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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 명작을 말하다

우표로 발행된 문화유산을 소개합니다.

우표 명작을 말하다
제목 [박물관과 우표]국립경주박물관(1)-금관(국보 1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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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7월에 발굴을 시작한 황남동 98호분은 크기 면에서 주변 무덤들을 압도한다. 이 무덤은 길이가 남북으로 120m에 달하는 쌍분(雙墳)이며, 마립간과 그의 부인이 서로 붙은 두 개의 봉분에 묻힌 것으로 밝혀졌다. 먼저 사망한 마립간은 남쪽 봉분, 나중에 사망한 부인은 북쪽 봉분에 묻혔다. 이때 발굴조사로 수습한 문화재는 만 점을 훌쩍 넘고, 지금까지 발굴된 신라 무덤으로는 최상급이다. 1976년 7월 27일 문화재위원회는 황남동 98호분을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큰 무덤’이라는 뜻을 가진 ‘황남대총’으로 고쳐 지었다. 신라 사회는 신분제에 따라 엄격한 복식제도가 유지되고 있었다. 장례 풍습에서 대체로 금으로 만든 관과 관 장식을 포함하여 귀걸이, 대도, 목걸이, 허리띠, 팔찌, 반지를 모두 착용한 사람은 최고의 신분에 해당하였다. 하위 신분이나 지방으로 갈수록 금동 장식을 쓰거나 착장품 중의 일부가 빠졌다. 또 남녀의 구별을 두어 여성에게는 굵은고리 귀걸이를 걸어주고, 남성에게는 허리춤에 장식대도를 채웠다.
황남대총에 묻힌 마립간과 부인은 각각 다른 성별을 상징하는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남분에 묻힌 마립간은 귀에 가는고리귀걸이(細?耳飾)를 걸고, 허리춤에는 장식대도를 차고 있었다. 반면 북분에 묻힌 부인은 귀에 굵은고리귀걸이(太?耳飾)를 차고 있었으며, 허리춤에는 장식대도가 없었다. 또 널 안에서 ‘부인대(夫人帶)’라는 글자가 새겨진 은제 허리띠가 나왔다. 그러나 황남대총에 묻힌 마립간과 부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지석(誌石 : 무덤 주인의 신분과 장례절차 등을 기록한 돌)과 같이 무덤의 주인을 알려주는 정확한 단서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덤이 만들어진 연대(5세기 전엽~중엽)를 감안하면 남분의 주인은 내물마립간(재위 356~402년), 실성마립간(재위 402~417년), 눌지마립간(417~458년) 중의 한 사람으로 압축된다. 여기에는 풀리지 않는 중요한 수수께끼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마립간이 금관이 아닌 금동관을 머리에 쓴 채 묻혔다는 점이다. 당시 장례 풍속에서 마립간과 그의 일족이 아직 금관을 쓰지 않았던 시기였을까? 그게 아니면, 무덤의 주인이 눌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실성이기 때문이었을까? 반면 북분에 묻힌 부인은 가장 화려한 금관을 쓴 채 묻혀 있어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부인이 묻힌 북쪽 봉분의 주체부는 목곽[主槨]과 그 안의 목관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부인은 머리에 세 쌍의 드리개가 달린 금관(국보 제191호)을 쓴 채 발견되었다. 금관에 매단 세 쌍의 드리개는 지금까지 발굴한 신라 금관 중에서 유일한 것이며, 이는 부인이 지금까지 발굴된 무덤의 주인공 중에서 최고의 여성 신분임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금관은 둥근 관테에 3개의 나뭇가지 모양과 2개의 사슴뿔 모양 세움장식을 못으로 고정한 것이다. 각 세움장식의 끝 은 꽃봉오리 모양으로 마무리하여 상서로움을 표현하였다. 이 모양은 신라 금관의 표준 모델이라 할 수 있으며, 그 계보가 6세기 이후에 제작된 천마총과 금령총 금관으로 이어진다. 관테와 세움장식은 뒷면을 뾰족한 도구로 찍어 돌출시키는 방법으로 만든 점무늬를 배열하여 테두리를 강조하였다. 특히 관테에는 상하에 2줄의 연속점무늬 (點列文)와 1줄의 물결무늬(波狀文)를 베풀었다. 관테와 세움장식의 표면에는 볼록장식을 만든 뒤 구멍을 뚫어 수십개의 달개와 곡옥을 매달았다. 달개는 약간의 미동에도 더욱 화려한 황금빛을 쏟아내고, 최상급 경옥제(硬玉製) 곡옥은 황금빛과 어우러져 신비로운 푸른빛을 발산한다. 금관의 양쪽은 세 쌍의 드리개를 붙여서 화려함의 극치를 연출하였다. 세 쌍의 드리개 중 하나는 길게 드리우고, 나머지 두 개는 비교적 짧게 매달았다. 드리개는 굵은고리로 만든 중심고리(主環) 아래에 샛장식(中間飾)과 드림(垂下飾)을 매단 구조이다. 이 중 샛장식은 양쪽에 고리가 있는 아령 모양의 몸체 여러 조를 연결하여 만든 것이며, 여기에 달개가 달린 금사 여러 개를 코일처럼 꼬아서 붙였다. 샛장식의 끝에는 반구체(半球體)를 연결한 뒤 펜촉 모양의 금판과 곡옥으로 드림을 완성하였다. 반구체는 테두리에 돋을새김무늬를 장식하여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드림은 세 쌍 중 한 쌍에만 곡옥을 매달아 단조로움을 피하고 화려함을 강조했다. 부인은 가슴과 허리에 각각 가슴꾸미개와 허리띠를 차고 있었으며, 두 팔에는 각각 5개의 금팔찌를 끼고 있었다. 특히 왼쪽 팔에는 금봉(金棒)으로 만든 팔찌와 함께 금판에 여러 구슬을 감입(嵌入)해서 만든 금팔찌를 더 끼고 있었다. 또 양쪽 손가락에는 각각 6개의 금반지를 끼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왕비를 위한 최상의 예우였다. 그녀의 머리맡에는 별도로 만든 부장궤가 있었으며, 앞서 사망한 왕과 함께 저승에서 누릴 부귀영화를 위한 금은보화가 가득하였다. 부장궤의 밑바닥에 철솥과 청동그릇 등을 놓은 뒤 그 위에다 각종 금과 은그릇, 흑갈유병(黑褐釉甁), 유리그릇 등을 차곡차곡 포개어 두었다. 마지막으로 은관식, 은허리띠, 장식대도, 관모, 금귀걸이 등의 황금 장신구들을 빼곡하게 채웠다. 8세기에 찬술된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신라는 ‘눈부신 금은의 나라’였다. 966년 아랍의 지리학자 알 마크디시(al-Maqdisi)는 신라에 대하여 ‘집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한다. 밥을 먹을 때도 금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한다’라고 적었다. 당시 이렇게 외국 사람의 눈에 비쳤던 신라 황금 문화는 마립간과 그 일족의 무덤 발굴조사를 통해 실재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황남대총 북분 금관이 신라 황금 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금빛 찬란함이 뿜어내는 범접할 수 없는 권위는 고대 왕국 신라 지배자의 아우라이자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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