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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일제 노예를 거부한 우당선생 기념우표
등록일 2019. 9. 25.
첨부파일 up20190925131903070.jpg







우표 뒷이야기 104. 일제 노예를 거부한 우당선생 기념우표







‘난잎으로 칼을 얻다.’


지난 2015년 2월 덕수궁 중경전에서 열린 우당 이회영과 6형제를 다시 생각하는 전시회 제목이다. 우당이 난 그림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당의 가문은 조선 최고의 가문이었다. 우당 가문에는 ‘상신록’이라는 문집이 있다. 정승을 10명 이상 배출한 가문에서만 만들 수 있는 문집이다. 이항복도 그 중 한 명이다. 우당의 부친 이유승은 고종 초기 이조판서를 지냈다. 동생 이시영은 평안남도 관찰사와 한성 재판소장을 지냈다. 나중엔 상하이 임시정부 부통령(초대)을 맡았다. 우당 가문은 조선 최고의 부자였다. 서울 명동 땅의 절반은 모두 우당 집안의 소유였다.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2조원이 넘는 대부호였다. 일제는 그의 재산 유지를 약속했지만 우당 가문은 이를 거절했다.


   
   

이유승에게는 6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들 역시 조선 최고의 형제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들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무엇인지 보여준 독립운동가다. 그들의 죽음이 이를 대변한다. 가장 많은 독립운동자금을 댔던 둘째 이석영은 중국 빈민가에서 굶어죽은 채 발견됐다. 넷째 우당은 안중근 의사가 처형된 여순감옥에서 고문을 받다가 절명했다. 막내 이호영은 행방불명됐으며 끝내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우정사업본부는 우당 이회영 선생 탄생 150주년을 맞아 기념우표 56만장을 발행했다. 우표는 우당 이회영 선생의 옆모습과 6형제가 회의하는 모습을 태극기와 함께 디자인해 우당 선생의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담았다.

  
  

그들의 운명을 바꾼 것은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이었다. 독립운동에 가장 앞장섰던 우당은 상동교회 목사 전덕기와 함께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를 1907년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펼친다. 그리고 전덕기와 함께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거사를 기획하여 고종에게 청원한다. 이것이 실패로 끝난 헤이그 밀사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고종은 강제 폐위되고 대한제국의 군대는 해체된다.


  
  

1910년 12월 어느 날 우당의 6형제가 한 자리에 모였다. 그 자리에서 우당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형제가 당당한 호족의 명문으로서 차라리 대의가 있는 곳에서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히 도모한다면 이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


  
  

평생이 보장된 신분을 버리고 6형제가 함께 만주로 망명 길을 떠났다. 우당은 동북3성 총독에게 만주 현지 땅 구입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보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당시 중국의 실력자였던 위안스카이와 단판을 짓고 마침내 허락을 받아낸다. 1911년 중국 지린에 경학사(이상촌) 건립을 추진하고 1912년 신흥학습소를 세운다. 독립군을 양성했던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다. 무장 항일투쟁의 젖줄이 됐던 신흥무관학교는 1919년 11월 안도(安圖)현 삼림지역으로 이동할 때까지 약 3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는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김산의 생생한 수기가 실려 있다.


  
  

고국에서 가지고 왔던 그 많던 돈도 1918년 바닥이 나고 만다. 우당은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고종의 중국 망명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듬해 고종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이마저도 실패했다. 1919년 다시 중국 망명길에 올라 본격적인 아니키스트 활동에 돌입한다. 비밀결사조직인 다물단(1925년)과 테러행동단인 흑색공보단(1932년)을 결성했다. 우당은 자신이 친 난 그림을 팔고 고국에서 부인 이은숙이 삯바늘질해서 보내온 돈까지 이들 단체를 꾸려나가는 데 보탰다.


  
  

올해는 우당 선생의 탄신 1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정사업본부는 그의 탄생을 기념하는 기념우표 56만장을 발행했다. 수조원의 재산과 6명의 생명을 바친 독립운동가와 그들 후손에게 조금의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출처 : <김경은 편집위원 jj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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