피상인이 서서히 이주해 왔으며, 18세기 말에는 러시아-아메리카회사가 모피무역을 독점하고 싯카를 건설하여 19세기 초에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영국의 알래스카 강점을 두려워한 러시아는 미국과 매각교섭을 하여 1867년 미국의 스워드 국무장관이 720만 달러에 구입했다. 이 지역을 1ha당 5센트로 환산해서 계산한 것이었다.

이를 두고 미국인들은 가장 어리석은 거래라고 하여, 이를 '스워드의 어리석은 행위'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후 발견된 금광과 유전은 미국에 상당한 부를 안겨 주었다. 알래스카는 금, 석유, 천연 가스 등이 생산되고, 삼림 자원과 수산 자원도 풍부한 땅이었던 것이다. 알래스카는 1912년 준주(準州)가 되었고, 1959년 1월 3일 49번째의 주로서 연방에 편입되어 미국의 대륙방위체재의 전초지역으로서 전략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아이젠하워 독트린

중국인민지원군, 서울 함락 - 1.4후퇴

내용시작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하순 38선 일대까지 남하한 중국인민지원군과 북한군은 12월 31일 자정을 기해 일제히 38선을 향해 총공격을 개시했다. 이때 동원된 적의 병력은 중국군 17만명, 북한군 6만명으로 집계 되었다. 정부는 이에 앞선 12월 24일 '서울시민 피난령'을 발표했고, 12월 말까지 서울 시민 중 약40%가 피난을 했다. 그리고 1951년 1월 4일, 이른바 '1·4후퇴'인 이날 정부는 부산으로 후퇴했고 유엔군도 서울철수를 완료함으로써 서울은 중국인민지원군에게 장악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작전으로 3월 18일 서울에 재탈환 하였다.

중국인민지원군, 서울 함락 - 1.4후퇴

성녀 잔 다르크

내용시작성녀(聖女) 잔 다르크는 백년전쟁이 한창이던 1412년 1월6일 프랑스 동레미에서 신앙심 깊은 부농의 딸로 태어났다. 잔 다르크는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지만 신앙심 하나 만은 누구 못지않은 농촌처녀였다. 열여섯 살 무렵의 그녀는 대천사 미카엘과 성녀들의 음성을 통해 ‘프랑스를 유린하던 영국군과 부르고뉴 일파를 축출하라’는 사명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신과 직접 교통한다는 그녀의 고백은 후일 종교재판에서 교회의 심기를 거스른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 후, 그녀의 나이 열일곱살 때 곧 프랑스 국왕이 될 샤를 왕세자를 찾아, 흰 갑옷과 프랑스 왕가의 문장(紋章)이 수놓인 군기를 전달받았다. 전선을 종횡무진하는 그의 모습은 좌절과 실의에 빠졌던 프랑스군의 사기를 되살려, 프랑스 최후의 방어선 오를레앙을 해방시키고 기적

같은 연전연승을 거두었으며 렝스로 진격하여 국왕 샤를 7세의 축성식을 거행하는 등 혁혁 국왕적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神)도 은총을 거두었는지 콩피에뉴에서 영국군에 사로잡힌 그녀는 루앙에서의 재판을 통해 신성모독, 우상 및 악마 숭배, 배교 및 이단, 유혈 선동, 남장이라는 긴 죄목으로 1431년 5월30일, 마녀로 낙인찍혀 산 채로 화형에 처해졌다. 그녀의 나이 열아홉이었다. 뒤에 샤를 7세는 앞서의 유죄판결을 파기(1456년)하여 명예를 회복시켰고, 가톨릭교회에서는 그녀가 목숨을 잃은 지 500여년이 지난 후인 1920년 그녀를 성녀로 시성(諡聖)하였다.
※ 백년전쟁 : 백년전쟁은 영국이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고집해 1338년부터 1453년까지 115년동안 전쟁과 휴전을 반복하며 프랑스 땅을 황폐화시킨 전쟁

