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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여행

인물과 역사를 바로 알고 현재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 봄으로써 선조들의 지혜를 알아 봅시다.

지난 시간여행
제목 시간여행 제147호
등록일 2009. 12. 24.
첨부파일 첨부파일없음

경인년 새해 福 많이 받으세요! 상세정보보기

이주의 이벤트와 시간여행 구독, 추천하기 시간여행 구독하기 이라 하여 호랑이날이라고 불렀는데 이 날에는 호환(虎患)이 있을 수 있다 하여 다른 사람과의 왕래를 삼가고 외출을 하지 않으며 근신했다고 한다. 호랑이는 그 용맹함으로 인해 포악한 맹수로 묘사되기도 했지만 사악한 잡귀를 물리치는 신령한 동물로 여겨져 호랑이 그림을 벽에 붙여 액이 물러가기를 기원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어리석지만

내용시작2010년은 경인년(庚寅年) 호랑이의 해이다. 호랑이는 우리 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동물 중 그 으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백두산 호랑이는 우리 민족의 대표 동물이었고, 88서울올림픽의 마스코트로 호돌이가 등장했다. ‘옛날

옛적 호랑이가 담배 피던 시절에〜’, ‘♬산중호걸이라 하는 호랑이의〜’ 의 구절이 끊이지 않고 흥얼거려지는 것처럼 호랑이는 우리네 일상 속에서 참으로 친숙하고 가까운 동물이어 왔다. 호랑이와 관련된 세시풍속의 하나로 예로부터 음력 정월의 첫 인일(寅日)을 상인일

결코 밉지 않은 모습으로, 때로는 은혜를 갚을 줄 하는 영물로 우리 민속에 표현되어 왔다. 2010년 새해에는 용맹스러운 호랑이처럼 우리 모두가 힘차게 포효하는 한 해가 되길, 그리고 우표포탈 역시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서는 우표류 종합 사이트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

조선중기의 명장, 권율 탄생

내용시작임진왜란의 3대첩(三大捷) 중의 하나인 행주대첩. 사기충천한 3만 명의 왜군을 대파하며 행주산성을 지켜낸 이 전투를 지휘한 장수는 전라도 순찰사 권율장군(權慄, 1537.12.28 ~ 1599)이었다.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한 권율장군은 임진왜란의 발발 당시 광주목사로 부임중 군사를 일으켜 전공을 세웠으며 이로 인해 전라도 순찰사에 재수되었다. 한양을 되찾고자 1만의 병력으로 수원을 거쳐 행주산성으로 집결시킨 권율장군은 뛰어난 지략으로 왜군 3만을 맞아 2만4천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며 대파하였다. 이 공로로 도원수(都元帥)의 자리에 오른 권율은 임진왜란 7년 간 군대를 총지휘한 장군으로서 바다의 이순신과 더불어 역사에 남을 전공을 세웠다. 노환으로 1599년 관직을 사임한 장군에게 영의정이 추증되었고 1604년 선무공신 1등이 주어졌다.

조선중기의 명장, 권율 탄생

사회
세계 최초의 영화 상영

내용시작1895년 인류는 한 형제가 보여주는 위대한 발명품에 환호하였다. 그것은 바로 1895년 12월 28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에 하나인 움직이는 사진, 즉 영화를 일반인들에게 최초로 공개한 것이다. 1823년 니에프스와 다게르에 의해 사진술이 발명된 이후 비슷한 시도는 여러 번 있었지만 대중 앞에서 완성된 영상의 공개는 최초인 것이다. 19세기 말 급속히 발전한 과학문명이 가져다준 필연적인 산물인 영화의 탄생은 코닥의 롤 필름제조와 함께 에디슨이 발명한 키네토스코프에 의해 실연되었다. 뤼미에르형제는 이 발명품들을 이용하여 움직이는 사진을 만들어 보여주는데 필요한 촬영기와 영사기를 발명하여 ‘열차 도착’, ‘물고기를 낚는 아기’ 등 흑백의 짧은 영상을 최초로 일반에게 공개한 것이다. 이 최초의 첫 상영을 시작으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영화는 오늘날 하나의 거대한 산업으로 자리 잡으며 한시대의 문화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매체로 각광받게 되었다.

