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대한민국 여군 창설&&동요작곡의 선구자 윤극영&&아르헨티나의 생화학자 를루아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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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0. 9.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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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여군 창설 우리나라 여군은 6·25동란의 격동기 속에서 구국 이념에 불타는 여성 지도자들의 궐기에 따라 1950년 9월 6일, 부산 범일동에서 여자 의용군 교육대로 발족하였다. 당시 여군은 후방의 행정 및 통신지원은 물론, 최전방 사단까지 배치되어 대공 선무 공작과 포로 심문 등, 적의 분쇄 작전 임무수행에 남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싸웠다. 그동안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면서 부대조직, 편성, 그리고 지휘체제를 정비 보강하여 정예 여군으로서 전력기반을 구축하여 왔으며, 여군의 신조(信條)인 지(知), 용(勇), 미(美)를 바탕으로 많은 여군 간부들을 육성, 배출하여 대한민국 국군의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상세정보보기] 동요작곡의 선구자 윤극영 동요 작곡의 선구자로 불리는 윤극영 선생. 1920년 경성고등 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음악학교의 사범과에 들어간 윤극영 선생은 당시 홍난파선생과 방정환 선생을 만나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조선에서는 마땅히 부를 만한 우리의 노래가 없어 우리 민족 어린이들이 일본 창가를 부르는 암울한 시대였다. 이 같은 시대적 상황에 따른 어린이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을 방정환 선생을 통해 전해들은 윤극영선생은 이때부터 평생을 우리 어린이들을 위한 동요 만들기에 헌신하게 된다. 1922년 방정환, 조재호, 진장섭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어린이 문화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였고 이어 1923년 조선소년운동협회를 조직하여 그해 5월 1일을 '어린이 날'로 제정하는 한편 1926년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집인 ‘반달’을 발표하였고 이후 400여곡 이상의 주옥같은 동요를 남겼다. 1924년 작곡한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 ‘반달’은 빠른 속도로 국내는 물론 만주, 일본에까지 전파되었고 우리 노래를 탄압하던 일본인도 이 노래를 부르게 되었을 만큼 당시 큰 호응을 얻었다. 1968년 윤극영 선생의 업적을 기려 창경궁에 노래비를 세웠고 지금은 어린이대공원으로 옮겨 한국 어린이 문화 활동에 크게 공헌한 선생의 공적을 기념하고 있다. [상세정보보기] 아르헨티나의 생화학자 를루아르
1970년 탄수화물의 신진대사에 관한 발견의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받으며 아르헨티나인 으로서 최초의 노벨상 수상의 기록을 남겼다. 프랑스 태생인 를루아르(Luis Federico Leloir, 1906.9.6~1987)는 아르헨티나에서 교육받은 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 조교를 거쳐 케임브리지 생화학 연구소에서 일했다. 1947년 귀국과 동시에 재정 지원을 받아 설립한 부에노스아이레스 생화학 연구소에서 평생을 바친 그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뛰어난 연구 업적을 남겼다. 탄수화물의 신진대사를 맡는 당 뉴클레오티드의 발견과 더불어 신장과 고혈압에 관한 연구업적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갈락토오스 혈증이라는 선천적 질병의 병리 해석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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