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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로 보는 우편 130년

일화로 보는 우편 130년 콘텐츠는 한국 우편에 대한 역사를 소소한 이야기로 풀어내는 공간입니다.

일화로 보는 우편 130년
제목 광복 후 최초로 개최한 체신문화전람회
등록일 2013. 12. 13.
첨부파일 up20131213181500840.jpg
첨부파일
1950년 1월 1일은 우리나라가 만국우편연합(UPU)에 가입한 지 5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우리나라가
국제기구에 가입한 것은 UPU가 처음이기에 국가적으로도 매우 뜻깊은 날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처음 맞는 50주년 기념일이어서 체신부는 거국적인 기념행사를 거행하기로
하고, 아울러 체신문화전람회도 개최하기로 했다.
우리나라가 UPU에 처음 가입한 것은 1900년 1월 1일이었다. 1884년 11월 우정총국을 설치하고 우편
업무를 처음 개시할 때부터 조선 정부는 UPU에 가입하려 했으나, 그럴만한 여건이 조성되어 있지
않았다. 우정총국 개국식장에서 발생한 갑신정변으로 우정총국이 개국한 지 20일 만에 문을 닫아 우편
사업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1893년 12월 조선 정부는 UPU 사무국이 소재한 스위스 정부에 UPU
가입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으나, 국제우편을 실시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않아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 뒤 1900년 1월 1일 국제우편을 실시하게 됨에 따라 그 날부터 UPU의 정식 회원국이 될 수
있었다.
UPU는 그렇게 우리나라와 최초로 인연을 맺은 국제기구가 되었으나, UPU의 관계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UPU에 가입한 뒤 우리나라가 총회에 참석한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1900년 7월 스위스
베른에서 개최된 UPU 창립 25주년 기념 임시총회에 우리나라는 스위스 정부의 초청을 받아 참석할 수
있었다. 그것이 우리나라 대표가 참석한, 마지막 UPU 총회였다. 제6차 총회는 1904년 로마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노일전쟁으로 연기되었다. 1년 뒤인 1905년 일본의 강요로 한일통신기관협약을 체결하게
되면서 우리는 통신권을 일본에 강탈당했다. UPU 회원국 자격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우리 대신 일본이
행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1947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제12차 UPU 총회가 개최되었다. 우무국장
이동환은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하여 그 동안 일본이 도용했던 귀중한 한 표를 되찾겠다며 큰 기대를
걸었으나,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당시 한국은 미군정의 지배를 받고 있어 한국인을 대표로 파견할 수
없었다. 따라서 미 군정청에서 지정한 연합군총사령부 래틴 대령과 미국 우정성 직원이 한국 대표로
참석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대표가 참석하지 못했으나 파리총회에서는 매우 의미 있는 결정이 내려졌다. 한국의 예와 같이,
이미 UPU에 가입한 나라로서 한때 총회에 참석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국가에 대해 UPU 회원국으로서의
기득권을 인정하기로 결의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은 사실상 UPU 회원국 자격을 회복할 수 있었다.
UPU와의 관계에서 그처럼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있기에 체신부는 UPU 가입 5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히
치르기로 했다. 통신 분야는 다른 분야에 비해 빛나는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는 데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어서 성대한 기념행사를 거행하기로 했다. 기념행사를 개최하려면 정부의
예산 지원이 선행되어야 하기에 행사비용으로 1962만 4300원을 계상하여 국무회의에 상정했다.