세계 최초의 영화 상영

 생물다양성 보존협약 발효

생물다양성 보존협약 발효

내용시작생물종 다양성은 생명의 궁극적인 원천이자 인간과 생태계 등 경제개발에 필수적인 자원으로서 유전자, 생물종, 생태계라는 세 가지 단계의 다양성을 종합한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심각한 생태계의 파괴는 향후 수 십년내에 멸종생물의 기하급수적인 증가를 예견하고 있다. 이같은 심각성을 인식하여 1987년 6월 유엔환경계획기구는 생물다양성 문제에 대한 국제적 행동계획의 수립을 결정하기에 이르렀으며 1990년 생물다양성 보호를 위한 국제협약 초안이 작성되었다. 작성된 초안의 심

의를 거쳐 1992년 6월에 열린 리우회의에서 생물종보호와 희귀유전자의 보전, 생태계의 균형유지를 통하여 미래의 심각한 환경재앙으로부터 지구를 보호하기위한 이 협약의 서명이 160여개국 대표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1993년 12월 30일을 협약의 발효일로 결정하였다. 1994년 열린 제1차 생물다양성보존협약 가입국 회의에서는 생물다양성보존협약 발효일인 1993년 12월 29일을 기념하여 ‘생물종 다양성 보존의 날’을 제정하였으며 국제연합환경계획(UNEP)에서는 각국이 이 날을 맞아 기념행사 등을 치르도록 하고 있다.

지리산(智異山) 우리 나라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

지리산(智異山) 우리 나라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지리산(智異山) 우리 나라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지리산(智異山) 우리 나라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

내용시작우리나라는 세계의 경승지로 알려진 금강산·지리산·한라산을 1930년대에 국립공원 후보지로 선정하고 금강산은 기초조사까지 끝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중단되었다. 그 후 1962년 미국 시애틀에서 개최된 제1차 세계 국립공원 회의의 자극을 받아 경승지를 국립공원화하기 위한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963년 국민운동본부 내의 ‘지리산 지역 개발 연구회’에서 지리산을 국립공원화하기 위한 조사에 착수하였고, 전남 구례군에서는 민관 일체로 ‘지리산국립공원위원회’가 결성되어 정부에 국립공원 지정을 건의하였다. 1967년 3월 ‘공원법’이 제정되어, 이 법을 근거로 하여 그 해 12월 29일에 지리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한 것을 시초로, 1968년 경주·계룡산·한려해상을, 1970년 속리산·설악산·다도해해상 등을 국립공원으로 지정, 1995년 현재 20곳 총 6,473.1km2(육지 3,824.6km2, 해상 2,648.5km2)로 전국토(남한)의 3.8%에 이른다. 1980년 공원법을 개정하여 자연공원법과 도시공원법으로 나누고, 자연공원을 국립공원 ·도립공원·군립공원으로 분류·지정하였다.

세계최초 ‘인터넷 엑스포’ 일본에서 개막

내용시작가상공간을 무대로 펼쳐지는 세계 최초의 ‘인터넷 엑스포(INPAKU)’가 2000년 12월 31일 일본 정부가 개설한 인터넷 사이트(www. inpaku.go.jp/)에서 개막됐다. 19세기 말 프랑스 파리박람회 이후 국제박람회는 세계 곳곳에서 열렸지만 인터넷 상의 박람회는 사상 처음이었다. IT(정보기술)혁명의 주도권을 장악한다는 목표 아래 일본이 국가 프로젝트로 추진한 인터넷 엑스포에선 민간기업·지자체·비영리단체 등이 202개의 전시관을 1년간 운영했다. 각 전시관은 다양한 콘텐츠가 준비돼 인터넷의 진수를 보여줬다. 예컨대 도요타자동차의 전시관엔 사이트 방문자로부터 아이디어를 모집해 인터넷 상에서 자동차를 시험 제작하거나, 가상 카레이스를 벌여 연간 챔피언을 뽑는 등의 12개 콘텐츠가 마련됐다.

