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목 | 시간여행 제17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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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 2010. 7. 19. |
| 첨부파일 | 첨부파일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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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출은 광복 후 미군정하에서 국제연합의 감시 아래 실시한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로 구성된 제헌국회에서 7월 20일 제헌의원들에 의한 간접선거를 통해 이루어 졌다. 그 결과 득표율 92.3%로 이승만 후보가 대통령에, 부통령 선거에서 출석의원 197명 가운데 133표를 얻은 이시영 후보가 부통령으로 선출된 것이다. 비록 이날 치러진 취임식은 남한만의 총선거로 구성된 반쪽 국회에 의하여 실시된 대통령선거의 결과였지만 이를 토대로 8월 15일 '정부수립 선포식'을 거행함으로써 제1공화국의 출범이 이루어졌으며 한국 역사상 최초로 공화헌정체제(共和憲政體制)를 시작하였다는 점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 다. 이시영 부통령은 임기 1년을 남긴 1951년 이승만 대통령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하고 항의의 뜻으로 부통령직을 사임하였고,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무리한 정치적 선택을 통하여 4선 되었으나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 하야하였다. ![]()
목적으로 세워진 이곳에는 체육관, 수영장, 전시실, 극장, 시청각실, 과학전시실, 과학실험실, 과학오락실, 과학공작실, 음악실, 미술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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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록 합리적인 할당량 관리를 통한 지속적인 고래잡이를 위해 1946년 설립된 IWC(국제포경위원회)는 그간 관례적으로 할당량 상향 조정으로 해마다 포경수량을 늘려왔었다. 그러나 1972년 스톡홀름 유엔 인간환경회의의 '고래 멸종 위기'경고와 더불어 내부에서 일어난 자원고갈 위기의식에 따라 이날 전격적인 포경금지결정을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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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으로 네팔인 등반가 텐징 노르가이와 함께 세계 최초로 5월 29일에 세계 최고봉인 8,848m의 에베레스트 산 정복에 성공했다. 그 위업을 인정받아 7월 16일에 기사작위를 받았다. 1955년에 그의 등반 경
험을 담은 '대모험 High Adventure'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는 1960년대 초에도 여러 차례 에베레스트 지역을 등반했으며, 그 지역에 사는 셰르파족을 위해 학교·병원· 비행장 등을 건설했다. 1954년에는 뉴질랜드의 히말라야 원정대 대장이 되었고, 1957〜1958년 뉴질랜드의 남극횡단 원정대에서도 활약하였다. 1960〜1966년 뉴질랜드 ·미 국 ·영국의 합동 히말라야 원정대 및 1967년 남극 히셀봉 원정대를 지휘하였다. ![]()
교부의 임명에 따라 이듬해 감리교 목사인 H. G. 아펜젤러와 함께 한국에 입국했다. 1886년 한국 최초의 고아학교(고아원)를 설립했는데 이 학교가 경신학교의 전신이 되었으며, 1887년 9월에는 새문안
교회를 설립했다. 조직 및 1915년 경신학교에 대학부를 설치하여 연희전문학교의 설립에 바탕이 되었다. 번역사업에도 커다란 기여를 하여 한국 최초로 찬송가를 간행했다. 이와같이 언더우드는 한국 개화기에 종교/정치/교육/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많은 공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