성녀 잔 다르크

문화
프랑스의 소설가 보부아르

내용시작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그녀는 남편인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따르는 여성해방 운동가였다. 1929년 그녀의 전 생애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끼친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극작가 ‘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 1905. 6. 21 ~1980. 4. 15)’를 만난 그녀는 이른바 '계약결혼'을 시작했다. 소르본대학교에 들어가 철학교수 시험에 합격한 그녀는 사르트르를 통해 실존주의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고 1945년부터 월간지 ‘탕 모데른(Le Temps Modernes)’을 함께 편집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필생의 역작 ‘제2의 성(1949)’를 통해 여성다움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약속에 지나지 않는 것을 주장하였다. 즉 여성이란 본질적 소산이 아니라 남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여성으로서의 진실한 삶은 주체로서의 자기 회복을 위한 투쟁에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인간의 근본적인 행복에의 일치를 목적으로 하는 그녀의 실존주의적 입장은 ‘영원한 여성다움'의 신화를 깨뜨리고자 호소한 것이었다.

프랑스의 소설가 보부아르

프랑스의 인기 만화 탱탱 연재시작

내용시작본명이 조르쥬 레미(Georges Remi)인 에르제는 1907년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학교 졸업 후 어린이잡지에 '에르제'라는 필명으로 단편만화를 그리면서 만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929년 1월 10일부터 연재하기 시작한 최고의 히트작 탱탱(Tintin)은 첫 시리즈인 '소련의 탱탱‘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화려하게 데뷔하였다.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프

랑스 국민 캐릭터로 자리 잡은 탱탱은 사실적인 배경과 흥미 있는 스토리 전개에 힘입어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각국의 서점을 장식하고 있다. 또한 에르제가 남긴 탱탱의 영향은 동시대 이후 새로운 만화기법들을 확산시켰으며 1950년 설립된 스튜디오 에르제를 통해 한층 완성도 높은 작품과 함께 수많은 인제를 배출하였다.

프랑스의 인기 만화 탱탱 연재시작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

내용시작로큰롤의 제왕, 황제 등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그는 로큰롤을 세계에 알린 미국의 가수 겸 영화배우이다. ‘The Hillbilly Cat’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한 그는 힙을 흔들며 노래하는 독특한 무대 매너 덕분에 ‘Elvis the Pelvis’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동시대 가히 파격적인 그의 공연장면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으며 텔레비전 방송 금지 요구 등 로큰롤이 청소년 비행의 원인이라고 까지 비화되기도 하였다. 그는 작사, 작곡은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

하지 못하였지만 천부적인 끼와 재능을 겸비한 가수였다. 흑인의 불루스와 백인의 컨트리를 절묘하게 융합시킨 그의 노래들은 독특한 창법과 함께 항상 열광적인 팬들을 몰고 다녔다. 가장 성공한 아티스

트로서 혹은 최다 히트 싱글기록(151회, 기네스 인정기록)을 가진 가수로서 비틀즈와 레드 제페린 에게까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유명하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레코드 판매량은 정확히 집계된 바는 없지만

1977년 6억매, 1985년 10억매 이상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2005년 미국의 경제지 포브스의 발표에 따르면 연간 인세 수입만 4500만달러로 5년 연속 세계최고 갑부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

미국의 무용수 겸 안무가 에일리

내용시작에일리무용단을 결성하여 흑인을 주제로 한 생생하고 극적인 레퍼토리와 흑인에게서 느낄 수 있는 정열적이고 역동적인 안무를 선보였던 미국의 무용수겸 안무가인 에일리(Alvin Ailey, 1931.1.5~1989.12.1)는 미국 텍사스주에서 태어났다 .1942년 가족이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게 되면서 1949년 레스터 호턴 무용단에 입단했다. 1953년 호턴이 죽자 뒤를 이어 1954년 이 무용단이 해체될 때까지 감독을 맡았