세계최초 ‘인터넷 엑스포’ 일본에서 개막

매월 말일은 편지 쓰는 날 - 범국민적인 편지 쓰기 운동 시행

내용시작1982년 연말 당시 문교부, 체신부, 문화공보부에서는 공동 주관하여 범국민적인 편지쓰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오늘날은 전신 전화와 TV등 영상 문화의 발달과 보급의 확대로 일고 쓰는 문화가 쇠퇴하고 인정이 메말라 가고 있는 실정인데, 이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따뜻한 감정과 정성이 담겨 있는 편지를 주고 받는 생활을 습관화하여 인정이 넘치는 밝은 사회를 이루고, 국민의 정서적 감정과 상호 신뢰감을 높임은 물론 문자 문화의 수준의 향상을 통해 청소년들의 사

회 교육과 범국민적인 의식 개혁에 기어코자 캠페인을 진행한 것. 이 운동의 일환으로 "매월 말일을 편지 쓰는 날"로 정하고 1982년 12월 말일부터 시행하기로 하였는데, 생활 속에서 글 쓰는 습관을 되찾아내며, 사람의 마음과 마음의 교류를 왕성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당시 체신부에서는 이 운동을 국민들 사이에 널리 알려, 편지의 좋은 점을 인식시키고 편지 쓰는 습관을 장려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시행하는 편지 쓰는 날을 맞아 편지 쓰기 운동 특별 우표를 발행한바 있다.

매월 말일은 편지 쓰는 날 - 범국민적인 편지 쓰기 운동 시행

우리 땅 독도에 우편번호(799-805) 부여

내용시작한ㆍ일간 영토분쟁 대상으로 부각되던 독도에 처음으로 우리나라 우편번호가 2003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우정사업본부는 2003년 1월1일자로 독도에 우편번호 `799-805' 번호를 부여하고 2003년판 전국우편번호부에 등재했다. 독도에 우편번호가 부여된 것은 독도유인화운동본부(의장 황백현)가 독도경비대에 위문품을 보내려다 독도에 우편번호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경북체신청에 우편번호 부여를 청원한 후 3년여 만에 성사된 것으로,

일본 정부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면서도 아직 우편번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외교적으로도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최근에는 독도에 빨간 우체통이 들어서기도 했다. 행복과 행운을 기원하는 연말연시, 따뜻한 마음을 담아 대한민국 독도 수호에 여념이 없을 독도경비대원들에게 위문편지 한 통을 건네는 것은 어떨까?

우리 땅 독도에 우편번호(799-805) 부여

우리 땅 독도에 우편번호(799-805) 부여우리 땅 독도에 우편번호(799-805) 부여우리 땅 독도에 우편번호(799-805) 부여

근대 올림픽경기 창시자, 쿠베르탱

내용시작프랑스 파리 출생으로 명문 출신 남작이며, 조상은 로마의 귀족으로 알려진 쿠베르탱(Pierre de Coubertin, 1863.1.1~1937.9.2)은 청년시절 군인이 되기 위하여 생시르 육군 유년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독일을 공공연한 적으로 가르치는 교육에 반대하여 16세에 중퇴하고 정치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영국과 미국에 유학 중 영국 청소년 교육의 중심이 스포츠에 있다는 데 공명(共鳴)하였는데, 그 이념을 모국에 이식하고자 1886년 문교상(文敎相) 에게 교육에서 스포츠의 중요성을 건의하였으나, 이 일로 인하여 조국 프랑스의 이단자로 일생을 냉대받게 되었다. 1892년부터 올림픽 부흥운동을 시작하여 1894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창설하였으나, 이에 협력한 것은 프랑스인이 아니고 타국의 정치가, 학자, 스포츠맨으로 알려진다. 1896년 제1회 근대 올림픽대회를 아테네에서 개최하고, 그 후 IOC 회장으로 올림픽의 발전과 운동 추진에 일생을 바쳤다. IOC 외에도 국제 교육학회를 창설하여 스포츠와 교육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등 올림픽 대회처럼 아마추어 선수들이 참여하는 국제적인 운동경기가 세계의 긴장을 완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근대 올림픽경기 창시자, 쿠베르탱

