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미래를 건 카이로회담 개최
미국, 영국, 중국의 수장들이 모인 1943년 11월 22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조선의 미래를 좌우할 논의가 진행될 회담이 개막됐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장제스 중국 국민당 총통 등 연합군 3국 수뇌부가 모여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처리 방법을 다루는 자리였다.
연합군의 공적(公敵)인 일본에 대한 처리도 의제에 들어가 있는 만큼 이 자리에서 조선 독립이 논의되는 것이 당연한 듯 보일 수 있으나 실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시점은 1938년으로, 조선이 일본의 영토로 편입된 1910년에서 28년여가 지난 때였다.
카이로 회담을 마련한 연합국의 목표는 2차 대전 이전으로 세계를 되돌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연합국 측에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이해시킨다는 것은 어려웠으며, 영국이나 미국은 애초 한국을 신탁통치를 하고자 했다. 한국의 독립 문제를 집중적으로 이슈화한 인물은 중국의 장제스 총통이었다. 그는 후반부로 예정된 한국 관련 논의를 앞당겼고, 한국의 독립 보장 약속을 선언에 포함시키자고 기습적으로 제안했다.
한국 독립에 냉담했던 영국과 미국이었지만 아직 건재한 태평양 전선의 일본을 상대하려면 중국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결국 11월 27일 발표된 카이로선언에는"한국민이 노예 상태에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할 것을 결의한다"는 특별조항이 삽입되어 대한민국의 독립에 대한 국제적 보장을 확인받을 수 있었다.
최근 발굴된 중국 자료 ‘총재접견한국영수회담기요(總裁接見韓國領袖會談紀要)’에 따르면, 카이로 회담을 앞두고 1943년 7월 26일 장제스는 김구의 요청에 응해 김구 김원봉 등 6명과 비밀리에 만나 종전 후 한국의 완전독립을 쟁취할 수 있도록 중국 측에 지지와 지원을 요청했다.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를 ‘빚’으로 생각해 온 장제스가 "중국 측은 힘써 싸우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 문서의 요지로 전해진다. 윤봉길은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들 계십시오"라고 결의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