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9월30일 밤 11시45분(한국시간)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IOC총회, 올림픽 개최지 표결에서 우리나라 서울이 일본 나고야를 52대27로 누르고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됐다.
서울올림픽 유치는 1972년 뮌헨올림픽이 계기였다. 우리 사격이 북한에 뒤졌고, ‘원수의 심장을 겨누는 심정으로 쐈다’는 북한 선수 발언으로 청와대 심기가 불편했다.
이에 사격연맹회장이던 박종규가 1978년 세계사격선수권대회 유치에 성공,처음으로 국제 규모의 스포츠행사를 하게 됐다. 박종규는 1979년 8월 올림픽 유치를 건의,
박정희 대통령이 9월21일 재가하여 10월8일 올림픽유치 의사가 발표됐다. 박정희 시해로 묻혀졌다가 신군부 전두환 정권이 국민적 지지를 얻으려 1980년 9월30일 서울올림픽 유치가 거론,
12월에 IOC에 신청서를 제출했다. 박종규 회장은 스포츠 외교를 펼쳤고, 정주영 회장의 막강한 재력은 서울올림픽 유치에 추동력이 됐다. 박종규 회장은 아디다스 회장인 홀스트 다슬러와 접촉,
아디다스의 한국시장 진출을 보장하는 빅딜을 제안했다. 아디다스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유럽 IOC위원들은 서울 지지로 돌아섰다.
이로써 선진국에서만 개최되었던 세계인의 축제로 일컬어지는 올림픽이 처음으로 개발도상국에서 열리게 되었고, 우리는 세계 속의 한국의 이미지를
굳건히 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88년 24회 서울올림픽에서 한국은 금메달12개, 은메달10개 동메달 11개를 각각 획득함으로써 참가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
[해럴드경제 (해냈다! 88서울올림픽유치)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