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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여행

인물과 역사를 바로 알고 현재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 봄으로써 선조들의 지혜를 알아 봅시다.

지난 시간여행
제목 시간여행 제164호
등록일 2010. 4. 23.
첨부파일 첨부파일없음

천장절에 울려 퍼진 천둥소리 상세정보보기

이주의 이벤트와 시간여행 구독, 추천하기 시간여행 구독하기 내용시작1932년 4 월 29일 상해 홍구(虹口) 공원에서 일본제국주의 무리에게 폭탄을 던진 매헌(梅軒) 윤봉길 의사의 쾌거는, 한국인과 세계민중의 가슴을 영원히 진동시킬 불타는 민족의지였으며, 중화민국의 고(故)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대군이 못한 일을 한국이 청년 한사람이 해냈다”라고 크게 감동했던 장거(壯擧)였다. 1932년 김구선생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윤봉길 의사는 일왕의 생일인 4월 29일 천장절

(天長節)에 상하이사변 전승기념식장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을 즉사시키고, 일본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우에다, 주중(駐中)일본공사 시게마쓰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5월 25일 상하이파견군 사령부 군법회의 예심에서 오사카로 이송, 12월 18일

가나자와 형무소로 옮겨져 19일 총살되었다. 이날 세계에 떨친 우리의 독립의지는, 당시 한민족과 소원한 상태에 있던 중국을 움직여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이 시작되는 발단이 되었다. 이후 1933년에는 중국의 낙양군관학교에 광복군 특별반이 설치되고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는 한국의 독립을 결의하는 등 조국광복의 서광이 비쳐지기 시작하였다. 윤봉길의사를 비롯한 여

러 선열들의 순국의지와 숭고한 희생정신은 우리민족 본래의 근면성과 우수성에 빛을 더하여 적은 부존자원과 6.25전쟁의 폐허에도 불구하고 세계가 놀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는 근간이 되었으며, 민족통일에 대한 우리의 책임감을 더욱 깊게 해 주고 있다. 윤봉길 의사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사회
나를 이순신 제독에 비교하지 말라...

내용시작"나를 이순신 제독에 비교하지 말라. 그 분은 전쟁에 관한 한 신의 경지에 오른 분이다. 이순신 제독은 국가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않는 최악의 상황에서 매번 승리를 끌어내었다. 나를 전쟁의 신이자 바다의 신인 이순신 제독에게 비유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일본의 해군대장으로서 러일전쟁

나를 이순신 제독에 비교하지 말라... 상세정보보기 상세정보보기

당시 러시아의 극동함대와 흑해함대를 대파한 일본 해군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남긴 말이다. 1545년(인종 1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1576년 (선조 9년)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른 이순신장군

은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지내며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바다를 제패함으로써 전란의 역사에 결정적인 전기를 이룩한 명장이다. 1598년 (선조 31년) 노량해전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전사 할 때까지 지극한 충성,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으로 문무를 겸비한 이순신 장군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현충사 중건 준공 1969.4.28

내용시작충청남도 아산군 온양에 소재하는 현충사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성역(聖域)으로 지정된 곳이다. 사적 제155호로 지정된 곳이기도 한 현충사는 세계 해전사상 처음으로 장갑선인 거북선을 전술적으로 구사하여 국가의 위난을 구한 민족의 성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서 1706년(숙종 32) 지방 유생들의 건의에 의하여 세워졌다.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과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위기

를 맞았던 현충사는 1932년 동아일보의 국민성금 모으기로 다시 그 모습을 정비했으며 1966년 정부의 대대적인 성역화 작업에 따라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건당시 유물전시관과 활터 등을 새로 만들었으며 국보 제76호인 난중일기와 장검, 옥로, 요대 등의 보물이 소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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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총 인구조사 실시