작은 꽃 소화 테레사 출생

내용시작프랑스 파리 출생으로 명문 출신 남작이며, 조상은 로마의 귀족으로 알려진 쿠베르탱(Pierre de Coubertin, 1863.1.1~1937.9.2)은 청년시절 군인이 되기 위하여 생시르 육군 유년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독일을 공공연한 적으로 가르치는 교육에 반대하여 16세에 중퇴하고 정치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영국과 미국에 유학 중 영국 청소년 교육의 중심이 스포츠에 있다는 데 공명(共鳴)하였는데, 그 이념을 모국에 이식하고자 1886년 문교상(文敎相) 에게 교육에서 스포츠의 중요성을 건의하였으나, 이 일로 인하여 조국 프랑스의 이단자로 일생을 냉대받게 되었다. 1892년부터 올림픽 부흥운동을 시작하여 1894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창설하였으나, 이에 협력한 것은 프랑스인이 아니고 타국의 정치가, 학자, 스포츠맨으로 알려진다. 1896년 제1회 근대 올림픽대회를 아테네에서 개최하고, 그 후 IOC 회장으로 올림픽의 발전과 운동 추진에 일생을 바쳤다. IOC 외에도 국제 교육학회를 창설하여 스포츠와 교육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등 올림픽 대회처럼 아마추어 선수들이 참여하는 국제적인 운동경기가 세계의 긴장을 완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작은 꽃 소화 테레사 출생

반기문 UN사무총장 첫 출근

내용시작2일 오전 9시10분(한국시각 밤 11시10분), 뉴욕 맨해튼 50가의 유서 깊은 월도프아스토리아호텔. 추운 겨울 날씨에 외투를 다져 입은 한국인이 동쪽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주위에 무장 경호원들이 그를 에워싸고 함께 걸었다. 20분 뒤 이스트리버 강변의 유엔본부 사무국의 육중한 철제 정문이 열리고 호리호리한 몸매의 이 한국인이 현관에 들어서자 세계 각국 보도진들의 카메라가 일제히 플래시를 터트렸다. 반기문 (潘基文.62) 8대 유엔 사무총장의 임기 첫날 첫 출근 모습을 역사에 남기기 위해서다. 바야흐로 한국인 첫 유엔 사무총장 시대가 정 식으로 시작된 것이다. 역대 유엔 사무총장과는 달리 반 총장은 ‘걷는 총장’으로 임기를 시작했다.

반기문 UN사무총장 첫 출근

정치
스페인의 그라나다 왕국 멸망

내용시작1492년 1월 2일 스페인의 옛 왕국 카스티야(Castilla)가 그라나다 왕국(Kingdom of Granada)을 함락시켰다. 그라나다 왕국은 한때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했으나, 함락 당시는 쇠퇴 일로를 걷던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보루였다. 이로써 스페인은 그리스도교 국가로 통합되어 발전하게 되었다. 무하마드 1세가 이룩한 나스르 왕조의 그라나다는 카스티야의 봉국(封國)이었지만 카스티야와 끊임없이 투쟁하면서 독립을 꾀했다. 카스티야를 제압하기 위해 모로코와 동맹한 그라나다는 알람브라 궁전을 세우는 등 이슬람 문화를 꽃피웠다. 14세기 후반 그라나다는 카스티야 왕국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발빠르게 카스티야를 공격했지만 곧 강력한 반격에 직면했고, 전쟁은 15세기말까지 사이를 두고 계속되었다. 1469년 아라곤(Aragun) 왕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가 결혼함으로써

