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10월 30일,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고 보다 많은 백성들에게 나라의 상황을 알리고자 통리아문 박문국 발행한 신문이 바로 ‘한성순보’이다. 발간 당시 조선은 외세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문제와 함께, 국내에서는 국민의 의식을 깨우치고 전근대적인 사회를 개혁해야 하는 등 절박한 문제들이 위기의식 속에서 접근해 오고 있었다. 당시 열흘에 한 번씩 책자 형으로 발행되었던 한성순보는, 관보 또는 잡지 형식을 갖추고 있었는데, 당시 빠르게 돌아가는 세계 정세를 백성들에게 알리고, 나라의 안녕과 정치·경제 및 문화와 제도를 소개할 목적으로 창간되었다고 한다. 이후 갑신정변으로 폐간되었다가 1886년 1월 한성주보로 재창간 되는 등 나라의 운명 앞에 폭풍같은 세월을 함께 한 ‘한성순보’는 지난 2012년 10월 17일 등록문화재 505호로 지정되었다. 신문 발간의 실무 책임자는 김인식이었으며, 그 밖에 기사를 모으고 작성하는 기자와 유사한 신분으로는 장박, 오용묵, 김기준, 강위, 주우남, 현영운, 정만조, 오세창 등이 일하였습니다.
신문의 성격은 '외국 신문을 많이 번역하여 게재하고 국내 사건도 실으며, 좋고 나쁜 것을 구분해서 취사선택하도록 하였고, 신문으로서 바름(正)을 견지할 것'을 강조하였다. 외국 기사로는 중국의 <중외신보> 와 일본의 <동경일일신보> 등 여러 신문의 기사를 선택적으로 번역하여 게재하였는데, 당시의 강대국과 약소국 간에 벌어지는 전쟁이나 군사장비, 국방정책, 개화문물, 민주주의, 의회제도 등을 소개하였다. 국내 기사로는 개인적인 일, 관(官)에서 하는 일, 한성시에서 하는 일 등을 구분하여 게재하였다고 한다.
당시 구성된 한성순보의 가로, 세로의 크기는 각각 19cm, 25cm로, 총 20 페이지 가량으로 촘촘히 만들어져 있었다. 주로 한문으로 기재 되어 있었고, 1회에 발행되는 발행부수는 약 3,000여 부수에 이른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갑신정변으로 당시 활자·인쇄시설 등이 모두 화재에 소실된 이후 한성순보 발행은 창간 1년만에 종간을 맞게된다. 당시 발행되었던 창간호에서부터 종간호까지는 현재 서울대학교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 당시의 운동사, 언론의 모습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네이버 카페 bohunsta (이달의 보훈스타 - 독립운동가 및 6.25전쟁 호국영웅)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