내용시작1949년 5월 1일 대한민국의 첫 인구조사가 실시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인구조사는 일제강점기인 1925년 조선 총독부에 의하여 행해진 간이국세조사(簡易國勢調査)가 시초이다. 본 조사는 인구의 성장률, 분포상태, 인구이동, 출산수준 및 취업, 실업 등의 고용상태 등을 파악하여 각종 선거의 법정인구를 확정케 되고 합리적인 경제개발계획 수립 및 가족계획 사업 등의 기초자료가 됨은 물론 국제간의 인구 현황을 비교 연구하게 하는등 광범위한 국가정책 수립의 기

초자료로 삼는데 그 목적이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농업국가로서 농업정책의 수립은 물론 도시의 인구 집중으로 인한 주택 건설계획의 기초자료로도 사용된다. 또한 본 조사에 있어서는 조사업무 수행 중 알게 된 개인 혹은 단체의 비밀은 보장하고 있으며 조사 결과는 단지 국가정책 수립에만 사용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현제 위나라는 1960년 대규모 조사 이후 현제까지 10년 주기로 실시하며 중간 5년 마다 간이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통계청 홈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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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국제 노동절행사

내용시작자본주의의 급격한 팽창 속에서 근로자들의 열악한 근로여건과 비인간적인 삶은 19세기 후반 세계 노동운동의 중심적 문제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1866년 마르크스가 제1차 인터내셔널 강령에서 8시간 노동제의 법제화 등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는 미국으로 전파되어 당시 광범위한 노동운동

제1회 국제 노동절행사 상세정보보기 상세정보보기

으로 전개되었고, 드디어 1884년 5월 1일 미국의 방직노동자의 8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총파업을 시작으로 1886년 5월 1일 시카고 '노동조합연합회'를 중심으로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권리를 되찾고자 전반적인 시위로 번졌다. 이 과정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죽거나 부상당하는 등 강압적인 탄압이 극에 달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1889년 파리 제 2차 인터내셔널

대회에 보고되었고 미국 노동자의 5월 1일 시위를 기념하여 1890년 5월 1일 국제적인 시위운동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국제메이데이 행진은 해마다 세계 각국에서 노동자의 연대와 단결을 과시하는 날로서 메이데이(May Day) 또는 워커스데이(Workers' Day), 노동절(勞動節, Labor Day)로 불리는 국제적 기념일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를 중심으로 5월

1일 행사를 치러오다 1958년부터 대한노동조합총연맹(현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의 창립 기념일인 3월 10을, 다시 1994년부터 5월 1일로 환원되었다. 명칭 또한 5.16 군사혁명 이후 계급투쟁의식을 내포하는 노동자에서 근로자라는 개념으로 바꾸며 1963년 근로자의 날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세계 최초의 국제박람회

내용시작런던 만국 박람회, 혹은 수정궁박람회로 불리는 세계최초의 국제박람회가 런던의 하이드파크에서 1851년 5월 1일부터 10월 15일까지 개최되었다. 최신발명품 등 농, 상, 공업 분야의 여러 가지 물품을 모아 전시하는 박람회는 1798년 프랑

스 혁명기의 파리에서 처음으로 개최되었다. 이후 1849년까지 파리에서 11회에 걸쳐 개최되며 서서히 규모가 커져 갔고 벨기에, 네덜란드 등 유럽 각국에서도 개최되면서 인기 있는 볼거리로 자리 잡았다. 그때까지의 박람회는 국지적인 형

세계 최초의 국제박람회 상세정보보기 상세정보보기 상세정보보기 상세정보보기

태로 국내전시회의 성격이었으나 1849년 프랑스의 수상이 국제 박람회를 제창해 1851년 제1회 국제 박람회가 런던에서 개최되게 된것이다. 런던 만국 박람회는 큰 성공을 거둔 1844년 프랑스 공업 박람회를 모델로 하여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앨버트 공과 ‘왕립 미술공업상

업진흥회’가 주축이 되어 개최하였고, 박람회를 대표하는 건축물인 수정궁(Crystal Palace)에서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유리와 철골로 만들어진 폭 563m 너비 138m의 이 호화로운 대형 건축물은 조지프 팩스턴 경이 설계하여 약 9개월간의 건축기간을 거쳐 1941년 완전히 철