미국의 무용수 겸 안무가 에일리

으며 그해 뉴욕 시로 이동하여 다양한 무대공연물에 출연했으며 스텔라 애들러와 함께 연기수업을 하고 마사 그레이엄, 하냐 홀름, 찰스 와이드먼 등과 함께 무용을 공부했다. 1958년 자신의 무용단인 “에일리 무용단”을 만들었는데 주로 흑인들로 구성된 이 앨빈 에일리 미국 무용단은 미국과 해외를 널리 순회 하며 공연했다. 이 무용단은 그의 작품과 더불어 호턴, 펄 프리

머스, 캐서린 던엄 등 몇몇 선구적인 현대무용 안무자들의 작품을 공연했다. 이 무용단의 주제작(主題作)은 그의 초기작인 “계시, Revelations(1960)”로서 미국 흑인영가를 바탕으로 해서 만든 감동적인 작품이다. 그후 에일리는 계속해서 자신의 무용과 다른 현대무용단들을 위해 안무를 했다. 앨빈 에일리 미국무용단은 지구상의 모든 대륙에서 매우 성공적인 순회공연을 함

으로써 1960~80년대에 그를 해외에서 가장 잘 알려진 미국 안무가로 만들었다. '계시, Revelations' 이외의 주요작품으로 '블루스 조곡, Blues Suite(1958)', ”강, The river(1970)', '절규, Cry(1971)'등이 있다.

과학
IR52 장영실상 제정

내용시작IR52 장영실상은 우리기업과 기술연구소에서 개발한 우수신기술 제품을 선정ㆍ포상함으로써 기술개발자의 사기를 높이고, 수상제품과 기업에 대한 언론홍보를 통해 초기시장진출 기반을 조성하기 위하여 1991년 1월 4일 최초로 제정되었다. 우리의 과학기술문화가 찬란한 꽃을 피운 시기였던 조선조 세종대왕 시대의 과학자 장영실(蔣英實)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제정된 IR52 장영실상은 과학기술의 독창성, 기술적 중요성이 인정되는 제품에 주어진다. IR은 Industrial Research의 약자로 산업기술연구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52는 1년 52주동안 매주 1개 제품씩을 시상한다는 의미로,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와 매일경제신문사가 공동주관하고 과학기술부가 후원하여 91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국내최고의 산업기술상이다. 1991년 제1회 장영실상에는 현대자동차(주)의 α—1.5엔진 및 트랜스미션을 시작으로 공업용 다이아몬드, 광자기 디스크, 복사지 분류장치 등 93년 제20주 현재 산업기술 전 분야에서 124종의 우수한 신기술 개발제품이 수상하였다.

IR52 장영실상 제정

IR52 장영실상 제정

세계최고(最古) 금속활자본

내용시작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공인받아왔던 고려의 직지심경보다 30여년 앞선 고려의 금속활자본 [삼장문선]이 발견됐다. 1993년 1월 6일 상암문고가 '고려시대 서적원 간행의 [삼장문선](원제 신간류편역거삼장대책, 新刊類編歷擧三場文選對策)이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며 이 책을 공개했다. 출간연대는 1341년에서 1370년 사이로 '직지심경' 보다 짧게는 7년, 길게는 36년 앞서는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번에 확인된 고려 금속활자본의 활자들은 대-중-소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자 본문에 소자 두줄로 주석을 달아 인쇄할 수 있는 완벽한 체제를 보여 주고 있다. 또한 활자와 체제외에도 내용이 구본은 고려본, 신본은 조선본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삼장문선]은 원나라에서 주관한 국제적인 과거시험의 대책문제를 뽑아 고시관의 비평을 곁들인 책으로 초간본은 1341년에 나왔다. '직지심경‘이 사찰에서 만든 책이었다면, [삼장문선]은 고려의 국립출판기관인 서적점에서 제작하였다는 차이가 있으나 14세기 서적인쇄에서 금속활자를 사용하였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귀중한 서적들이다.