스페인의 그라나다 왕국 멸망

알래스카, 미국의 49번째 주로 합병

내용시작알래스카(Alaska)는 1741년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에게 고용된 덴마크인 베링이 발견한 뒤, 러시아 모피상인이 서서히 이주해 왔으며, 18세기 말에는 러시아-아메리카회사가 모피무역을 독점하고 싯카를 건설하여 19세기 초에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영국의 알래스카 강점을 두려워한 러시아는 미국과 매각교섭을 하여 1867년 미국의 스워드 국무장관이 720만 달러에 구입했다. 이 지역을 1ha당 5센트로 환산해서 계산한 것이었다. 이를 두고 미국인들은 가장 어리석은 거래라고 하여, 이를 '스워드의 어리석은 행위'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후 발견된 금광과 유전은 미국에 상당한 부를 안겨 주었다. 알래스카는 금, 석유, 천연 가스 등이 생산되고, 삼림 자원과 수산 자원도 풍부한 땅이었던 것이다. 알래스카는 1912년 준주(準州)가 되었고, 1959년 1월 3일 49번째의 주로서 연방에 편입되어 미국의 대륙방위체재의 전초지역으로서 전략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알래스카, 미국의 49번째 주로 합병

알래스카, 미국의 49번째 주로 합병

문화
20세기 첼로의 거장, 카잘스

내용시작20세기 첼로의 거장으로 불리는 첼로 연주자 스페인의 첼로연주자 파블로 카잘스(Casals, 1876-12.29 ~ 1973). 스페인 내전 당시 독재정권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피레네 산맥의 작은 마을에 은거하며 공식적인 연주활동을 중지했던 카잘스는 현대 첼로의 위치를 확립한 위대한 음악가였다. 1899년 파리의 협연이 성공을 거두며 두각을 나타낸 카잘스는 이후 1920년까지 파리에 머물며 명성을 쌓았고 조국 스페인으로 돌아가 사재를 털어 오케스트라를 창립 소외계층에 대한 연주회를 포함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지난 세기 빛을 보지 못했던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발굴하여 첼로 음악 최고의 명곡으로 인정받게 만든 그는 항상 노력하고 연구하는 자세를 가진 진정한 음악가중의 한 사람이었다.

20세기 첼로의 거장, 카잘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출생

내용시작'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누구나 한번 쯤 이 시를 들어봤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짧게 살다간 젊은 시인 윤동주(尹東柱, 1917.12.30 ~ 1945)의 생애를 암시하고 상징하는 이 시는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막을 장식한다.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며 강압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조국의 아픈 현실을 온 가슴으로 느끼며 고민한 시인 윤동주. 광복을 몇 달 앞두고 차디찬 형무소에서 짧은 생을 마감한 이 젊은 시인은 인생과 조국의 아픔에 고뇌하는 인물이었다. 청소년기의 암울하면서도 평화를 지향하는 분위기의 작품에서부터 성년이 되어 철학적 감각과 더불어 시대적 고뇌가 담겨있는 작품들이 주를 이루는 윤동주의 수작들은 그가 유명을 달리한 이후 그의 친구들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문인협회는 저항시인이었던 윤동주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5년부터 윤동주 문학상을 제정 수여하고 있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출생

 
독일의 소설가 폰타네(Fontane, Theodor) 출생

내용시작베를린 교외 노이루핀 출생의 폰타네(Fontane, Theodor, 1819.12.30~1898.9.20)는 위그노파(派)의 프랑스계 집안에서 태어났고, 약제사인 아버지의 가업을 이었다가 나중에 문학에 취미를 갖게 되어 베를린에서 P.하이제, T.슈토름 등이 속하는 문학 그룹에 참여하였다. 신문기자로 한때 영국에 체재한 적도 있었으며, W.스콧의 역사소설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향토와 인간에게 깊은 이해를 보인

