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월드컵축구가 대한민국을 진동시키고 있을 때 거리의 응원 물결은 붉은 티셔츠와 태극기였다. 스포츠 어느 종목이던 세계를 제패하면 선수는 꼭 태극기를 들고 경기장을 도는 감동의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그런 모습들은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나라사랑의 마음이 가슴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최근엔 정치적인 집회에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 하기위해, 무절제식으로 사용되고 있어 안타가운 마음이다. 태극기는 나라의 상징이고 대한민국의 얼굴이다. 귀하게 취급되어야 하고 소중하게 사용되어야함을 우리 모두 가슴으로 인식하고 태극기 앞에서는 통일 된 마음으로, 엄숙해야 함을 알고 행동해야 할 것이다.
수원화성 행궁 벽화에도, 청계천 산책길 벽화에도 왕의 행차도가 크게 그려져 있지만 왕을 상징하거나 통치권을 상징하는 깃발들뿐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말기 여러 나라와 수교를 맺게 된 개항기에 이르러 새로이 나타난 국가를 표상하는 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1876년 인천을 비롯한 항구를 개방하면서 조선은 국기라는 것을 정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이후 국기제정을 꾸준히 모색해 왔고 1882년 5월 조선과 미국이 수호조약을 맺으면서 마침내 미국과 국기를 교환했다. 국가의 표상이 탄생한 것이다. 국가 상징물의 제정은 이처럼 조선이 근대 국가로서 세계 여러 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할 상황에서 필요한 장치였다.
태극기를 누가 만들었느냐에 대해 많은 사람이 궁금증을 지니고 있다. 최초의 태극기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을 때 역관 이응준이 미국 배 안에서 만들었다는 설도 있지만, 이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박영효가 임오군란을 수습하기 위해 1882년 8월 22일 일본에 가는 배 안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는 ‘박영효 창안설’이다. 그러나 최근 여러 자료가 발굴되면서 박영효 창안설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앞서 말한 미국과 조약을 맺으며 국기를 교환했던 때와 차이가 있고 더구나 그해 7월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각국의 국기 책자인 『해양 국가들의 깃발(The Flags of Maritime Nations)』이라는 책자에 조선의 국기가 게재되어 있는 자료가 발굴되었다. 이 자료에 의해 박영효가 일본에 가기 2개월 전에 이미 조선의 국기가 미국 쪽에 제공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882년 10월 2일자 일본 도쿄에서 발행된 일간신문「시사신보」(1882년 3월 창간,1936년 폐간) 는 당시 일본을 방문한 박영효 수신사 일행과 기자 회견을 갖고, 태극기는 고종이 직접 도안을 하고 색깔까지 지정한 것으로 보도했다. 박영효는 고종이 구상한 작품을 고종의 지시에 따라 일본으로 가던 도중 단순히 그림만 그리는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시사신보 기사는 생생하게 전하고 있어 태극기의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고종(1863-1907)은 1883년 음력 1월 27일 태극기를 공식 국기로 제정하여 반포하였다. 국기 제정 이후 태극기와 그 핵심적 상징인 태극 문양은 우표, 훈장, 여권을 비롯한 각종 문서 등 근대적인 제도에 두루 활용되고 있다.
※참고 자료: 사물로 본 조선, 미스테리 그날이 오면, 세계사와 함께보는 타임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