노력하였다. 63년 독립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원수로 구성되는 아프리카통일기구(OAU) 설립해 60년대 이후 아프리카대륙에 불어온 열강에 대한 독립의 열풍으로 생겨난 많은 신생국가들의 통합과 분쟁해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평생을 에티오피아의 개혁과 아프리타 지역의 평화정착에 힘썼으나 1973년 찾아온 사상 최악의 기근으로 말미암아 74년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폐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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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건너가 공부하였다. 유럽생활은 그에게 자유, 정의, 기본권 등 선진적인 시민의식의 체험과 함께 시민 혁명의 지적 기반이 되었던 인물들의 사상을 통해 남미대륙의 현실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다. 베네수엘라로 돌아온 볼리바르는 곧 민족주의 해방 전쟁에 뛰어들었다. 수차례의 패배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독립에 대한 당위성과 구체적인 방법 등을
제시하며 끊임없이 그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819년 각고의 노력 끝에 뉴 그라나다(현 콜롬비아)를 필두로 베네수엘라, 에콰도르를 해방시켜 콜롬비아공화국을 수립하였으며 이어 1824년 페루를 해방시켰고, 1825년 볼리비아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각국 간의 대립과 이해관계가 얽혀 1830년 대 콜롬비아 공화국이 해체되면서 끝을 맺었다. 27세의 젊은 나이에 독립투쟁에 몸담았고 라틴아메리카의 헌법을 기초했으며 하나의 통합된 이상국가의 실현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볼리바르였지만 결국 통합을 원치 안는 열강들의 분열정책과 내부의 적들에게 환멸을 느끼며 병상 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1889년 그의 이상은 미국의 주도로 이루어진 워싱턴 회의에서 산산이 부서져 버렸으나 1826년 열린 에스파냐계 신생공화국의 유대를 목표로 한 파나마회의는 ‘범 아메리카주의’의 기초가 되어 오늘날 까지 그의 이상을 이어오고 있다. ![]()
아시아 각국은 자국의 방위에 있어서 대미 의존도를 줄이고 내란 등의 국내문제는 독자적으로 해결하도록 하며, 미국 대 아시아 원조는 군사적 원조 보다는 경제적 원조중심으로 바꾼다는 정책적 변화를 담고 있다. 이 전략은 1970년 전 세계에 확대 적용되어 베트남에서 미군의 철수, 중국의 유엔 가입 승인 등 미국 외교정책의 변화와 대한정책에 까지 반영되어 1971년 까지 약 2만 명의 주한 미군 감축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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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시킨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와 프로이센 양 국민을 격앙케 하여 1870년 7월 19일 프랑스가 선전포고를 하였다. 츠요새가 함락됨으로써 1871년 1월 마침내 파리의 성문을 열어주게 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에 의한 교황청의 세속 권력이 붕괴되고 이탈리아와 러시아의 군사력이 강해짐에 따라 1차세계대전까지 불안정한 유럽정세를 가지게 되었다. ![]()
는 인간에 대한 극단의 객관적인 시각이 돋보이는 “무당거미(1921)”의 연출로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았다. 주로 사실주의에 입각한 연출기법으로 일관한 페데르는 냉철한 시각, 서정적이고 풍자적인 형식의 다양한 작품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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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습으로서 일하면서 ‘햄릿’에 매료된 그는 극작가를 목표로 파리로 떠났다. 아버지의 친구의 소개로 오를레앙공작(후에 프랑스 국왕이 된 루이 필립)가의 비서실에 근무하며 문학이나 역사 공부에 힘쓰는
한편 1829년부터 ‘앙리 3세와 그 궁정’과 같은 일련의 희극을 발표하며 성공해 인기작가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즈음 역사교사인 오귀스트 마케를 만난 뒤마는 역사소설에 관심을 두었고 당시 구독자를 늘리기 위한 신문사의 소설연재 유행과 맞물려 ‘몽테크리스토 백작’, ‘삼총사’ 등 불후의 명작을 연제하며 막대한 부를 얻었다. 뒤마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1847년 역사극장을 열어 자신의 소설들을 연극으로 상연하며 생에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847년 프랑스 혁명으로 인하여 그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국왕의 지원이 끊기고 혼란기의 극장 경영의 어려움과 뒤마 자신의 사치스러운 생활 때문에 1851년 파산하기에 이른다. 제기를 꿈꾸며 자신이 직접 신문을 발행하기도 하였지만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가고 1870년 초라한 그의 집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
