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75년, 스페인은 자국의 우표 발행 125주년을 기해 세계우표전시회 ‘ESPANA 75’를 수도 마드리드에서 4월 4-13일간 개최한 바 있었다. 요사이 전시회는 대개 5일-6일이 평균이나 이때는 무려 그 2배인 10일 동안이나 열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전시회가 중요한 이유는 이때 비로소 한국이 세계우취연맹(FIP) 가입을 위해 제 44회 총회에 고 강윤홍 선생이 대의원으로 참석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한국우취연합의 전신이었던 한국우취단체총연합회(회장: 진기홍)의 FIP 가입은 총회에서 일본이 먼저 제안하고 미국과 이탈리아가 동의하는 형식을 취했다. 표결 결과, 39개 참가국 중 찬성 33개국, 반대 1개국, 기권 5개국으로 가입이 확정되었다. 반대한 국가는 불가리아, 기권은 동독, 체코, 쿠바, 헝가리 및 루마니아 또는 폴란드 중 1개 국이었으며 찬성하지 않은 6개국 모두 구 공산권 국가들이란 점이 냉전 당시의 상황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김영길 한국우취연합 이사가 소장중인 사료, 즉 주스페인대사 발 외무부 장관 앞 전문 사본에는 총회 결과와 한국 작품들의 수상 내역을 보고한 것이 확인된다는 점이다. 발신은 4월 15일 오후 7시, 본국 접수는 16일 오전 7시 40분이었다. 우표전시회가 외무부 전문에 반영된 아마도 사상 최초의 일일 것이다.




44회 총회 직전까지는 한국이 FIP 회원국이 아니었기에 강윤홍 선생은 공식 커미셔너도 아니었고 그저 개인적인 출품자 자격에 불과했다. 전시회는 강윤홍 선생 단독으로 구한국 작품 3틀을 출품하여 은동상을 수상한 것이 우리가 국제전시회에서 수상한 최초의 기록이 되었으며 당시 대한우표회가 간행한 ‘한국우표 90년’ 책자가 문헌부에서 은상을 받았었다. 문헌부 수상, 은상은 대단한 것이었다. 현재는 구한국에 대한국제적 인식이 그때와는 전혀 다르기에 1975년에 한국 최고 작품 중 하나가 겨우 은동상에 머물렀다는 것은 상당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나 그때만 하더라도 한국이나 한국우표가 , 별로 알려지지 않을 시기였기에 그 정도의 수상 기록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당시 한국인의 출품은 강윤홍 선생 단 1인, 하지만 인도가 18작품, 일본이 13작품을 출품하는 위력을 과시했다. 특히 이때 이미 곤도이치로(近藤一郞)가 구한국 및 재한국 일본우체국 관련 작품을 5틀 출품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975년 이전에는 한국우표도 일본 등 외국인 수집가에 의해 소개되고 있을 정도였다. 하나 별로 주눅들 필요가 없는 것이 아시아권에서는 우리를 제외하면 터키(이때는 유럽이 아니고 아시아)가 1작품, 이란이 1작품, 계 5개국만이 출품한 것을 보면한 작품이라도 낸 한국이 대단했다고 자위할 수도 있다. 즉 당시만 해도 세계우표전시회 작품들은 60% 이상이 북미와 서유럽 일부국가와 대양주 2개국(호주와 뉴질랜드)에 의해 지배되어 있었으며 유럽과 북남미를 제외한 아시아(중근동 포함), 아프리카, 대양주, 태평양 군도 등은모두 ‘그 이외의 대륙’(Rst of the World)이란 표현을 쓰고 있어 현재와 같이 중국을 위시한 중화권과 동남아권이 주력으로 등장하는 요사이 추세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여하간 스페인에서의 이 전시회는 그 후 한국이 세계 무대에서 인지도를 높여 가게 된 그야말로 최초의 계기가 아닐 수 없었는데 강윤홍 선생은 지금의 시각에서 보아도 한국우취의 세계화라는 측면에서는 대단한 선구자임에 틀림이 없다. 강윤홍 선생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1981년 일본 동경 개최 아시아우취연맹(FIAP) 총회에서는 FIAP집행이사로 피선되었으며 한국이 최초로 FIP 세계우표전시회를 개최하게 되었던 1984년부터는 6년간 FIAP 사무총장직을 역임하면서 국제적 경력을 축적해 나갔다. 따라서 여러모로 보아 1975년 스페인에서의 FIP 총회 참석과 전시회 출품은 한국우취의 수준을 가늠하는 시금석이자 하나의 중대한 출발점이 되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필자가 처음 우표지를 사서 보았던 것이 바로 중학교 1학년생이었던 1975년 그해 6월호부터 11월호까지 이어졌던 강윤홍 선생의 장기 기고문, ‘국제우표전과 우리나라 우취계: ESPANA 75 출품과 참관을 마치고’가 시작되었기에 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를 읽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공식 보고서와 함께 그의 개인적인 인상과 제언을 담은 참관기 역시 지극히 상세한 내용으로 10월호까지 연재했었다. 