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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취상식]우리나라 전보의 역사⑴
등록일 2016.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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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전보의 역사⑴
1. 대조선 : 대한제국 시기(1885~1905)

전신선을 이용한 전보는 1837년 미국의 새뮤얼 모스(Samuel Finley Breese Morse)가 인자기를 발명하고 전신부호 특허를 받아 1844년 워싱턴과 볼티모어 간모스부호에 의한 송수신 전신사업을 시작하고 40여 년 후 세계 각국에서 앞다투어전신선을 가설하면서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이 글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전보업무가 처음 시작된 1885년부터 1970년까지 이 땅에서 우리가 사용한 전보 실체와 관련 자료들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전보의 역사를 모스(1791~1872)개관하되 각 시기별로 구분하여 정리·소개코자 한다.

전보분야는 우표에 비해 실제 사용된 숫자가 적어 수집하기도 어렵고, 특히 한일통신합동협정 이전의 자료는 일부 자료를 제외하고는 거의 잔존량이 없으며, 질곡의 세월을 살아 온 민족적 특수성 때문에 1945년 해방직후나 1950년~1953년 6·25전쟁기의 자료 등도 수집하기가 어려워서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발표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임을 혜량해 주시기 바란다.

이 글이 우리나라 전보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나아가 연구·수집동호인들과의 정보 공유와 교류는 물론, 전보 연구의 단초로 활용되기를 소망해 본다.

우리나라 전보의 역사는 1885년(고종 22년) 9월 28일 서로전선(한성-의주)을 건설하던 청국이 한성전보총국(청국의 조선출장소에 해당)과 인천분국 간에 전신선을 개통하고 상해에서 수입한 미국산 모스 인자기를 사용하여 업무를 시작한데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는 청국의 것으로 영어, 불어, 한자만을 쓰는 것이었다.

또한 일본이 1883년 조일해저전선부설조약을 체결하고 1884년 2월 말 부산과 나가사키 간 해저전선을 개통, 부산에 일본전신국을 설치하고 영업을 개시하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본과 일본인을 위해서만 사용되었으므로 논외로 한다.

1886년 우리 정부기관인 조선전보총국이 설치되어 청국이 관장하던 서로전선을 제외한 전체선로를 관장하게 되었으며 1888년 남로전선(한성-부산)을 개통하고 6월 1일에는 전보장정(전문 32조 전신규정, 국문전신부호 제정, 거리 차등제 요금)을 제정, 전보업무를 시행하였다.

수집된 자료들을 통해 우리나라 전보 초창기의 모습을 살펴 보자.

가. 전보국 전무국기[그림 1]

1887년 3월 13일 조선전보총국 초대 총판으로 임명된 홍철주의『전보국 전무국기(電報局 電務局記)』를 보면 당시의 모습을 어느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전략> 전신으로 필묵을 대신하였고 전광(電光)을 인도하여 우통(郵筒)을 대체하였으니 일순간에 천리를 통신하였고 십점(十點)으로만언(萬言)을 표현하였다. 그 신기한 용법과 신속한 행함은 또한 영이(靈異)하고 광박(廣搏)함이 아니겠는가! <중략> 지금 세상에 살면서 현대의 도를 존행하지 않을 수 없다. 국용(國用)에 이롭고 사정(事情)을 통달(通達)하며 신기(神機)를 운행(運行)하고 응호(應護)에 신속함이 어찌 이보다 나을 수가 있겠는가? 이것이 본국이 설치된 원인일 것이다. <중략> 한성으로부터 두 가닥으로 나누어 남으로는 부산에 이르러 구라파에 달하였고, 북으로는 평양을 넘어 의주를 거쳐 봉황성에 다달았으며 서로는 양화진을 거쳐 인천에 이르렀으니 바둑을 포석하듯 사방으로 연결되었다. 본국에서는 남방으로 뻗은 선을 전관했으니 요충에 배치되어 관계가 더욱 소중하였다. <후략>

같은 날 발표된 직제를 보면 조선전보총국 중앙에 총국, 공주·전주·대구·부산에 분국을 두고 지방 분국에서는 주사가 책임자였다. 1888년 6월부터 시행된 전보업무는 관보(官報), 국보(局報), 사보(私報)로 구분되었으며 관보는 무료취급하고 수신인 주소·성명을 요금계산에 삽입하였다. 1891년 6월 25일에는 북로전선(한성-춘천-원산)이 개통되었다.

