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의 일제는 한국의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한국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차관(借款)을 도입하게 하였고, 통감부는 이 차관을 한국민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한 경찰기구의 확장 등 일제침략을 위한 투자와 일본인 거류민을 위한 시설에 충당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1907년 한국정부가 짊어진 외채는 총 1,300만 원이나 되었다. 당시 한국정부의 세입액에 비해 세출 부족액은 77만여 원이나 되는 적자예산으로서, 거액의 외채상환은 불가능한 처지였다. 이에 1907년 2월 대구에서 일기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의 경제침략에서 벗어나려는 항일 애국 운동이다. 천주교 지도자인 서상돈이 당시 광문사라는 인쇄소를 경영하던 김광제 등 16명과 제휴하여 일으켜 2천만 동포의 애국심에 불을 질렀다. 일본이 우리에게 씌워준 1,300만원의 빚을 전체 국민의 의연금으로 갚자는 운동이다.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한 후 한국의 묵은 빚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1905년 6월 200만원의 빚을 통감부가 제멋대로 일본에서 빌어왔고, 1906년에 들어서자 전체 빚은 1,300만원이 되었다. 통감부는 이 돈으로 우리를 탄압하기 위한 경찰 관계시설, 인건비에 썼으며 일본인들을 위한 여러 가지 일에 투자했다. 담배를 끊어 그 돈으로 갚자고 했다. 2천만 국민이 20전 짜리 담배를 하루에 한 갑씩 피우지 않으면 6개월 안에 다 갚을 수 있다고 하여 이 운동을 금연 국채보상운동이라고 한다. 이 운동은 대구에서 시작되어 곧 전국으로 퍼져 각처에 기성회가 생기었다. 여자들은 반찬값을 아끼거나 패물을 처분하여 이 운동에 참가하여 곳곳에 애국부인회가 생기었다. 평양, 진주 등지의 기생들이 패물을 바쳐 이 운동에 참여했다. 이와 같이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제는 이 운동에 대해 탄압을 시작하였고, 송병준(宋秉畯) 등이 지휘하던 매국단체인 일진회의 공격과 통감부에서 국채보상기성회의 간사인 양기탁을 보상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하는 등 방해로 인해 더 이상 진전없이 좌절되었다. 결국 이 운동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경제적인 침략에 대항하여 우리 힘으로 우리 경제를 일으켜 지키자는 운동으로 그 후 1914년에 일어난 조선산직장려계 운동이나 1927년에 일어난 신간회의 우리물산장려운동과 맥이 통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국채보상운동)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