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선각자들 중 독립운동과 관련된 인물을 우리는 열사 또는 의사라 호칭하고 있
다. 또 순국선열, 애국지사라고도 구분한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의사’가 주로 무력이나 행동을 통해
큰 공적을 세운 사람을 가리킨다면 ‘열사’는 직접적인 행동은 하지 않았으나 죽음으로 정신적 저항의 위
대성을 보인 사람을 가리킨다. 순국선열은, 일제의 국권침탈(國權侵奪)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
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가 순국
한 자. 이고 애국지사는, 앞과 같은 기간 내에,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
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로 명기하고 있다.
윤봉길(尹奉吉)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몰락양반이었던 아버지 윤황
과 어머니 김원상의 5남 2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봉길 이란 이름은 별명이고 본명은 우의(禹儀), 아호
는 매헌(梅軒)이다. 젊은 시절 문맹퇴치와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고, 야학당을 개설하여 학생들을 지도하
였고, 이를 위해 농민 독본 3권을 저술하기도 했다. 일제 탄압을 피해 상하이로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인 천장절인 1932년 4월 29일에 홍커우 공원에서 전승축하기념식을 열 것이라는
보도를 본 후 백범 김구의 제안에 따라 폭탄투척거사를 결정했다.
살신성인의 자세로 거사에 자원한 임시정부 한인 애국단 소속 윤봉길은 감시가 삼엄한 홍커우 공원 행 사장에 잠입하여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했다. 그 결과 시들어가던 한국인들의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이 되 살아났음은 물론 국제사회에까지 잊어졌던 식민지 한국의 존재가 뚜렷하게 부각되면서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 국민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된 임시정부는 적극적 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윤봉길의사는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해 5월 일본군법회의에 서 사형을 언도받았지만, 그는 법정에서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하이에 왔다.”면서 대장 부로서의 변치 않는 기개를 펼쳐보였다. 그러나 12월 19일 가나자와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총살형 에 처해졌다. 당시 그의 나이 25세였다.
※글 참조: 역사용어 바로쓰기. 한국사 인물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