‘마르크 브란덴부르크 기행(1862〜1882)’을 썼고, 59세에 이르러 최초의 장편소설 ‘폭풍 앞에서, Vor dem Sturm(1878)’를 발표하였다. 그 후 주로 프로이센 시대의 베를린을 무대로 신분의식에 의한 인간관계를 풍자적이고 심리분석적 필치로 묘사한 ‘미로(迷路), Irrungen(1888)’, ‘에피 브리스트, Effi Briest(1895)’ 등의 작품을 남겼다.

독일의 소설가 폰타네(Fontane, Theodor) 출생독일의 소설가 폰타네(Fontane, Theodor) 출생

이탈리아 고전학자, 시인 파스콜리

내용시작북이탈리아의 산 마우로 출생의 파스콜리(Giovanni Pascoli, 1855.12.31~1912.4.6)의 이탈리아어로 씌어진 우아하고 음울한 서정시는 완벽한 형식과 율동적인 문체, 혁신적인 표현법으로 '크레푸스콜라리(crepuscolari:황혼파 시인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그의 나이 12세 때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이듬해에 어머니를 잃었으며 어른이 되기 전에 5형제가 죽는 등

이탈리아 고전학자, 시인 파스콜리

몹시 고통스러운 유년기를 보냈다. 볼로냐대학 졸업 후 교직에 종사하며 1906년 카르두치의 뒤를 이어 모교의 이탈리아 문학 강좌를 담당하였다. 그에 의하면 시인이란 외계(外界)로 눈을 돌리는 ‘동자(童子)’이며, 자신의 주위에서 새로운

멋진 사물(事物)을 발견하고 황홀해 하는 존재이다. 이 자연과 인간 접촉에서 일어나는 감동을 바탕으로 하여, 그는 새로운 시의 세계를 창조하였다. 그는 귀중하고 진기한 시어(詩語)를 창조하여 20세기 이탈리아 시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

다. 주요 작품으로는 그의 명성을 떨치게 한 시집 '미리카에, Myricae(1891)', 자연의 소리를 노래한 '카스텔베키오의 노래, Canti di Castelvecchio(1903)'등이 있다.

반지의 제왕 원작자, 영국 소설가 톨킨

내용시작영국의 톨킨(John Ronald Reuel Tolkien, 1892.1.3~1973.9.2)은 신화적인 내용의 대하3부작 '반지전쟁, The Lord of the Rings(1954~55)'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 소설에서 요정, 난쟁이, 마법사 등 환상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마술 반지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려냈다. 어려서부터 언어학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그는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앵글로색슨어(고대영어)와 영문학 교수로 재직하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언어학적인 관심은 그를 자연스레 북유럽 전통에 이끌리게 만들었다. 그는 윌리엄 모리스, 조지 맥도널드 등 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신화와 서사시에 대한 관심을 넓혀갔으며, 공상소설 작가 C.S.루이스와 교류하면서 신화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을 정립했다. 이런 노력 끝에 발표된 '반지전쟁'은 후에 환상소설의 고전으로 평가 받았으며, 1977년에 '반지전쟁'의 전편격인 ‘실마릴리온, The Silmarillion’이, 1980년에는 ‘미완성 이야기, Unfinished Tales’가 출판되었다. '반지전쟁'은 이후 만화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2001년에는 [반지의 제왕]이라는 영화로 제작되어 세계적 인기몰이에 성공하였다.

