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 내 전기회사 기계창(器械廠)에서 시술(施術)하는 활동사진은 일요 및 우천을 제외하고는 매일 하오 8시부터 10시까지 설행(設行)하는데, 대한(大韓) 및 구미각국의 생명도시(生命都市)의 절승(絶勝)한 광경이 구비 하외다. 입장요금 동전 10전”. 1903년 6월 23일 자 황성신문에 게재된 광고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 상영이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기사다. 이때부터 1919년까지 구미 각국에서 수입된 영화가 상영되어, 한국영화계의 개척자들에게 영화제작의 의욕과 영화인의 등장을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영화관은 1906년 한미전기회사(韓美電氣會社)가 동대문 안에 활동사진관람소를 만들고 해설을 곁들여 초기 미국영화를 많이 상영한 것이 그 시작이다. 이후 광무대(光武臺), 장안사(長安社), 단성사(團成社), 연흥사(演興社) 등 상설 영화관이 등장했다.
1910년부터 싹트기 시작한 신파연극은 천편일률적 1910 이어서 관객을 잃어가던 중 연쇄극(連鎖劇, kinodrama)을 선보여 그 탈출구가 되었다. 연쇄극은 연극 장면 가운데 무대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야외 장면이나 활극 장면 등을 영사화면으로 만들어 공연 중에 삽입하여 연극과 영화가 연쇄되어 줄거리를 이어가는 형식이다. 영화보다는 연극에 가깝다. 이런 연쇄극 형식의 <의리적 구투>(義理的仇討)가 신극좌(新劇座)를 이끌던 김도산이 박승필의 출자로 만들어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상영한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다.
1923년 일관된 극적 내용을 가진 영화가 공개되었다. 윤백남이 연출한 <월하의 맹서>(月下-盟誓)가 한국 극영화의 효시로서 무성영화 시대의 막을 열었다. 같은해 하야가와(早川松次郎)에 의해 만들어지고 한국배우가 출연한 무성영화 <춘향전> 이 대중의 큰 인기를 얻었다. 이 무렵부터 영화제작이 본격화됐다.
1926년 단성사에서 개봉된 *나운규 시나리오·감독·주연의 <아리랑>은 강렬한 개성을 부각해 한국영화 도약의 발판이 되었다. <아리랑>을 기점으로 민족의 자존과 항일 저항 의지를 표현한 일련의 작품들이 이어졌다. 1930년대 들어서면서 사실주의와 계몽주의 경향의 영화들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심훈 감독의 <먼 동이 틀 때> (1927), 나운규 감독의 <사랑을 찾아서>(1928), <벙어리 삼룡>(1929), 이규환 감독의 <임자없는 나룻배> (1932)는 무성영화의 전성기 작품이다.
이용우 감독, 이필우 촬영·녹음의 <춘향전>은 한국영화 최초의 발성영화다. 경성촬영소가 올 *토키로 만들어 1935년 10월 4일 단성사에서 개봉하여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불과 10여 년 만에 무성영화에서 발성영화 시대로 옮겨졌다.
1940년대 초반은 일제의 정책에 의해 제국주의 전쟁을 정당화하고 황국 신민 의식을 고취하는 계몽영화들이 쏟아져 나온 영화의 암흑기였다. 이후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으로 침체에 빠진 한국영화가 숨통을 트게 된다.
우리나라는 영화시리즈 우표를 네 차례(2007년 10월 26일, 2008년 10월 27일, 2009년 10년 27일, 2010년 10월 27일)에 걸쳐 각 4종씩 16종을 발행하였다. 올해 10월 25일에는 ‘한국영화 100년’을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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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羅雲奎, 1902~1937): 호 춘사(春史), 함경북도 회령 출생. 간도 명동중학교 졸업. 영화감독 겸 배우. 1925년 영화 <운영전>으로 데뷔. 건국훈장 애국장.
*토키(talky): 동시에 음성·음악 등이 나오는 영화.
※참고자료: 위키백과, MBN 온라인뉴스(2019.10.15.), 전북일보(2019.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