이 기고문들을 보면 강윤홍 선생이 얼마나 그때 그 전시회 참가를 중시했는가를 엿볼 수 있는데 아마도 그 후 커미셔너를 담당했던 그 누구보다도 치밀하고 정교한 보고서 및 해석서로서의 높은 가치가 있는 글들을 남긴 것으로 평가된다. 더 이상 자세할 수가 없으리만큼 파고 또 파고든 분석과 종합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그것을 통해 아마도 한국에서의 전시회(결과적으로는 필라코리아 1984) 준비를 위한 출발점이자 벤치마킹의 표본으로 설정했던 것 같다. 한데 1975년 당시의 전시회 목록을 보면 지금과 좀 다른 것이 심사위원들의 사진은 모두 올라와 있는데 각국 커미셔너들의 것은 없다. 좀 젊은 날 강윤홍 선생의 얼굴을 보려고 했으나 안타깝게도 실려 있지 않았다. 한데 전시회 운영의 각 부문을 담당하는 여성 직원 15명은 전부 얼굴을 드러낸 사진들을 수록하고 있는 것도 매우 특이하다. 우연히 해당 담당 업무를 맡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혹시 이게 유엔이 정한 1975년 세계 여성의 해와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1984, 1994, 2002, 2014년에 이어 다섯 번째의 FIP 세계전을 치르게 된다.(2009년은 FIAP 아시아전) 2002년부터 이미 그때가 마지막 국제전이 될 것이라는 부정적인 풍문이 끊임없이 나돌 무렵이었으나 FIAP전까지를 포함하면 그로부터 벌써 세 번째 국제전시회가 되는 셈이다. 필라코리아 2025는 가장 열악하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어렵게 몇 차례의 수정과 연기를 강행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우표의 기능이 극도로 왜소화된 현 시점에서 우정당국의 의욕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되 수집가들만이라도 좀 더 적극성을 띄워준다면 행사는 그런대로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지금까지의 과정을 보면 특히 외국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한국이 예전의 그 한국이 아닌 것 같다’라는 점이다. 과거에는 이러저러한 국제행사를 개최할 때면 뭔가 조직적이고 치밀했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요사이는 별로 그렇지 않다는 지적이 나타나고 있다. 이 FIP 세계전은 FIP에 가입해야만 열 수 있는 이벤트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50년 전에 우리가 가입한 FIP라는 존재는 평소에 얼마나 잘하나를 관찰하는 데는 별 소질이 없고, 오로지 이런 전시회를 통해 개최국가의 수준을 가늠하려고만 하는 관성이 있다. 즉 요것 한 번 잘하면 그 나라의 위상이 올라가고 결과적으로 대외적 신인도가 증대된다는 좀 수긍하기 어렵지만 그런 경향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싫든 좋든 한국 우취계와 우정체계는 10년에 한 번씩 자체동의도 하지 않은 수능시험을 치르고 있는 셈이며 이제는 잘하면 본전이라는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만 한다. 50년 전 FIP에 처음 가입할 당시 우리의 선대 수집가들과 담당 공무원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정성스럽고 진지하게 임무를 수행했는지를 되돌이켜 보면 지금의 상황이 10년 전이나 20년 전에 비해 아무리 불리하다 하더라도 50년 전만 못하겠는가 하는 부분을 반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과거’라는 단어에는 희망이 없기에 ‘현재’와 ‘미래’만 생각하자는 식자들도 있으나 현재와 미래를 잘 꾸려가려면 과거에 어떤 시행착오들을 했는가를 꾸준히 들여다볼 가치가 있는 것이기에 과거 선대들이 이루어낸 성과는 결코 간단히 지나간 일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필라코리아 2025를 앞두고 50년 전 FIP 가입을 위해 거의 홀로 고군분투했던 고 강윤홍 선생에 대한 ‘오마쥬’를 간단히 언급해 보았다. 마지막으로 전 세계 우표수집이 피크에 도달해 있었을 당시, 도대체 우표전시회의 양적 전시규모는 어떠했을까? 1975년 마드리드는 문헌을 제외하고 6,006틀이 전시되었다. 2,000틀도 어려운 지금에서 보면 이게 믿기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