세계최고(最古) 금속활자본

세계최고(最古) 금속활자본
무선통신의 아버지 마르코니, 구조신호 제안

내용시작C.Q.D(Come Quick Danger)란 항공기나 선박 등이 위급한 상태에 처했을 때 주변의 선박이나 관제소에 알리기 위한 조난신호를 말한다. 무선통신의 아버지인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마르코니에 의해 1904년 처음으로 제안된 이 구조신호는

1906년 새로운 신호로 바뀌기 전까지 사용되었다. 조난신호는 모든 무선신호에 대하여 최우선권을 가지며 이를 수신한 부근의 선박, 항공기 등은 구조를 위한 모든 조치에 최선을 다해야 함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오늘날 사용되는 조난

신호인 SOS는 최초의 조난신호인 C.Q.D의 기상에 따른 수신율 저하의 단점을 보완하고자 1906년 제11회 국제무선전신회의에서 새로운 신호로 채택되었으며 1952년 국제전기통신조약에 의해 세계 공통의 조난신호로 결정된 바 있다.

무선통신의 아버지 마르코니, 구조신호 제안

은판사진 발명

내용시작다게레오타이프(daguerreotype), 즉 은판사진(銀板寫眞)을 일컫는 이 장치는 최초의 성공적인 사진술로서 1839년 독일의 다게르에 의해 발명되었다. 당시까지의 사진술은 지극히 초기로서 정지화상 한 개를 얻기 위해서 는 무려 8시간이라는 긴 노출시간을 가져야했다. 화질 또한 매우 떨어지는 수준의 초기 화상들은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지속적인 연구에 몰두하던 다게르는 최초의 사진기술 발명가 니에프스를 만나면서 기술에 커다란 진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함께 연구를 시작한 그들은 오드화은을 입힌 구리판을 사진기 속에 넣고 빛에 노출시킨 다음 수은 증기를 쏘인 후 소금물로 정착시키면 영구적인 영상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다. 결국 이 신기술로 말미암아 노출시간이 20~30분으로 획기적으로 줄었고 화질 또한 커다란 향상을 보였다. 19세기 위대한 발명중의 하나인 다게레오타이프(daguerreotype)는 이후 사진기술의 발전에 커다란 여향을 주었다.

은판사진 발명

독일의 기술자 라이스

내용시작다게레오타이프(daguerreotype), 즉 은판사진(銀板寫眞)을 일컫는 이 장치는 최초의 성공적인 사진술로서 1839년 독일의 다게르에 의해 발명되었다. 당시까지의 사진술은 지극히 초기로서 정지화상 한 개를 얻기 위해서 는 무려 8시간이라는 긴 노출시간을 가져야했다. 화질 또한 매우 떨어지는 수준의 초기 화상들은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지속적인 연구에 몰두하던 다게르는 최초의 사진기술 발명가 니에프스를 만나면서 기술에 커다란 진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함

께 연구를 시작한 그들은 오드화은을 입힌 구리판을 사진기 속에 넣고 빛에 노출시킨 다음 수은 증기를 쏘인 후 소금물로 정착시키면 영구적인 영상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다. 결국 이 신기술로 말미암아 노출시간이 20~30분으로 획기적으로 줄었고 화질 또한 커다란 향상을 보였다. 19세기 위대한 발명중의 하나인 다게레오타이프(daguerreotype)는 이후 사진기술의 발전에 커다란 여향을 주었다.

독일의 기술자 라이스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내용시작물리학 분야에 대한 그의 업적은 매우 특별한 것들이었다. 1982년 대영제국의 3등훈장을 받은 그는 왕립학회의 최연소 회원(1974),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중력물리학 교수(1977), 아이작 뉴턴이 지냈던 케임브리지대학교 루카스 좌(座) 수학 교수(1979)를 지냈다. 모두 그의 나이 40 이전에 이룬 결과들인 것이다. 휠체어에 몸을 맡긴 외소한 체구의 이 천재는 1973년 블랙홀에 관한 종래의 학설을 뒤집으며 물리

학계에 데뷔하였다. 이와 더불어 일반상대성이론에 대한 ‘특이점 정리’, ‘양자우주론’ 등 현대물리학에 혁명적 이론을 제시하며 갈릴레이, 뉴턴, 아인슈타인에 이어 금세기 최고의 물리학자 반열에 올랐다. 미국의 대표적인 SF 드라마 ‘스타트렉’과 ‘더 심슨’에도 출연했을 만큼 공상과학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진 그는 일반인들 위한 집필을 통해 물리학의 대중화에도 힘썼다.

