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초, 나는 규슈올레(九州オルレ) 길 위에 섰다. 목적지를 향해 서둘러 이동하는 여행이 아니라 길 자체를 만나기 위한 여정이다. 제주올레를 걸어본 적이 있는 내게 규슈올레는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이름으로 다가왔다.
‘올레’는 집 대문에서 큰길까지 이어지는 좁은 골목을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집에서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제주올레는 언론인 출신 서명숙이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에서 받은 감동을 바탕으로 2007년 시작되었다. 빠르게 소비하는 관광이 아니라, 천천히 걸으며 자연과 사람을 만나는 여행을 제주에서도 실현하고 싶었던 그녀의 바람이 담긴 길이다.
규슈올레는 웅대한 자연과 수많은 온천을 품은 규슈의 문화와 역사를 오감으로 즐기며 걷는 트레일이다. 2012년 제주올레의 자문과 협력을 바탕으로 조성된 규슈올레는 간세(조랑말) 표식과 리본까지 그대로 이어받았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제주의 오랜 친구를 일본에서 다시 만난 듯한 반가움이 느껴진다.
규슈올레의 상징색은 다홍이다. 다홍은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사의 도리이(鳥居) 색이자, 일본을 상징하는 새 도키(朱鷺, 따오기)의 머리와 발을 닮은 대표적인 전통색이다. 제주올레에서와 같이 간세와 화살표, 리본을 따라서 길을 걸으면 된다.
제주올레가 바람의 길이라면, 규슈올레는 숲의 길이다. 제주에서는 바다와 오름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파도 소리와 바람이 끊임없이 곁을 맴돈다. 반면 규슈에서는 울창한 숲이 하늘을 가린다. 대나무 숲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 소리, 맑은 계곡물 소리, 그리고 아름드리 삼나무들이 만들어내는 깊은 그늘이 길의 주인공이다.
마을의 풍경도 결이 다르다. 제주가 여행자를 위해 세심하게 다듬어진 길의 느낌이라면, 규슈는 주민들의 일상 한복판을 조용히 거니는 감각에 가깝다. 화분에 물을 주는 아낙네,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 밭일을 하는 노부부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관광지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여행객인 내가 그들의 일상 속을 잠시 스쳐 지나가는 행인처럼 느껴졌다.
길 위에 겹겹이 쌓인 시간의 깊이도 인상적이다. 이끼로 얼룩진 오래된 신사와 사찰, 그리고 수천 년의 세월을 견뎌온 녹나무는 말없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을 이동하는 일이 아니라, 그 땅이 품은 시간을 함께 걷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코스가 핏줄처럼 연결된 제주올레와 달리, 규슈올레는 북규슈를 중심으로 곳곳에 흩어져 있어 교통편이 다소 열악한 편이다. 왕성하게 살아 숨 쉬던 다카치호 코스는 낙석 위험으로, 이부스키 코스는 유지관리의 어려움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길도 사람처럼 태어나 사랑받다가 조용히 사라진다. 그래서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이번 여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태풍 ‘장미’의 영향으로 궂은비가 자주 내렸다. 안전을 위해 예정했던 코스를 중간에 멈춰야 했고, 때론 시점에서, 때론 종점에서 아쉽게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하지만 길은 늘 계획대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멈춰 선 시간 또한 여행의 일부다.
무엇보다 규슈올레는 나에게 깊은 고요함을 선물했다. 한참을 걸어도 마주치는 이가 없다. 6월의 이른 뙤약볕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다소 낯설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고요함이 주는 여유를 즐기게 되었다. 숲의 향기를 맡고,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오롯이 내 발걸음 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제주의 바람길이든 규슈의 숲길이든 길은 결코 사람을 재촉하지 않았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걸으라는 것, 목적지보다 그 과정이 더 소중하다는 것, 그리고 길 위에서 자기 자신을 만나라는 무언의 위로였다.
여행은 끝났지만 길은 끝나지 않았다. 규슈의 숲길은 어느새 내가 걸어온 인생의 길과 겹쳐진다. 지나온 세월 속에는 기쁨도 있고 아쉬움도 있다. 하지만 굽이돌아온 길도, 잠시 멈춰 섰던 길도 모두 오늘의 나를 만들어 준 소중한 여정이다. 언젠가 또 다른 길 위에 서게 되더라도 나는 알 것이다.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보다, 지금 걷고 있는 이 한 걸음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글을 마치며, 아름다운 길의 씨앗을 뿌려주고 우리 곁을 떠난 제주올레 서명숙(1957~2026) 이사장의 명복을 빌어본다.
우정사업본부는 2016년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지’ 시리즈로 월정사 전나무 숲길, 하동 십리벚꽃길, 영덕 블루로드와 함께 제주 올레길을 우표에 담았다. 우표 속 작은 길을 보며, 문득 깨닫는다.
‘길은 사람을 만나게 하고, 그 속에 삶이 있다.’
참고)
규슈올레 코스
• 후쿠오카(福岡)현: 무나카타 오시마, 야메, 구루메 고라산, 미야마 기요미즈야마, 지쿠호 가와라, 신구 다치바나, 신구 아이노시마 코스
• 사가(佐賀)현: 다케오, 우레시노 코스
• 나가사키(長崎)현: 마쓰우라 후쿠시마, 시마바라, 미나미시마바라 코스
• 구마모토(熊本)현: 아마쿠사 이와지마, 아마쿠사 마쓰시마 코스
• 오이타(大分)현: 오쿠분고, 사이키 오뉴지마 코스
• 미야자키(宮崎)현: 오마루가와 코스
• 가고시마(鹿児島)현: 이즈미 코스
각 코스 안내 및 지도는 규슈올레 홈페이지(http://kyushuolle.welcomekyushu.jp)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