나. 조선전보국 전보송달지[그림 2, 2-1]

조선전보국 한글 전보송달지는 현재까지 단 두 장만이 발견되어 한 장은 우정박물관에, 한 장은 필자가 소장하고 있다. 조선전보국이라 쓰인 전보송달지는 애초에는‘대조선전보국’이라 썼으나 1889년 4월 7일 청국(중국)의 항의로 전보송달지나 봉투에‘대’자를빼고‘조선전보국’으로쓰게 된 것이다. 전보식지(전보양식)에 표기하는 나라명까지도 남의나라 눈치를 봐야 했던슬픈 역사의 편린이다.

대조선전보국’이표기된 봉투는 우정박물관의진기홍 선생 기증유물에서볼수있다.

[그림 2-1]은 영문전보 송달지이나한글전보송달지로 사용한 경우도 발견되었다. 1893년 8월 17일에는 조선전보총국을 전우총국으로 개편하여 내체우신, 외체우신 및 인천분국을 두었다.

다. 외서발전존근과 외서발전[그림 3]

1894년 7월 20일 갑오개혁 시 의정부관제에 따라 공무아문 전신국이 되었는데, [그림 3]은 사용례가 발견되지는 않았으나, 공무아문 전신국 시절에 사용[그림 3] 된 중앙정부부서(관보) 전보접수양식으로 외서발전 존근(外署發電存根) 아래쪽에 전보를 수신할 기관명을 적고 전보의 호수, 글자수, 연월일시분을 기재하여 우측 면은 전보를 접수한 공무아문 전신국에서 보관하고 좌측 면은 전보의뢰인(정부 부서)에게 교부한 것으로 추정 된다.

양식의 중앙에‘공무아문지인(工務衙門之印)’이 찍혀 있고, 좌측‘외서발전(外署發電)’에도 날인되어 있다.이 자료는 현재까지 발견된 유일한 것이다.

라. 대조선 보비수조[그림 4, 4-1]

개국 501년(1892년)에 사용된 보비수조(報費收照)는 현재의 전보접수증으로 대조선 전보국으로 인쇄되어 사용국명을 적어 넣게 되어 있는 양식이다.대조선이 표기된 양식이 사용된 것을 보면 청국의감시가 좀 느슨해져서일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대구 제365호 26자 요금 10냥 4전, 개국 501년12월 23일 12점(時를 點으로 표기) 26자를 전보로보내는데 요금이 무려 10냥 4전이니 요즘으로 환산하면(학자마다 차이가 있어 닷 냥이 대략 20만~30만 원 정도) 적게 잡아도 40만원이 되는 셈이다. 전보요금으로 보면 초기 전보제도는 국가의 신속한 행정명령 전달을 위한 관보, 전보국 간의 업무처리를 위한 국보 위주였고 일반인이 이용할수 있던 사보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특정인들만이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자료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보비수조(전보접수증)이다.

[그림 4-1]은 대구전보사에서 서울로 보내는 제20호 33자에 66전을 받고발급한 광무 3년(1899년) 9월 3일 오전 9시 40분 보비수조이다.

마. 동학혁명 시 전라감사의 전보 초안[그림 5]

1894년 12월 12일(양력 1895년 1월 7일) 전라감사 이도재가 순무영(양호순무사 신정희)으로 보낸 전보 초안은 동학혁명과 관련된 희귀한 자료로 전보내용에 나오는 손화중[孫華中은 자, 본명은 정식(正植)]은 전북 정읍 출신으로 갑오농민전쟁 당시 남접 농민군 최고 지도자중 한 사람이자 동학 대접주였다. 1894년 12월 1일 대세가 기울자 농민군을 해산하고 고창군 부안면 안형리로 피신했으나 1895년 1월6일 재실지기 이봉우의 고발로 관군에 체포된뒤 서울로 압송되어 1895년 3월 29일 전봉준, 김덕명, 최경선, 성두환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 전보 초안은 당시 우리 전보사의 송수신문자가 한글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우리나라 전보의 역사(1)-2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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