1949년 7월에 열린 국무회의에서는 행사의 필요성은 인정했으나, 행사비용 문제는 정부 예산을 담당하고
있는 기획처로 넘겨 심의하도록 했다. 예나 이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정부의 예산이었다. 체신부와
기획처 간에 십수 차에 걸친 협의를 거친 끝에 낙착된 예산이 429만 원으로 체신부가 요구한 예산의
4분의 1에 불과했다. 따라서 애초에 구상했던, 국제적인 규모의 행사 개최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체신부는 적은 예산으로 가장 효과적인 행사를 치르기로 하고, 당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기념우표를
발행하는 한편, 기념식과 체신문화전람회의 개최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 기념식에서는 체신의 전통을
빛내자는 뜻에서 구한국시대에 체신 분야에 종사했던 선배들을 표창하기로 했다. 또한 체신부는 사업
관청이기에 체신사업의 내용을 널리 홍보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우편사업은 물론 전신ㆍ전화사업까지
널리 소개하는 체신문화전람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기념식은 1월 1일에 거행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행사 예산이 결정된 시점이 12월 17일이어서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준비 기간을 고려하여 1월 30일에 기념식을 거행하고, 그 날부터 2월 5일까지 7일 동안
체신문화전람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체신부 각 국의 간부들로 기념행사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우정국장
최재호가 위원장 자리를 맡아 행사 준비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광복 후 처음 치르는 큰 행사인데다 예산이 부족하고 물자가 부족한 시절인지라 준비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없었다. 체신부 직원들은 난로도 없는 사무실에서 벌벌 떨며 야간작업까지 하다 갑자기 내린
폭설로 귀가하지 못하고 외투를 뒤집어쓴 채 밤을 새우기도 했다.
1950년 1월 30일 마침내 UPU 가입 50주년 기념식이 조선호텔에서 개최되었다. 아침부터 비가 줄기차게
쏟아졌으나 기념식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국무총리 이범석을 비롯하여 각부 장관과 국회 교체분과
위원장은 물론 김성수, 조병옥, 백남훈, 장택상, 안재홍, 주한미국대사 무초 등 수많은 국내외 귀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체신부 행사에 그처럼 유명한 인사들이 운집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구한국시대의 체신 유공자로 독립운동가 오세창, 한성우체사 주사 서용희, 진주우체사 주사
이덕규, 전주전보사장 김붕남, 광주우체사 대판 서정희, 인천전보사 주사 오진근 등이 상을 받았다. 또한
국제우편 공로자로 초대 체신부장 길원봉, 전 우무국장 이동환, 초대 체신부장관 윤석구, 2대 체신부차관
박용하, 우정국장 최재호, 그리고 미국 우정성 직원 밀러 등이 수상했다.
기념식 행사의 백미는 구한국시대에 활동했던 선배 체신인들이 상을 받는 모습이었다.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오세창은 1895년 우편사업을 재개할 무렵 농상공부 통신국장을 지낸 인연으로 수상하였는데,
보행이 어려운 불편한 몸임에도 사위의 부축을 받으며 식장에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나머지 수상자 역시
70대 내지 80대의 백발노인임에도 서로 동료들의 이름을 부르며 부등켜 안고 눈물을 흘렸다. 현직에서
물러난 지 50년이 되었으니 감회가 남다르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 광경을 목도한 참석자들은 감회에
젖은 눈으로 바라보며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전통과 가족적인 직장 분위기를 중시한 체신부가
아니고서는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또 하나의 행사인 체신문화전람회는 1월 30일부터 2월 5일까지 7일 동안 미국문화연구소(뒷날의 미도파
백화점 자리)에서 개최되었다. 제목 그대로 체신문화전람회였기에 전시회는 체신부의 각 실ㆍ국에서
출품한 작품으로 꾸며졌다. 우정국에서는 UPU 총회에 참석한 우리나라 대표와 각국 대표의 사진, 한ㆍ미
간에 체결한 소포우편교환협정서, 구한국시대의 체신 관련 서적, 만국우편연합 체송료 도표, 각종 우표와
우편엽서, 우표책, 환금 및 저금사업 선전 사진, 우편저금 및 진체저금의 운영 도표 등을 출품했다.
전무국에서는 각종 전화기와 실험품, 가공케이블의 표본 등을 전시했다. 전파국에서는 무선통신의 발달
연표, 무선기계의 개요, 국제통신망 도표, 초단파 송신 및 수신장치, 녹음장치 등을 내놓았다. 그밖에
보험국, 경리국, 비서실에서도 업무와 관련된 사진이나 도표 등을 출품했다.
출품작 중에서 가장 인기를 끈 것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전시한 각종 우표였다. 애초에는 UPU 가입
5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우표전람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국내에서 발행한 우표만으로는 전시품을
채울 수 없어 미국과 일본에서 찬조 출품을 받기로 하고, 그들 나라 우정성에 협조를 구하려 했다.