거될 때 까지 전시회 건축물의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런던 만국 박람회는 186,000 파운드의 이익을 남겼고 이 이익금은 이용해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 ‘런던 과학박물관’, ‘런던 자연사 박물관’을 설립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붉은 남작(Red Baron)

내용시작제1차 세계대전 당시 공중전에 대해 전인미답의 전투기 80대 격추기록을 가진 독일의 전투기 조종사 리히트호펜(Richthofen, Manfred von, 1892.5.2~1918)은 오늘날까지 최고 중에 최고(Ace of aces)로 불리고 있다. 직업군인이었던 아버

지의 뒤를 이어 기병연대의 장교로서 군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15년 공군으로 전속하면서 천부적인 자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1916년 9월 첫 공중전 이후 1917년 1월까지 16기를 격추해 독일군 최고 무공훈장을 받았고 같은 달 최고의 파일럿

붉은 남작(Red Baron) 상세정보보기 상세정보보기 상세정보보기 상세정보보기

들로 구성된 제11전투기중대 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4월(영국에서는 ‘피의 4월’로 불리는...) 리히트호펜은 한 달 동안 적기 5대를 격추시키며 그의 비행단과 함께 영국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공중전에서 피아간 식별이 용이하게 하기위해 붉은색으로 도장한 전투기를 사용했던 그의 비행

중대는 이후 제1전투비행대로 재편되면서 수많은 에이스를 배출하였고 연합군 측에는 ‘날으는 곡마단’, ‘리히트호펜 곡마단’으로 불리며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항상 빨간색 포커전투기를 타고 다녔던 리히트호펜은 1918년 4월 21일 프랑스의 솜 부근의 상공에서 격추당하여 전사할 때까지 80대의

격추기록을 남겼으며 그의 이름보다 '붉은 남작(Red Baron)'이라는 닉네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추락한 그의 시신을 수습한 영국군은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며 프랑스에 매장하였고 전쟁 후 베를린 군인묘지로 이장되었다.

“20세기 역사에서 전쟁을 제외한 가장 큰 재앙의 날” - 그린피스

내용시작1986년 4월 26일 토요일 새벽 1시 23분, 원자로의 노심이 녹으면서(melt down) 대량의 방사성 물질이 누출되는 사상 초유의 방사능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원인은 현장 기술자들이 안전절차를 무시한 것이 원인이 되어 26일 노심의 연쇄반응이 통제 불가능 상태가 되면서 발생하게 된 것. 연이은 화재로 대량의 방사성 물질이 대기로 퍼져 나갔고, 공기 흐름에 의해 상당히 먼 곳까지 날아갔다. 27일 주민들이 피난하기 시작했고, 28일 스웨

덴 관측소에 의해 방사능 수치가 높은 것이 탐지되고 나서야 소련 정부는 원전사고 발생을 시인한 것으로 알려진다. 1945년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보다 350배에 육박하는 '죽음의 재'를 뿌린 이 사고로 인한 사망자숫자는 명확치 않으나, 98년 우크라이나 정부는 사망자가 3500명 정도라고 밝혔다. 피해자는 수십만〜수백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며, 수많은 기형아 출산 및 유아 사망률도 높이는 등 피폭우려자로 80만명이 분류되었다. 뿐

“20세기 역사에서 전쟁을 제외한 가장 큰 재앙의 날” - 그린피스 상세정보보기 상세정보보기 상세정보보기 상세정보보기

만 아니라 주변 환경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쳐, 체르노빌 원전에서 32㎞ 내에 있는 토양과 지하수원이 방사선에 심하게 오염됐다. 다국적

환경단체인 그린피스(Green Peace)는 이 사고를 “20세기 역사에서 전쟁을 제외한 가장 큰 재앙의 날”로 정하고, 전 세계원자력 전면 통

제조사가 필요하다는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 해 나가고 있다.

