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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로 보는 우편 130년

일화로 보는 우편 130년 콘텐츠는 한국 우편에 대한 역사를 소소한 이야기로 풀어내는 공간입니다.

일화로 보는 우편 130년
제목 인천우체국 130년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등록일 2014. 3. 20.
첨부파일 첨부파일없음
현재 ‘인천중동우체국’이라 불리고 있는 인천우체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우체국이다. 인천
우체국이 우편 시설을 갖추고 업무를 개시한 것은 1884년 11월 18일이었다. 당시의 명칭은 인천우체국도
아니요 인천우체사도 아닌, 우정총국 인천분국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설립된 우체국은 서울 견지동에 있었던 우정총국이었다. 우정총국은 전국적으로
우편사업을 실시할 목적으로 설치한 기관이기에 현업기관이라기보다 전국을 아우르는 통신기관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출범 당시에는 그 기관이 현업 업무인 우체국 업무까지 겸하고 있어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이라 해도 무방했다.
1884년 4월 고종이 우정총국을 설치하라는 칙령을 내렸을 때, 우편업무를 실시할 대상으로 선정된
지역은 서울과 인천 두 곳이었다. 따라서 서울에서 접수한 우편물을 인천으로 보내고, 인천에서 접수
하거나 인천에 도착한 우편물을 서울로 보내는 것이 우정총국의 주요 업무였다. 그런데 먼저 서울에 우정
총국을 설치하여 그러한 업무를 수행하게 되었기에 인천에 분국을 설치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실시한 신식 행정제도인 우편업무를 서울과 인천 두 곳에서 먼저 실시한 것은 외국과
주고받는 국제우편물을 염두에 둔 조치라 할 수 있었다. 서양의 우체국제도를 도입하기 전에 우리
나라에는 역참제(驛站制)라는 통신 방식이 있어 서울과 지방간의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었으나, 그것은
조정과 지방관청 간의 통신에 이용되었을 뿐 백성들의 통신용으로 이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일반 백성을
위한 통신제도는 사실상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고종이 서양의 예를 본떠 우체국제도를 실시했을 때도
백성을 위한 통신기관이라기보다 정부와 지방, 정부와 외국과의 통신에 초점을 맞추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통신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인천우체국 역사를 생각할 때 맨 먼저 떠오르는
궁금증은 우정총국 인천분국의 위치가 어디였을까라는 점이라 할 수 있다.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궁금증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인천분국이 처음 문을 연 곳은 감리서(監理署)
건물이었다고 한다. 인천지역의 향토사학자 조우성은 그의 저서 ‘인천 이야기 100장면’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인천감리서 안에 설치된 인천분국에서는 월남 선생을 위시한 여러 직원들이 한복 차림으로 출근해 또
하나의 근대화의 장을 연다는 벅찬 가슴으로 ‘인(仁)’자도 선명한 첫 스탬프를 찍었다. 그러나 12월 4일
우정총국 개업 축하연에서 벌어진 갑신정변으로 우정국은 아쉽게도 12월 9일 폐쇄되었고, 그 주역이었던
홍영식은 대역죄로 처형되는 불운을 맞았다.”
인천분국이 인천감리서 안에 설치되어 있었다는 근거는 제시되지 않았으나, 당시의 사정을 감안하면
쉽게 수긍할 수 있다. 우정총국 인천분국이 개설된 해인 1884년 당시에는 인천에 설치된 신식 행정기관이
인천해관과 인천감리서밖에 없었으니, 그 두 기관 중 하나에서 우편 업무를 실시하게 되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인천이 개항하여 바깥세상으로 문을 열기 시작한 것은 1883년 1월이었다. 개항하기 전의 인천항은
한적한 어촌으로 갈대가 무성한 황무지에 불과했다. 그 조용한 땅에 일본인이 들어와 영사관을 짓고,
우체국이며 경찰서, 무역회사, 잡화상, 해운회사 등을 세우며 도시를 형성해 나갔다. 바로 그 해에 조선
정부는 인천해관과 감리서를 설치하고 개항에 대비했다. 각국의 영사관과 외국인 거주지도 속속 조성
되었다. 그처럼 인천은 서울 관문에 위치해 있다는 지리적 여건에 힘입어 새로운 개발지로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고 있었다.
인천감리서가 있었던 인천시 중구 신포동에 ‘인천감리서 터’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그때 조선 정부가 근대식 행정기관으로 설립한 것이 해관과 감리서에 이어 우체국이었다. 개항사무소와
우체국은 취급 업무가 다르므로 당연히 새로운 건물을 지어 사무를 보게 함이 마땅했으나, 당시의 조선
정부의 재정은 몹시 궁핍했다. 우체국을 신축할 재정적인 여력이 없었다. 때문에 서울에 설치한
우정총국은 업무가 중단된 전의감 건물을 사용하게 했고, 인천분국은 인천감리사 건물을 사용하게 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우정총국이 폐지되고 난 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인천감리에게
인천분국의 우표와 여러 가지 물건을 보래(報來)하도록 지시했던 것으로 보아 인천분국이 인천감리서
안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감리서란 고종 시절에 처음 설치한 관청으로 개항장과 개시장(開市場)의 업무를 맡았다. 1883년 부산과
원산, 인천에 처음 설치했고 이후에는 다른 개항장에도 설치했는데, 오래지 않아 폐지되었다.
