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은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힌다. 노예를 해방했고, 남북전쟁을 이끌며 미연방의 분열을
막아 지금의 미국이 있게 한 위인이다. 그 링컨이 젊은 시절 정치의 꿈을 키우고 성장한 곳이 일리노이
주다. 주도(州都)인 뉴스프링필드는 링컨의 도시다. 이곳을 여행하는 사람은 링컨기념물과 관공서 건물을
빼면 다운타운에서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입을 모은다. 링컨이 살았던 집, 그가 점원으로 일하던
가게, 기념박물관, 도서관, 링컨묘지 등이 관광객을 부른다.
링컨이 캔터키 주에서 일리노이로 이주해 처음 정착한 곳은 뉴스프링필드에서 그리 멀지 않은
뉴세일럼이라는 소도시다. 당시 떠오르는 상업 중심지였던 이곳에서 링컨은 우정사업과 인연을 맺었다.
1833년 그의 나이 24세 때 우체국장에 임명된 것이다. 3년 뒤 우체국이 문을 닫을 때까지 링컨은 1주일에
두 번 오는 편지를 받아 직접 배달 일까지 했다. 당시는 수신인이 요금을 내던 시절이어서 배달과 요금
수납을 동시에 해야 했다. 그는 편지를 모자에 담아 다녔고, 사람들은 그런 그를 ‘정직한
에이브(에이브러햄)’라 불렀다.
링컨은 우체국에서 틈만 나면 정치철학 책을 읽었고, 공짜로 볼 수 있는 신문을 꼼꼼히 살폈다. 그렇게
생활한 지 1년 만에 링컨은 지방의회선거에 나가 당선했다. 우체국에서 정치를 공부했고, 우체국장
신분으로 정계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다시 1년 뒤 의회가 폐회하자 링컨은 변호사로 변신했고,
뉴세일럼을 떠나 뉴스프링필드로 옮겨 두 번 의회선거에 당선하면서 백악관으로 가는 정치적 자산을
쌓아갔다.
미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우체국장을 지낸 사람은 링컨이 유일하다. 미 우정청(USPS)으로서는 큰
자랑이다. 탄생 200주년을 맞아 기념우표를 내는 것은 무척 당연한 일이다.
우체국장 출신의 미국 대통령은 링컨 외에 한 사람 더 있긴 하다. 반소·반공을 내세우며 한국전쟁 때
군사를 파병한 33대 해리 트루먼이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며칠 전 트루먼은 미주리 주
캔자스 시 인근의 작은 마을인 그랑뷰에서 우체국장 시험을 치러 합격했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는
우체국장으로서 몇몇 공문에 결재까지 했으나 실제 근무하지는 않았다. 직무를 태만히 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웃 중에 전쟁터에서 남편을 잃고 어린 두 자녀를 혼자 키우는 엘라 홀이라는 여성이 있었다.
이 여성이 돈이 없어 쩔쩔매는 것을 보고 “나 대신 우체국을 맡아 운영하라”며 자리를 넘겨준 것이다.
당시 그랑뷰 우체국장의 월급은 월 50달러. 농장에서 근로자 2명을 고용할 수 있는 큰 돈이었다.
트루먼은 자기 앞으로 나오는 이 돈을 한 푼도 손대지 않고 엘라에게 건넸다. 우체국장 운영권 양도가
당국의 승인을 받지 않은 비공식적 행동이었지만 트루먼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긍정적 에피소드로
전해진다.
미국인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건국의 아버지’ 6인 중에도 우정인이 있다.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이다.
프랭클린이 위대한 정치가이자 외교관, 과학자, 저술가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피뢰침을 발명한 근대
기상학의 아버지라는 것도 그 분야 사람들은 안다. 그런데 우정인, 그것도 원조 우정인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프랭클린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생겨나기 전인 1737년 31세의 나이로 필라델피아에서 우체국장에
임명됐다. 이후 영국 의회를 설득해 미 전역의 우체국장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았고, 1775년에는 훗날
우정청이 되는 기관의 장, 즉 초대 우정청장이 됐다. 그 유명한 독립선언문 기초위원 일을 하면서도
우정청장직에 있다가 건국한 지 두 달 만인 1776년 11월 사위에게 2대 우정청장을 넘겨줬다.
이렇게 보면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정치인, 한국과 밀접한 인연이 있는 대통령이 모두 우정인이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우정인이라면 자긍심을 가져도 좋을 사실들이다.