광화문 네거리에 충무공 동상 제막

내용시작이순신장군 탄신 423주년을 하루 앞둔 1968년 4월 27일 서울 세종로 광화문 네거리에 충무공 이순신장군 동상이 제막됐다.‘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주관으로 열린 이 날 행사에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 내외 및 각계 인사가 참석하여 선열의 열을 되새기는 자리가 되었다. 애국선열조상위원회 관계자에 따르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조선왕조의 축을 다시 세울 수는 없겠지

만, 일본이 가장 무서워하는 인물을 세운다면 훼손된 정기를 다시 세울 수 있을 것”이라며 당시 의견이 분분하던 세종대왕 동상을 대신하여 충무공 동상을 세종로 네거리에 세울 것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구리로 만든 충무공 동상은 서울대 미대 학장을 지낸 고(故) 김세중(金世中)씨의 작품으로, 좌대(座臺) 높이 12m, 동상 높이 9m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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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세계 여자농구 선수권대회 개막

내용시작"세계 여자농구 선수권대회는 1953년 제1회가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열린 이후 매 4년마다 윤번제로 세계 각국에서 열리고 있다. 1974년 7월에 열린 세계농구연맹 이사회에서 제8회 대회는 대한민국에서 개최할 것을 만장일치로 가결한 결과 서울에서 이 대회가 1979년 4월 29일부터 5월 13일까지 개최될 것이 확정되었다. 당시 세계여자농구 선수권대회가 아시아 지역에서 열리는 것은 처음이었고 한국으로서도 세계적 규모의 공식 선수권대

회를 주최하는 것은 한국농구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세계 여자농구 선수권대회는 세계 각 지역을 대표하는 13개국 농구 강국이 참가하며 농구계에 있어서는 가장 권위 있는 대회중의 하나이다. 발전하는 한국의 모습을 내외에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된 제8회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한국은 2위를 차지하며 우리나라 여자 농구의 세계 최강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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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하와이 미국에 합병

내용시작하와이는 태평양에 있는 하와이 섬 및 제도를 가리킨다. 미국의 50개 주 가운데 가장 남쪽에 위치하는 하와이는 열대성 기후의 거대한 분화구를 가진 화산섬들로서 풍부한 강수량을 가지고 있다. 5세기경 무렵부터 폴리네시아계 민족이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782년에 카메하메하 1세(1739〜89)가 오랜 부족 간의 분쟁을 종식 시킨 이후 1893년까지 통일된 왕국을 이끌었다. 하와이의 위치상 극동과의 통상을 위한 중간 정박지로 많은 미국인들이 거주하였고 1887년 미

국과의 호혜통상조약에 의해 진주만에 해군기지가 들어서게 되었다. 1840년 선교사들의 영향에 의해 헌법 반포하고 독립국가로서 자리 잡은 하와이는 19세기 후반 제당업이 번창하였으나 1890년 이루어진 미국 관세법(關稅法) 개정의 영향에 대해 국수적인 헌법 개정으로 맛선 정부와의 마찰로 결국 혁명에 의한 공화국으로 탈바꿈 하게 되었다. 이후 하와이에서는 제당업의 번창과 함께 주요 수입국인 미국과의 관세문제 해결을 강력히 주장하는 여론과 더불어 미국과의 합병운동

하와이 미국에 합병

이 지속되었다. 미국인의 주도로 제기된 합병론에 힘입어 1897년 합

병조약이 체결되었고 1900년에 준주(準州)를 거쳐 1959년 알래스카

에 이어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었다.

