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우체국 각 서비스 바로가기 우표포털 본문내용 바로가기 우표포털 하단 바로가기

한국우표포털서비스 K-stamp

  • 우표배움터

    • 우표의역사
    • 즐거운우표수집
  • 우표정보

    • 한국우표
    • 세계우표
  • 우표시장

    • 우표장터
    • 온라인 구매
    • 오프라인 구매
  • 우표문화체험

    • 우표박물관
    • 우표전시회
  • 우표로보는세상

    • 해외우취소식
    • 우편 130년
    • 우표 명작을 말하다
    • 우정이야기
    • 우표수집정보
    • 시간여행
    • 우표디자이너 인터뷰
    • 우표 뒷이야기
    • 대한민국 방방곡곡
    • 우정문화웹툰
  • 어린이 우표세상

    • 우표야놀자
    • 청소년 우표교실
    • 우정문화 동영상
    • 우표배경화면
  • 인기
우표스쿨 우표갤러리 우표 샵 우표박물관 우표로 보는 세상 쥬니어 스탬프

우표 명작을 말하다

우표로 발행된 문화유산을 소개합니다.

우표 명작을 말하다
제목 국립박물관 - 신
첨부파일 첨부파일없음
무제 문서
No.36 박물관과 우표: 국립박물관-신

우리가 지금 신고 있는 구두, 운동화 같은 신을 신기 전에는 옛날 사람들은 어떤 재료로 만든, 어떻게 생긴 모양의 신을 신었을까?

현재까지 알려진 신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신석기인 ‘외치’가 신 었다는 5300년 전의 가죽신[그림 1]으로 짚으로 만들어 가죽을 씌운 형태인데, 현대 신발과 모양도 비슷할 뿐 아니라 매우 잘 만들어진 신 으로 평가되고 있다.

신은 우리의 신체를 보호하는 실용적인 면을 고려하면서 신체의 장 식 또는 신분을 표시하는 도구로도 사용되었다. 이러한 신의 형태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장화처럼 목이 있는 신인 ‘화(靴)’다. 화는 말을 탈 때나, 활을 쏠 때 발목을 보호하기 위해 신는 신발이다. 또 다른 하나는 고무신같이 생긴, 신의 목이 없는 것으 로 ‘혜(鞋)’ 또는 ‘이(履)’라고 한다.

고구려 사람들은 기록과 고분벽화 그림으로 보아 다양한 화와 이를 신었음을 알 수 있고, 백제는 왕이 신었다는 검은 가죽신(烏革履)의 기록이 있고, 공주 무령왕릉에서는 왕과 왕비의 금동으로 만든 화려한 신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는 왕이나 왕비가 예식용으로 신은 ‘석(舃)’이라는 비단신이 있고, 일반 관리들은 관복에 ‘목화(木靴)[그림 2]’ 를 갖추어 신었다. 가죽으로 만든 남자들의 평상용 신인 ‘태사혜(太史鞋)[그림 3]’는 마른 날에만 신을 수 있었고, 비가 올 때는 가죽에 기름을 먹이고, 신 바닥에 쇠로 만든 징을 박아서 만든 진신 또는 나막신[그림 4]을 신었다.

나막신은 통나무를 파내어 배 모양으로 만들고 신의 앞뒤에 굽을 달았다. 그래서 실제로 신어 보면 매우 무겁고 불편하 며, 또 걸을 때 소리가 나서 예의를 차리는 자리에서는 신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유물을 보면 굽이 닳아서 없어진 것, 굽을 고쳐서 신은 것 등이 있어서 당시 사람들은 나막신을 꽤 즐겨 신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막신을 신으면 비가 많이 오 는 여름철 빗길에서나 겨울철에는 발이 땅에 닿지 않기 때문에 발이 덜 시려서 좋았다고 한다. 유물로는 아이의 장수와 복 을 기원하며 생일 선물로 준 나막신, 신코에 무늬를 새겨 넣어서 만든 여성용 신, 투박한 남자신 등 다양하다.

사대부 여자들은 신으로 비단이나 수를 놓아서 만든 운혜(雲鞋)·당혜(唐鞋)[그림 5]·수혜(繡鞋) 등을 신었지만, 일반 서 민은 평생 혼례 때나 한번 신어 볼 수 있었고, 대부분은 짚신과 미투리를 신고 생활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짚신모양 토기가 자주 나오고 있는데 [그림 6]의 짚신모양 토기는 1991년 부산 동래 복천동에서 발굴 된 것으로 5세기 가야인이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굽다리 위에 짚신을 만들어 올리고 그 짚신 안에 굽이 달린 잔 을 붙인 한 쌍의 토기이다. 이는 짚신을 본떠 만든 상형토기로 죽은 이의 영혼을 이승으로부터 저승으로 옮겨 간다는 의미 로 제작된 것이다.

한편 430년 전에 쓴 한글 편지와 미투리가 발굴되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일이 있다. 31세의 이른 나이에 남편을 잃은 애틋한 마음을 담은 편지에는 원이 엄마가 남편 이응태(1556~1586)의 쾌유를 빌며 삼 껍질과 머리카락을 함께 꼬 아 삼은 미투리에 관한 이야기가 써 있는데 ‘이 신 신어 보지고 못하고’ 라는 글귀가 적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찡하게 하였다.

괴나리봇짐을 지고 가는 선비의 뒤에는 항상 짚신이 줄줄이 달려 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짚신을 신었던 우리 조상들 은 먼 여행을 떠날 때면 5~6일만 지나도 닳아버리는 짚신 때문에 미리 짚신을 삼아서 준비해야 했다.

개화기 이후 양복이 도입되면서 서양식 구두가 들어왔고, 1916년경 고무신이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농한기에 짚신 을 만들어 팔던 농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불매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점점 고무신의 수요가 늘고 공장이 생기면서 짚 신은 상례용으로만 사용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 중 가장 최초로 고무신을 신은 사람은 누구일까? 기록에 의 하면 창덕궁에 유배되어 있던 순종 임금이 최초로 신었으며, 하얀 고무신을 즐겨 신었다고 한다. 또한 순종의 아우였던 의친왕은 대륙고무의 광고 모델로 등장하기까지 했다

그 후 산업화와 함께 양복이 일상복으로 자리 잡고 한복은 예복화됨에 따라 고무신에서 구두나 운동화를 주로 신게 되 었다. 요즘에 유행하는 ‘젤리슈즈’는 고무신의 일종으로 물속에 들어갈 때나 비 올 때 즐겨 신는 신이다. 50~60대 분들은 어릴 때 고무신으로 물고기 잡고, 고무신을 장난감 삼아 신나게 놀다가 고무신 한 짝을 잃어버려 부모님께 꾸중을 들었던 추억이 있을 것이다. 이렇듯 신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쓰임으로 우리의 삶과 함께 하고 있다 .

[월간 우표 발췌]

* 모든 이미지와 콘텐츠는 원작자 및 발행처에 저작권이 있으며, 무단 도용시 법적 제재 또는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표 명작을 말하다 이전글 다음글 보기
이전글 국립공주박물관 - 소반(小盤)
다음글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조선세계와 조선인의 삶을 담고 있는 지도, 대동여지도

기 발행된 모든 우표류(우표, 엽서, 원화, 우표책, 우표첩, 날짜도장)의 이미지 및 내용을 사용할 수 있으나, 이미지와 내용을 변경하여 사용시에는 우정사업본부의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