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전이란 임금과 신하가 정치를 논하고, 유교경전과 역사를 공부하는 곳을 말하며, 이곳에서 임금과 신하들이 정치를 논하는 것을 ‘상참(常參)’이라고 한다. 상참에 참여할 수 있는 신하는 3품의 당상관 이상이다. 이처럼 그 용도가 매우 중요해서인지 다른 전각들과 달리 지붕도 청색 유리기와로 덮은 청기와인데 이 기법은 중국에서 도입한 것으로 ‘회회청(回回靑)’이라는 비싼 안료를 외국에서 수입하여 청기와를 구웠다고 하며, 현존하는 궁궐의 전각 중에 유일하게 남은 청기와 건물이다. 12개의 평주(平柱)와 2개의 고주(高柱)로 이루어진 건물로, 고주를 앞 ·뒤로 갈라놓지 않고, 공간을 넓게 쓸 수 있도록 앞에만 고주를 세워 툇간이 앞면에만 마련되었다. 사면에는 흙벽없이 사분합(四分閤)의 광창(光窓)과 문짝으로 벽을 쳐서 방안이 어둡지 않게 하였다.
지금의 선정전(宣政殿)은 인조 25년(1647)에 광해군이 인왕산 아래에 세웠던 ‘인경궁(仁慶宮)’의 광정전을 헐어다가 중건한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아름다운 목조건물이다. 선정전에서 임금과 신하가 국사를 논할 때에는 사관이 임금의 좌우에서 회의내용을 기록했으며 이를 사초(史草)라고 한다. 사초를 토대로 선왕이 죽은 뒤 새로운 왕이 실록을 편찬하는데 이것이 현재의 조선왕조실록이며 473년간의 분량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어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선정전은 1405년(태종 5년) 창덕궁 창건 시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461년(세조 7년)에 조계청(朝啓廳)으로 불리우던 것을 선정전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임진왜란 시에는 다른 전각들과 같이 소실되었으나 1609년(광해군 원년)에 재건하였으나 인조반정 시에 다시 화재를 당하여 1647년(인조 25년)에 중건하였다. 당시 중건공사에는 인경궁(仁慶宮)의 전각을 헐어 사용하였다. 이후 1674년(현종 15년) 건물이 손상된 것을 고치라는 분부가 있었으나 현종이 동년 8월에 병으로 승하하여 그 시행여부는 알 수가 없다. 따라서 현재의 건물은 인조 때 중건된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문화유산채널, 한국문화재재단 (창덕궁 선정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