 “명상록”의 저자, 로마 제16대 황제 아우렐리우스

내용시작로마제국의 제16대 황제(재위 161~180)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 4. 26~180. 3. 17)는 스토아학파의 정신이 담긴 “명상록”의 저자로도 유명하다. 아우렐리우스가 황제로 즉위하였던 당시의 로마제국은 경제적·군사적으로 어려운 시기여서 변방에는 외적의 침입이 잦

 “명상록”의 저자, 로마 제16대 황제 아우렐리우스 상세정보보기

아 그는 제국 방비에 힘썼다. 게르만족과의 전쟁에 시달리면서 발칸 북방의 시리아 및 이집트 등의 진영(陣營)에서 집필한 것으로 알려지는 “명상록”에서 그는 스토아적 철인의 정관(靜觀)과 황제의 격무라는 모순에 고민하는 인간의 애조(哀調)가 담겨 있다. “명상록”에 기재되어 있는 몇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나는 시간이 없소.’라고 누군가에게 불필요하게 너무 자주 말하거나 편지에 써서는 안 되며, 급한 일이 생겼다는 핑계

로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 대한 관계에서 생기는 의무를 연달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② 자기영혼의 움직임을 추적하지 않는 자들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③ 당장이라도 세상을 떠날 수 있는사람처럼 모든 것을 행하고, 말하고, 생각하라. ④ 인간에게 자신의 영혼보다 더 조용하고 한적한 은신처는 없다. ⑤ 거품 같은 명성이 너를 옆길로 들게 하는가? 그렇다면 모든 것이 얼마나 빨리 망각되는지, 얼마나 깊은 시간의 심

연이 우리 앞에 있었고 우리 뒤에 올 것인지, 갈채란 것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너를 좋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들이 얼마나 변덕스럽고 판단력이 부족한지,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좁은 공간에 한정되어 있는지 생각해보라.
* 스토아학파 : 모든 탐구의 목표는 평온한 마음과 확실한 도덕을 낳는 행동양식을 인간에게 제시하는 것이라 주장하던 학파

‘to(물)’와 ‘go(강둑)’의 합성어로 이루어진 국명, 토고공화국

내용시작아프리카 서부 기니만(灣) 연안에 있는 나라 토고의 정식 명칭은 토고공화국(Togolese Republic)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영국-프랑스 협정으로 영토가 분할되었고 동부의 프랑스령 토골란드 지역은 1946년 UN의 신탁통치령이 되었다가 1960년 독립하였다. 885년 토고 해안에 대한 독일의 지배권이 국제

‘to(물)’와 ‘go(강둑)’의 합성어로 이루어진 국명, 토고공화국 상세정보보기

적으로 인정되었다. 국토가 위아래로 좁고 긴 형태여서 기니만에 면한 해안선은 70km로 짧으며 수도인 로메가 자리 잡고 있으며, 토고라는 국명은 ‘to(물)’와 'go(강

둑)'의 합성어로, 19세기에 독일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 ‘강 근처’란 뜻을 지닌 조그만 어촌이었던 데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토고는 한국과 1974년 9월 이래 국교단절 상태

에 있다가, 1991년 재수교 하였다. 일반인들에게 토고라는 나라가 알려진 것은 2006년 독일월드컵이 계기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화
영국이 낳은 위대한 지휘자

내용시작다른 유럽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영국의 오페라와 관현악을 헌신적인 노력을 통해 개선시킨 영국의 지휘자이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비첨(Sir Thomas Beecham, 2nd Baronet, 1879.4.29 ~ 1961.3.8)은 음악을 좋아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다양한 공연의 관람을 비롯 여러 음악가들과의 만남을 가졌다. 정식적인 학교 음악교육은 받지 않았지만 타고난 음악적 감각덕분에 성공적인 아

마추어 지휘자로 활약하였다. 1905년 런던에서 공식 데뷔무대를 성황리에 마친 비첨은 유럽 각지의 유명 음악가들을 영국에 초청하여 열정적인 무대를 선보였으며 그 자신 또한 연주여행을 통해 영국의 오케스트라를 해외에 소개하는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 비첨은 자신의 재산을 영국의 음악적 발전에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이 같은 열정은 1947년 런던에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창설하며

영국이 낳은 위대한 지휘자

절정에 달했다. 7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연주여행을 다녔던 비첨은 영국이 낳은 위대한 지

휘자로서 근대 영국 공연문화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16년 기사작위, 1957년 명예훈장을 받았

다.