가졌다.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신할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예술가 백남준, 그 자유로운 영혼의 실험정신과 도전정신, 열정과 용기는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였고 음악가, 미술가, 행위예술가로서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통해 그만의 독특한 예술을 우리에게 선사해 주었다. 백남준은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러나 그 후로도 믿기지 않을 정도의 열정으로 그의 작품 활동은 계속되었다. 2006년 1월, 그는 우리는 떠났지만 우리에게 백남준과 그의 작 품, 그의 정신은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우정사업본부는 지난 1월 29일 그의 추모 1주년을 기리며 그의 작품 중 ‘TV부처(1974)’와 ‘다다익선(1986)’, ‘메가트론/매트릭스(1995)’, 그리고 ‘엄마(2006)’를 우표로 발행하였다. ![]()
에 대한 기여로 명성을 얻었다. 화가 및 사진작가로서 그는 주로 빛을 이용한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필름에다 직접 사진을 제작했으며 투명하거나 광택있는 표면에 유화작업으로 움직이는 빛의 효과를 담은 광변조기를 개발해냈다. 미술교사로서 전문적인 기술보다 학생들의 자연스러운 시각적 재능을 개발하는데 역점을 둔 교과과정을 고안해 널리 보급했다. 그의 표어는 "누구에게나 재능이 있다"는 것이었
다. 이에 따라 미술훈련보다는 '전인교육'이 강조되었다. 1935년 나치 치하의 독일을 피해 런던으로 갔다가, 1937년 시카고에서 바우하우스 교과과정에 입각한 최초의 미 국 미술학교인 뉴 바우하우스(나중에 일리노이 과학기술연구소 산하 디자인 연구소가 됨)를 설립하고 그곳의 교장이 되었다. 색채와 질감, 빛, 형태의 균형 등 순수 시각적 인 기본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는 그의 비구상미술은 20세기 중엽에 순수미술과 응용미술 전 분야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 받는다. ![]()
휘하여 정확한 소묘능력 위에 신선하고 화려한 색채감이 넘치는 근대적 감각을 표현하였다.
작을 남겼을 뿐 아니라, 만년에 시력이 극도로 떨어진 뒤에 손댄 조각에까지 더없는 걸작을 만들어냈다. 한 성격 때문에 독신으로 보냈고, 그의 인간혐오증은 늙어갈수록 더하여 고독한 가운데 파리에서 83년의 생애를 마쳤다. me Camus(1869~70)', '뉴올리언스 목화 거래소, New Orleans Cotton Office(1873)', '압생트, The Absinthe Drinker(1876)'등이 있다. ![]()
을 반박하는 연구적 성과를 발표하였다. 멘델은 1866년 학회지에 "식물 교잡에 관한 실험(Versuche über Pflanzen-Hybriden)"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어떤 입자에 가 까운 물질에 의해 유전현상이 나타난다는 입자유전설을 주장한 것이다. 멘델의 학설은 당시 난해하고 추상적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결국 그의 사후 10년 이 지나서야 3명의 학자에 의해 재발견되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
통해 대량 생산하며 20세기 초 미국의 자동차공업 전국시대를 열게 되었다.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 델 A'는 1927년부터 생산된 것으로서 모델 T의 뒤를 이어 개발한 4기통 3.3리터 배기량의 엔진을 장착 한 또 다른 "모델 A"이다. ![]()
브라운은 한때 모든 시선을 집중 받으며 논란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바로 그가 세계최초의 시험관 아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트럭운전사인 아버지 길버트 브라운 부부는 9년간의 오랜 불임 치료 끝에 아이가 없자 케임브리지대학 생리학자인 에드워즈 박사팀으로부터 체외수정시술을 받아 임신에 성 공함
으로써 생명공학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인간에 서는 처음 실시된 이 시술로 인하여 도덕적 논란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체외수정시술은 지속적인 발전을 보여 왔고 오늘날 시험관 아기들의 건강상태나 기형 확률등도 정상임 신과 동일한 수준을 보이며 전 세계 인구의 약10~20%에 해당하는 불임 부부의 대부분이 이 기술을 이용할 정도로 보편화되었다. [노벨문학상]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 헤밍웨이
[노벨물리학상] 에너지는 일정한 양으로만 원자에 의해 흡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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