독일의 기술자 라이스

금주의 노벨상

스웨덴의 생화학자 베리스트룀(Bergstrom, Sune K., 1916.1.10~2004)

스웨덴의 생화학자 베리스트룀 내용시작스웨덴의 생화학자 베리스트룀(Bergstrom, Sune K., 1916.1.10~2004) 스톡홀름에서 태어난 그는 영국에서 교육받고 미국, 스위스 등지에서 연구 활동을 하였다. 1947년 스웨덴으로 돌아와 룬트대학 교수와 카롤린스카연구소의 소장을 역임하였다. 1977년 세계보건기구(WHO)의 의학연구협의위원회 위원장을 지내기도 하였던 베리스트룀은 동물에서 호르몬 같은 다양한 효과를 지닌 생리활성물질. 즉, 포유류의 혈압, 체온, 알레르기 반응을 비롯한 여러 생리현상들에 영향을 미치는 화합물인 프로스타글란딘의 성질을 밝히고 염증촉진 등 특이한 생리작용을 가졌음을 밝혀 사무엘손과 함께 1982년 노벨생리 의학상을 공동수상하였다.

미국의 생화학자 코라나(Khorana, Har Gobind, 1922.1.9~ )

미국의 생화학자 코라나 내용시작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학으로 어렵게 공부한 그는 1948년 리버풀대학교에서 정부장학금을 받으며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특별연구원으로 핵산 연구를 시작한 그는 세포의 유전적 정보를 지니고 있는 핵산의 분자를 합성해 유전암호의 해독과 단백질 합성을 조절하는 방법을 알아내는 공로로 1968년 마셜 W. 니렌버그, 로버트 W. 홀리와 함께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독일의 철학자 오이켄

독일의 철학자 오이켄 내용시작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해설가이며 윤리학과 종교에 대한 저술가였던 독일의 철학자 오이켄(Rudolf Christoph Eucken, 1846.1.5~1926.9.16)은 괴팅겐대학교에서 목적론적 관념론자인 독일의 사상가 R. H. 로체 밑에서 공부했으며 베를린대학교에서는 독일의 철학자 F. A. 트렌델렌부르크의 윤리학 사상과 철학에 대한 역사적 접근법에 이끌려 그의 지도를 받았다. 1871년 스위스 바젤대학교의 철학과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874년 예나대학교의 철학교수가 되어 1920년까지 재직했다. 19세기 후반에 유럽을 지배하던 실증주의와 유물론의 경향에 대하여 신이상주의의 입장에 서서 현대 인류의 정신적 생활 전체를 포착하여, 물질문명의 그물에 걸린 중압감에 허덕이는 인간의 삶을 회복하는 일이 그 철학의 목표였다. H.베르그송, W.딜타이 등과 더불어 [생의 철학]의 대표자로 꼽혀 ‘많은 저작으로 이상주의적인 생의 철학을 옹호·발전시켰으며, 그 서술에서 풍기는 따뜻함과 박력’으로 190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온라인미술관
미국의 시사만화가 영
미국의 시사만화가 영

내용시작1960년대까지 세계 전역의 가장 많은 신문에서 연제되었던 시사만화 ‘블론디(Blondie)’. 금발의 미인 블론디와 그녀를 사랑하는 대그우드 범스테드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 시사만화는 훗날 영화와 TV 드라마 등으로 만들어져 우리에게 친숙한 이미지로 남아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간지의 일상 가정만화 정착에 기여한 블론디는 일상생활을 약간 과장해서 묘사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불론디의 작가 영은 미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다양한 직업을 가졌던 그는 1920년대부터 만화일을 시작하여 1930년대 히트작 블론디로 유명해졌다. 블론디는 1500여종 이상의 신문에 연재되었으며 우리나라 일간지에도 원문과 함께 연재되어 미국인들의 일상회화를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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