막아 지금의 미국이 있게 한 위인이다. 그 링컨이 젊은 시절 정치의 꿈을 키우고 성장한 곳이 일리노이
주다. 주도(州都)인 뉴스프링필드는 링컨의 도시다. 이곳을 여행하는 사람은 링컨기념물과 관공서 건물을
빼면 다운타운에서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입을 모은다. 링컨이 살았던 집, 그가 점원으로 일하던
가게, 기념박물관, 도서관, 링컨묘지 등이 관광객을 부른다.
링컨이 캔터키 주에서 일리노이로 이주해 처음 정착한 곳은 뉴스프링필드에서 그리 멀지 않은
뉴세일럼이라는 소도시다. 당시 떠오르는 상업 중심지였던 이곳에서 링컨은 우정사업과 인연을 맺었다.
1833년 그의 나이 24세 때 우체국장에 임명된 것이다. 3년 뒤 우체국이 문을 닫을 때까지 링컨은 1주일에
두 번 오는 편지를 받아 직접 배달 일까지 했다. 당시는 수신인이 요금을 내던 시절이어서 배달과 요금
수납을 동시에 해야 했다. 그는 편지를 모자에 담아 다녔고, 사람들은 그런 그를 ‘정직한
에이브(에이브러햄)’라 불렀다.
링컨은 우체국에서 틈만 나면 정치철학 책을 읽었고, 공짜로 볼 수 있는 신문을 꼼꼼히 살폈다. 그렇게
생활한 지 1년 만에 링컨은 지방의회선거에 나가 당선했다. 우체국에서 정치를 공부했고, 우체국장
신분으로 정계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다시 1년 뒤 의회가 폐회하자 링컨은 변호사로 변신했고,
뉴세일럼을 떠나 뉴스프링필드로 옮겨 두 번 의회선거에 당선하면서 백악관으로 가는 정치적 자산을
쌓아갔다.
미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우체국장을 지낸 사람은 링컨이 유일하다. 미 우정청(USPS)으로서는 큰
자랑이다. 탄생 200주년을 맞아 기념우표를 내는 것은 무척 당연한 일이다.
우체국장 출신의 미국 대통령은 링컨 외에 한 사람 더 있긴 하다. 반소·반공을 내세우며 한국전쟁 때
군사를 파병한 33대 해리 트루먼이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며칠 전 트루먼은 미주리 주
캔자스 시 인근의 작은 마을인 그랑뷰에서 우체국장 시험을 치러 합격했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는
우체국장으로서 몇몇 공문에 결재까지 했으나 실제 근무하지는 않았다. 직무를 태만히 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웃 중에 전쟁터에서 남편을 잃고 어린 두 자녀를 혼자 키우는 엘라 홀이라는 여성이 있었다.
이 여성이 돈이 없어 쩔쩔매는 것을 보고 “나 대신 우체국을 맡아 운영하라”며 자리를 넘겨준 것이다.
당시 그랑뷰 우체국장의 월급은 월 50달러. 농장에서 근로자 2명을 고용할 수 있는 큰 돈이었다.
트루먼은 자기 앞으로 나오는 이 돈을 한 푼도 손대지 않고 엘라에게 건넸다. 우체국장 운영권 양도가
당국의 승인을 받지 않은 비공식적 행동이었지만 트루먼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긍정적 에피소드로
전해진다.
미국인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건국의 아버지’ 6인 중에도 우정인이 있다.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이다.
프랭클린이 위대한 정치가이자 외교관, 과학자, 저술가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피뢰침을 발명한 근대
기상학의 아버지라는 것도 그 분야 사람들은 안다. 그런데 우정인, 그것도 원조 우정인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프랭클린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생겨나기 전인 1737년 31세의 나이로 필라델피아에서 우체국장에
임명됐다. 이후 영국 의회를 설득해 미 전역의 우체국장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았고, 1775년에는 훗날
우정청이 되는 기관의 장, 즉 초대 우정청장이 됐다. 그 유명한 독립선언문 기초위원 일을 하면서도
우정청장직에 있다가 건국한 지 두 달 만인 1776년 11월 사위에게 2대 우정청장을 넘겨줬다.
이렇게 보면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정치인, 한국과 밀접한 인연이 있는 대통령이 모두 우정인이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우정인이라면 자긍심을 가져도 좋을 사실들이다.
출처 : 이종탁(주간경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