빙 크로즈비

내용시작1930 - 40년대 배우이자 가수였던 빙 크로즈비(Crosby, Bing, 1904.5.2~1977)는 때마침 등장한 유성영화에 힘입어 동 시대 가장 인기 있었던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법률학도로서 음악계에 데뷔한 그는 알 링커와 함께 함께 결성한

리듬보이스를 거쳐 1931년 ‘재즈의왕(King of Jazz)’이라는 유성영화로 스크린에도 진출하였다. 본격적인 영화 활동과 더불어 국제적인 스타로 명성을 얻은 그는 루이 암스트롱과 같은 재즈 연주가들과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고 음반활

빙 크로즈비

동에도 전념하였다. 20세기 가장 대중적인 노래 중 하나로 평가받는 ‘화이트 크리스마스(White Christmas)’는 예나 지금이나 해마다 때가

되면 등장하는 대표적인 캐럴로 기억되고 있다. 1944년 ‘나의 길을 가련다 (Going My Way)’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1962년 그래

미 수상식에서 평생 공로상을 받았다.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 육당 최남선

내용시작사학자이자 문인으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체시를 발표하는 등 한국 근대문학의 지도자로 평가받는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1890.4.26~1957.10.10)은 언문일치의 신문학운동과 국학관계의 개척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민족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문”을 작성하였던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말기에 학병권유등의 친일행위를 일삼으며 ‘기나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 육당 최남선

긴 매국'을 시작한 대표적 친일파로 꼽히는 오점을 남겼다. 자신의 매국행위에 대하여 자열서를 통해 “그것은 단순히 ‘돈을 위한 방향전환'에 지나지 않았으며, 나는 의사(義士)가 되기보다 학자(學者)가

되기를 바랬기 때문에 학자보다 의사가 되라는 일반의 기대를 저버렸다”고 변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육당 최남선의 친일행위를 제외하고는시인·수필가로서의 문학적 업적과 계몽주의와 민족주의를 견지한

사상 가·출판인으로의 공헌, 조선의 상고사를 재건하려는 역사학자로서의 노력 등 다방면에 걸쳐 뚜렷한 자취를 남긴 것만은 사실이다.

과학
우리나라 국보 제2호는?

내용시작현재 종로에 있는 탑골 공원 내에 자리 잡고 있는 원각사지십층석탑. 높이 약 12m의 이 석탑은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의 것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탑 구석구석에는 화려한 조각이 새겨져 있으며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특이한 경우로서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10층 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더욱 주의를 끌고 있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원각사지십층석탑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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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최고의 수학자

내용시작놀랄만한 수학적 재능을 지닌 가우스(Karl Friedrich Gauss, 1777.4.30~1855.2.23)는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수학의 거상으로 버티고 서 있다. 그는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수학자이며 아르키메데스, 뉴

턴과 더불어 3대 수학자로 꼽힌다. 가우스의 가장 위대한 단행본은 현대 정수론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중요한 책인 “수론 연구, Disquisitiones arirhmeticae”이다. 또한 그는 천문학, 측지학, 전기학에서도 두

19세기 최고의 수학자

드러진 공헌을 하였다. 1801년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여 빈약한 자료를 가지고 당시 막 발견된 케레스(Ceres) 소행성의 궤도를 계산하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 직에 있었던 괴팅겐 대학의 수학교수와 천문대장이 되었다. 1821년 하노버의

삼각측량을 하였고, 자오선을 측정 하고, 회광기(또는 일조계)를 발명하였다. 이렇듯, 가우스는 대수학/해석학/기하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겨, 19세기 최대의 수학자라고 일컬어지며, 수학에 이른바 수학적 엄밀성과 완

전성을 도입하여, 수리물리학으로부터 독립된 순수수학의 길을 개척하는 근대수학을 확립하였다. "수학은 과학의 여왕이고 정수론은 수학의 여왕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더 멀리 더 빠르게