반지의 제왕 원작자, 영국 소설가 톨킨 반지의 제왕 원작자, 영국 소설가 톨킨 반지의 제왕 원작자, 영국 소설가 톨킨

과학
에드삭 컴퓨터 제작자, 미국의 수학자 노이만

내용시작1903년 부다페스트에서 3형제의 막내로 태어난 노이만(John von Neumann, 1903. 12. 28(헝가리) - 1957. 2. 8) 은 어릴적부터 암산과 어학에 재능을 보였다.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이었던 그는 체계적인 수업을 받을 수 있었고, 그의 뛰어난 재능과 더불어 18세에 이르러 수학잡지에 논문을 발표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대학 입학당시 이미 뛰어난 수학자로서 인정받고 있었던 그는 졸업 후 독일과 미국 대학의 교수와 강사로 일

에드삭 컴퓨터 제작자, 미국의 수학자 노이만

하였고 나치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 1932년부터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일하였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최연소 연구원으로서 초빙된 노이만은 수학기초론에서 시작하여 양자역학 등 수리물리학적

과제와 더불어 수리경제학이나 게임이론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연구를 하였다. 1942년 '맨해튼계획'에 참여한 노이만은 컴퓨터 중앙처리장치에 관한 내장 프로그램을 고안하여 발표하였다. 이를 기

초로 1949년 에드삭(EDSA C; Electromic Delay Storage Automatic Calculator)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컴퓨터를 만들었으며 이는 오늘날 거의 모든 컴퓨터 설계의 기본이 되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금주의 노벨상

정글북의 저자, 조지프 키플링

정글북의 저자, 조지프 키플링 내용시작1865년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의 봄베이에서 태어난 키플링(Joseph Rudyard Kipling, 1865.12.30 ~ 1936.1.18)은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다. 노스데본의 유나이티드서비스대학교를 마치고 1880년 인도로 돌아온 그는 잡지사의 편집원을 지내며 몇 편의 시집과 단편집 ‘산중야화(山中夜話)(Plain Tales from the Hills. 1887)’ 등을 발표하였다. 키플링은 여행을 많이 다녔다. 인도의 각 지방은 물론 극동지역과 미국에 이르기까지 많은 지역을 여행하였으며 이러한 그의 경험은 책으로 쓰여 졌다. 1894년 출판된 키플링의 불후의 명작 ‘정글북 (The Jungle Book)’은 그가 인도에 있을 당시의 경험을 되살려 쓴 대표적인 작품이다. 인도인 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이 작품은 동물에도 인간에도 귀속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고독을 잘 그려낸 작품으로 유명하며 훗날 여러 언어로 번역 출판되었고 영화, 애니메이션 등으로도 만들어졌다. 1907년 그의 문학적 재능을 인정하여 노벨문학상이 수여되었고, 당시 41세였던 키플링의 최연소 문학상 수상자의 기록은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온라인미술관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 마케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 마케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 마케

내용시작메셰데(베스트팔렌) 출생의 마케(August Macke, 1887.1.3 ~ 1914.9.26)는 뒤셀도르프의 미술학교에 다니면서 처음에는 A.뵈클린과 F.호들러의 영향을 받고, E.마네에게 심취하였다. 1907년 파리를 찾았을 때는 르누아르에게서 감명받았으며, 그 후 4회에 걸친 파리여행에서 인상주의, 포비슴, 큐비즘과 접촉하였다. F.마르크와 W.칸딘스키를 만나 ‘청기사운동(靑騎士運動)’에 참가하고, 그 그룹전(1911〜1912)에 출품하였다. 1912년 파리여행에서 알게 된 R.들로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입체파나 미래파에서 섭취한 자신의 회화언어(繪畵言語)로 오르피슴적인 ‘동시적 대조(同時的對照)’에 의한 색광(色光:색과 빛의 自己同一)을 사용하여 독자적인 포름을 찾아내었다. 그의 스타일은 기하학성(幾何學性)과 가장 세련된 포에지(poesie)를 결합시킨 것이며, 작품은 독일적인 표현주의보다는 프랑스적인 색채에 의한 큐비즘에 가까워 다른 표현주의자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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