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의사 탄신 100주년 기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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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번호 | 2621 |
종수 | 1 |
발행량 | 1350000 |
디자인 | 윤봉길의사와 선서문 |
인쇄 및 색수 | 그라비어 6도 |
전지구성 | 5 × 3 |
디자이너 | 신재용 |
발행일 | 2008. 6. 20. |
액면가격 | 250원 |
우표크기 | 36㎜ × 34.5㎜ |
인면 | 36㎜ × 34.5㎜ |
천공 | 13 |
용지 | 그라비어 원지 |
인쇄처 | 한국조폐공사 |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각오하였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이 길을 떠난다는 결심이었다.” - 1930년 10월 18일, 중국 칭다오에서 보낸 윤봉길 의사의 서신 중에서.
일제 치하에 있던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난 윤봉길은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에 고무되어 일본 제국주의의 교육을 거부한 채 사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스스로 신학문을 공부했던 당찬 소년이었다. 야학과 독서회를 운영하고 농촌협동조합을 조직하고 농민을 위한 책을 쓰는 등 농민계몽과 농촌부흥을 위해 농민운동가로 활동했던 그는 23세가 되던 1930년 3월, 나라와 겨레를 위한 보다 더 큰 뜻을 세우고 중국으로 향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가인 김구 선생을 만난 청년 윤봉길은 조국의 독립이라는 대의를 밝히고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거행되었던 일본의 전승기념 축하식에서 일본군의 수뇌들이 서 있던 단상을 향해 폭탄을 던지게 된다. 일제 치하에 있던 우리 민족의 가슴 아픈 현실을 국내외에 알리고 침체에 빠져있던 항일독립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순간이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1932년 12월 19일, 25년의 짧은 생을 뒤로 한 채 일본 가나자와시 교외에서 총살형을 당한다. 이는 조국을 위해서 강의(剛毅)한 사랑을 바치겠다던 서신을 띄운 지 이 년여 뒤의 일이다.
윤봉길 의사의 탄신 100주년이 되는 지금, 조국의 아들로서 그가 택한 숭고한 죽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새겨보며 윤봉길 의사의 모습과 한인애국단의 선서문을 담은 기념우표를 발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