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은 모스크바 코앞까지 진격했다. 오데사, 세바스토폴, 스탈린그라드 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거칠 것이 없던 독일군에게도 공포의 대상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소련의 저격수였다. 특히 많은 여성이 소련의 저격수로 활약했다. 루드밀라 파블리첸코라는 여성 저격수는 오데사, 세바스토폴 등에서 독일군 300여명을 사살해 ‘죽음의 여인’이라 불리기도 했다. 여성들은 전투기 조종사, 공병, 간호병, 통신병, 정찰병 등 보직을 가리지 않고 활약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전역한 여성 군인들은 ‘남자들과 어울려 살았다’며 손가락질을 받았다.
“처음에 우리는 과거를 숨기며 살았어. 훈장도 내놓지 못했지. 남자들은 전쟁에 다녀왔기 때문에 승리자요, 영웅이요, 누군가의 약혼자였지만 우리는 다른 시선을 받아야만 했지. 완전히 다른 시선…. 당신한테 말하는데 우리는 승리를 빼앗겼어. 우리의 승리를 평범한 여자의 행복과 조금씩 맞바꾸며 살아야 했다고. 남자들은 승리를 우리와 나누지 않았어. 분하고 억울했지.”(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중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여성 군인 200여명을 인터뷰한 벨라루스의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여자들의 전쟁은 이름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며 “절대적인 남자들의 세계에서 당당히 자신의 자리를 차지해놓고 왜 여자들은 자신의 역사를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을까”라고 우리에게 묻는다. 그는 ‘죽음의 여인’으로만 박제된 여성 군인들을 인터뷰해 그들의 삶을 다시 끄집어낸다.
한국에서 전쟁에 참전했던 여성 군인들은 한동안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6·25전쟁 당시 참전한 여성 군인들은 육군 의용군(970명), 해군 해병(75명), 공군 항공병(26명), 간호장교(664명) 등 총 2400여명이다. 19세 나이로 참전했던 이창애씨는 “여군이라는 꼬리표는 득보다 실이 많았다. 여군이라 하면 여성스럽지 못하고 드세다는 편견 때문에 취업도 잘 안 돼 오히려 이력서에 여군 경력을 빼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대한민국 군인이라는 자부심은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했다.
미흡하나마 이들을 기리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전쟁 중 서훈 대상으로 결정됐지만, 훈장을 받지 못한 공로자들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하는 ‘6·25전쟁 무공훈장 찾아주기 캠페인’이다. 간호장교로 참전해 1952년 화랑무공훈장 서훈자로 결정됐지만, 훈장을 받지 못한 채 이후 파독 간호사가 된 권순희씨와 고 원영희씨가 이 사업의 성과로 지난해 4월 무공훈장을 받았다.
우정사업본부는 국방부의 ‘6·25전쟁 무공훈장 찾아주기 캠페인’에 동참하기 위해 최근 두 종류의 그림엽서 5만8000장을 발행했다. 엽서에는 ‘고바우 영감’으로 유명한 김성환 화백(1932~2019)이 6·25전쟁 당시 장병들을 스케치한 그림을 담았다. 캠페인은 2022년 12월 말까지 진행되며 관련 상담은 6·25 무공훈장 찾아주기 조사단(1661-7625)으로 하면 된다. 이 사업으로 더 많은 남녀 공로자들에게 훈장을 찾아주고, 한동안 존재를 드러낼 수 없었던 여성 군인들의 이야기도 듣게 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전염병과 관련한 가장 최근에 발행한 우표는 2002년 중국에서 발원해 전 세계에 전파된 사스(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에 관한 것이다. 중국 정부는 사스 퇴치 과정에서 순직한 의료 인력에 ‘인민 영웅’ 칭호를 부여했다. 일명 ‘제3의 영웅’이다. 종전에 중국의 영웅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과 중국 공산당 창당 및 발전을 도운 ‘창건영웅’만이 존재했다. 목숨을 걸고 사스와 싸운 의료진을 ‘인민을 구한 영웅’으로 대접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그들을 기리기 위해 2003년 5월 ‘사스 퇴치의 영웅’을 우표로 제작했다.
경향신문 기사 원문보기: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4&art_id=2021010415384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