내용시작1952년 5월 2일 은빛 동체를 뽐내는 날렵한 비행기 한 대가 제트분사를 하며 활주로를 날아오르며 인류 최초로 제트여객기의 시대를 여는 역사적인 순간이 연출되었다. 드 해빌랜드사(De Havilland 社)가 설계한 세계최초의 제트여객기 코메트(Comet)가 영국해외항공회사(BOAC)의 런던〜요하네스버그의 정기 노선에 취항한 것이다. 해성을 뜻하는 이름의 코메트는 정원 36명에 4기의 제트엔진을 장착하고 고속으로 하늘을 누비는 획기적인

이동수단이었다. 그러나 1년여의 순조로운 운항을 지속했던 코메트는 1953년, 1954년 잇따른 공중폭발을 일으키며 많은 인명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동체결함으로 인한 이 끔찍한 사고는 비싼 대가를 치르며 제트수송기의 설계에 많은 교훈을 주었고 이후 비약적으로 발달한 비행기제작술은 점보제트기를 거쳐 오늘날 4세대 제트여객기가 하늘을 날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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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간 해상 조난 신호의 공식언어로 사용되었던 모스부호

내용시작“우표와 함께 떠나는 시간여행”을 모스부호로 표현하면 (우)-·- ···· (표)--- -· (와)-·- ·- ·
(함)·--- · -- (께)·-·· ·-·· - ··-
(떠)-··· -··· - (나)··-· · (는)··-· -·· ··-·
(시)--· -·· (간)·-·· · ··-· (여)-·- ··· (행)·--- · ··- -·- 으로 표기된다. 미국의 화가이자 전신발명가인 모스(Samuel Finley Breese Morse, 1791.4.27~1872.4.2)는 예일대학교

91년간 해상 조난 신호의 공식언어로 사용되었던 모스부호

를 수학한 후 초상화가가 되었으며, 내셔널 디자인 아카데미의 초대 교장과 뉴욕대학교의 미술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1832년 미술연구차 유학하다가 돌아오던 선상(船上)에서 최신 전자기학(電磁氣學)에 관한 내용을 알게 되어, 전신기를 만들어 보기로 결심, 대학 동료

인 L.D.게일과 공장주(工場主) A.베일의 협력을 얻어 독자적인 알파벳 기호와 자기장치(自記裝置)를 1837년에 완성하였다. 그 기호가 개량된 것이 모스부호이다. 1838년 원형(原型)이 구상되고 1843년에 실용되었다. 모스 부호는 91년 간 해상 조난 신호의 공식적 언어로

유용하게 쓰였다. 타이태닉 호가 마지막 순간까지 SOS 신호를 보낼 수 있었던 이유도 모스 부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으로 1999년 모스 부호는 인공위성으로 조난 신호를 자동 전송하는 시스템에 자리를 내주었다.

금주의 노벨상

[노벨상] 전자(electron)의 발견

전자(electron)의 발견 내용시작1897년 영국의 물리학자 톰슨(J. J. Thomson)은 음극선이 원자보다 작은 동일한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즉 모든 물질은 그 원천이 무엇이든 같은 종류의 입자들을 포함하고 있고 이 입자는 원자보다 훨씬 더 가볍다는 결론을 얻은 것이다. 이 발견은 무엇보다도 원자의 구조에 대한 지식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 사건으로서 톰슨을 가장 위대한 과학자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후일 스토니(G.J.Stoney, 1826~1911)에 의해 전자(electron)로 명명되어진 이 입자를 원시원자(primordial atom) 또는 미립자(corpuscle)라고 불렀고 전자의 전하 대 질량의 비(e/m)를 계산한 실험을 통해 전자의 존재를 입증함으로써 1906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 하였다. 톰슨의 발견은 이후 물리학 분야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으며 오늘날 현대 과학의 중요한 축인 원자 물리학을 정착시키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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