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국권을 상실한 후 우리 민족은 35년의 일제강점기를 피해와 굴욕의 역사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민족의 주체를 지키고자 일제와 싸워 값진 승리를 거둔 독립운동사가 있다.
일제강점기 간도*와 연해주지방**으로 옮겨온 의병 출신의 애국지사와 교민들은 1919년 3·1독립운동을 계기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독립군은 1919년 하반기부터 국내 진입작전을 펼쳤고, 1920년 들어서는 임시정부를 지지하면서 북간도 지역의 독립군 단체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하였다.
그 직후에 일어난 전투가 봉오동(鳳梧洞) 전투다. 1920년 6월 7일 홍범도(洪範圖, 1868~1943) 장군이 이끈 독립군이 두만강을 건넌 월강추격대를 길림성 왕청현 봉오골로 유인하여 치열하게 싸웠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고, 300여 명에게 상처를 입혔지만, 독립군은 전사자 4명, 중상자 2명에 그쳤다. 지형을 이용한 주도면밀한 전술과 일사불란한 대응이 일군 승리였다.
이후 일제는 간도 지역의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1920년 10월 2일 훈춘(琿春) 사건을 꾸몄다. 일제가 중국 마적(馬賊)을 매수해 무기를 마련해 주고, 훈춘의 민가와 일본영사관을 습격하게 했다. 일제는 이를 독립군의 소행이라는 구실로 2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만주의 독립군 기지를 공격하였다.
청산리 대첩(靑山里 大捷)의 시작은 김좌진(金佐鎭, 1889~1930)의 북로군정서군이(北路軍政署軍) 10월 21일 삼도구 청산리 골짜기의 백운평(白雲坪)에서 독립군 토벌을 위해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 토벌대를 숙영지로 패퇴시킨 전투였다. 같은 날 늦은 오후 완루구에서 두 번째 전투가 있었다. 일본군은 홍범도의 독립군 연합부대에 의해 400명의 전사자를 내고 물러났다. 다음 날 청산리 전투에서 가장 큰 싸움이었던 어랑촌(漁郞村) 계곡에서 김좌진과 홍범도 부대가 연합하여 항공기까지 동원한 일본군을 맞아 승리했다. 이어 천수평, 맹개골, 만기구, 천보산, 고동하곡 등지에서 일본군이 퇴각한 26일 새벽까지 잇따라 엿새간 10여 차례의 전투가 벌어졌다.
청산리 대첩에서 김좌진 장군은 김규식(金奎植)·이범석(李範奭) 등과 함께 조직한 1,600여 명의 북로군정서군을 이끌었고, 홍범도 장군은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을 주력으로 한 국민회·의군단·한민회·광복단·의민단·신민단 등 1,400여 명의 연합부대를 지휘했으며, 최진동은 군무도독부의 지휘를 맡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발표에 따르면 이 대첩에서 일본군은 연대장을 포함하여 1,200여 명이 전사하고, 2,100명이 부상했다. 독립군의 전사자는 130명, 부상자는 220여 명이었다.
청산리 대첩은 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벌인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였으며, 35년의 일제 치하에서 우리 민족에게 가장 빛나는 승리를 안겨준 전투였다. 전투를 승리로 이끈 백야(白冶) 김좌진 장군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여천(汝千) 홍범도 장군은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에 추서되었다.
청산리 대첩 우표는 1982년 민족기록화시리즈(제3집)로 손수광 화백이 그린 ‘김좌진의 청산리 싸움’ 우표를 발행하였고, 올해 10월 21일 독립군의 전투정보가 실린 독립신문 제88호(1920.12.25.) 기사와 서양화가 김태의 민족기록화 청산리 전투로 구성된 ‘청산리 전투 전승 100주년’기념우표를 발행하였다. 봉오동 전투 우표는 올해 6월 5일 서양화가 임직순이 그린 봉오동 전투를 담은 ‘봉오동 전투 전승 100주년’ 우표를 발행하였고, 2018년에는 ‘홍범도 장군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를 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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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도(間島): 백두산 북쪽의 만주 지역 일대로 둥베이(東北)의 지린성(吉林省)을 중심으로 랴오닝성(遼寧省),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일대 한국인 거주지역의 통칭.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동젠다오(北間島)를 말함.
** 연해주(沿海州): 러시아 연방 시베리아 동해의 연안 지방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과목별 학습백과 한국사 고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