일본과는 이미 협조하기로 약속한 바 있고, 미국과는 미국 우정성에서 파견된 우정국 협의관 밀러를 통해
협조를 구하기로 했다. 그런데 예산이 대폭 삭감된 바람에 국제적인 우표전시회를 포기하고, 대신
소규모의 우표전시회를 개최하기로 했던 것이다.
국내의 출품작만으로 이루어진 우표전시회는 대한우표회의 협조로 성사되었다. 우정국장 최재호가 대한
우표회 간부 윤종호와 오지섭을 초청해 협조를 구했던 바, 대한우표회에서 적극 협조한 덕분에 우표
전시회를 순조롭게 개최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한국 우표 59틀, 외국 우표 26틀, 우표의 원화 및 동판,
각종 우편엽서, 우표첩, 기념통신일부인, 우표 제조과정설명서 등을 진열할 수 있었다.
전시된 우표 작품 중에서 가장 인기를 끈 것은 외국 우표와 통감부 통신관리국 시절 구한국우표를
수록하여 만든 ‘한국우편절수첩’(일본어판), 그리고 미 군정청 시절 우무국에서 발행한 조선오버프린트
우표와 해방기념우표를 수록한 ‘조선우표’였다. 공식적인 명칭이 우표전시회는 아니었으나, 그것이 광복
후 우리나라에서 개최한 최초의 우표전시회였다. 한국우정사 등 체신부에서 발행한 역사책에는 1954년
8월 미도파백화점에서 개최한 우표전람회가 전국우표전시회의 효시라 기록하고 있는데, 사실상의 우표
전시회는 1950년 1월에 개최한 체신문화전람회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우리나라에서 처음 개최한 우표전시회는 몰려드는 관객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주요 관객은
중학생이 중심이 된 학생층과 우표수집가들이었다. 그들은 우리나라 우표와 외국 우표를 비교함은 물론
우표 제조 과정에 대한 설명서까지 관심을 쏟으며, 하루 평균 1만 7000원어치의 우표를 사가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7일 간에 걸친 체신문화전람회는 전시 기간의 연장을 신청해 올 만큼 많은 관심과 인기를 모은 끝에
성대히 종료되었다. 6ㆍ25 직전의 혼란기임에도 연 인원 6만 6000여명이 관람했고, 우표류 판매액만 해도
10만 8000여원에 이르렀다.
체신문화전람회 행사 중에서 또 하나 특기할 사항은 구한국시대 체신사업에 종사했던 선배들과 현직
체신부 간부들이 둘러앉아 나눈 좌담회였다. 좌담은 선배들이 구한국시대의 체신사업에 대해 회고하고
후배들이 듣는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체신 분야에 종사하게 된 동기에 대해 선배들은 기능이나
기술 보유자가 취직을 쉽게 할 수 있고 대우가 좋기 때문이라 했다. 모르스부호가 신기해 체신 분야에
몸담았다는 이도 있었다. 상투를 틀고 담뱃대를 문 채 편지를 배달하고 전화 교환을 했던 집배원과 전화
교환원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문위우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1905년 일본이 을사조약을 강요하여
우리 통신기관을 강탈할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당시 협정에 조인한 통신원 총판 장화식은
이완용과 같이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한 이도 있었다.
당시는 우리나라 체신의 역사가 오늘날처럼 잘 정리되어 있지 않은 시절이었다. 따라서 선배들이 들려 준
이야기는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역사의 생생한 증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야기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음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좌담회가 끝나자 체신부 간부들은 선배들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백발이 성성한 선배들은 후배들의
정성어린 환대에 만족했던지 거듭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처럼 선후배가 모여 지난날을 회고하는 좌담을
개최하고 뒤풀이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적인 직장 분위기를 중시한 체신인의 전통이 있기에 가능
했던 것이다.
“우리가 만일 이번 기념행사를 어느 부처에서나 하는 식으로 치렀더라면, 하나의 형식적인 행사에
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창의적으로 공부하였기에 참석자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고, 일반
국민에게 체신사업에 대한 인식을 깊게 하여 체신의 위신을 높이 선양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가 업무 분야에서 보다 많은 연구심을 기울인다면 훌륭하게 개선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기념행사를 마치고 나자, 준비위원장 자리를 맡아 준비 작업에 진력했던 우정국장 최재호는 직원들을
모아 놓고 그렇게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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