현재 인천시 중구 신포동에는 인천감리서 터가 남아 있어 우정총국 인천분국의 위치가 그 곳이었음을
말해 준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인 우정총국 인천분국을 개국한 사람은 한말의 민족지도자였던 월남 이상재였다.
우정총국 사사(司事)라는 낮은 벼슬로 그 업무를 맡았다. 뒷날 초대 주미공사가 된 박정양의 식객이었을
뿐 벼슬자리에 오른 적이 없던 이상재가 우정총국 사사로 발탁된 것은 우정총국 총판 홍영식과의
개인적인 친분 덕분이었다. 우정총국을 개설하게 되자 홍영식은 아직도 식객 노릇을 하고 있는 이상재를
불러 인천분국장 자리를 맡기며, 장차 우정총국에 관한 일은 그에게 일임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홍영식
자신이 우정총국 총판 자리에 오래 머무를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후임으로 이상재를 점찍었던 것 같다.
홍영식이 이상재를 처음 만난 것은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을 때였다. 1881년 4월 고종은
박정양, 홍영식, 어윤중 등 장래가 촉망되는 관원 12명을 선발해 일본으로 파견했다. 그들을 파견한
목적은 일본 정부 내의 각 기관이 담당하고 있는 업무를 자세히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조사(朝士)라는
이름으로 파견된 관원들은 각자 업무를 분담해 담당 분야에 대해 책임지고 조사해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케 했다. 그들로 하여금 보다 심도 있는 조사를 하게 하기 위해 수행원 2명, 통역 1명, 하인 1명씩을
붙여 주었다.
그때 조사 박정양의 수행원으로 따라간 사람이 다름아닌 이상재였다. 박정양의 담당 기관은 일본
내무성과 농상무성이었는데, 이상재는 농상무성이 관장하고 있는 우편사업에 대해 조사해 방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 보고서를 보고 감탄한 홍영식이 이상재에 대해 호감을 갖고 우정총국 사사로 임명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정총국 사사로 임명되었다는 사실뿐 이상재가 그밖에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인천분국장으로서 어떻게 개국 준비를
했고, 우체국 운영을 어떻게 했으며, 언제까지 우체국을 운영했는지 알 길이
없다. 1884년 12월 4일에 일어난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나면서 우정총국은
곧바로 문을 닫았다. 1970년에 발간된 ‘한국우정사’는 인천분국이 폐국된
날짜를 1885년 1월 16일로 기록하고 있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우정총국은 즉시 업무를 중단했으나, 실제로 왕명으로 폐국 조치를 내린 시점이
늦어지다 보니 그와 같은 간격이 생겼던 것 같다.
갑신정변의 실패와 함께 초대 우정총국 인천분국장 이상재도 그 자리를 잃었다.갑신정변이 3일 만에
끝나고 그를 발탁했던 홍영식이 대역죄인으로 몰리면서 그 역시 죄인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되어 그
자리를 떠나야만 했다. 그 뒤 그는 다시는 우편사업과 인연을 맺을 수 없었다.
갑신정변으로 중단되었던 우편사업을 다시 시작한 것은 11년 뒤인 1895년 7월 22일(음력 6월 1일)이었다.
그때 서울과 인천 두 곳에 우체사를 설치하고 우편 업무를 재개했다. 한성에는 농상공부 통신국 내에
한성우체사를 설치하고 인천에는 이운사(利運社) 내에 인천우체사를 설치하여 두 지역에서 우편 업무를
동시에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농상공부대신 김가진의 이름으로 발표한 고시가 남아 있어 인천우체사가
이운사 건물 내에 개설되었음을 알 수 있게 했다.
“한성우체사는 통신국 내에 개설하였고 인천우체사는 인천항 축현 서판하(西阪下) 앞 이운사 내로 개설
하였으니 한성 인천 간에 기신(寄信)하기를 요할 시는 착오 없기 바람.”
위에서 축현이란 ‘싸리나무고개’라는 뜻을 지닌 지명이며, 서판하는 ‘서쪽 언덕 아래’라는 뜻이니
이운사가 위치한 자리가 오늘날의 중구 경동이었음을 말해 준다.
이운사는 우리 자본으로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 해운회사였다. 철도가 부설되기 전까지 국내에서
산출한 곡식이나 소금, 목재 등을 운반할 때는 배를 이용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해운업이 발달하지 못한
시절인지라 재래 기술로 운항하던 우리나라 선박은 곧잘 사고를 일으켰다. 현대화된 증기기관으로
무장한 외국 선박이 등장하면서 우리나라 해운업은 그들의 독무대가 되었다. 몇몇 민간인이 외국 기선을
구입하고 외국인 선원을 고용하여 해운회사를 운영했으나, 고도의 항해술로 무장한 외국 선박과는 경쟁
할 수 없었다. 그러자 해운업의 중요성을 인식한 조선 정부에서 설립한 해운회사가 바로 이운사였다.
1892년 12월 이운사를 설립한 기관은 전운국(轉運局)이었다. 전운국은 조선 말기 근대화사업의 일환으로
설립한 관청으로 전국에서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곡식을 배로 운반하여 관리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
전운국이 이운사를 설립한 것은 전국 각지에서 모은 세곡을 배로 운반하기 위해서였다. 이운사는 재정이
빈약한 조선 정부 단독으로 설립할 수 없어 청나라로부터 20만 냥의 차관을 도입하여 관민 합동으로
설립했다.
새로 설립한 한성우체사와 인천우체사는 농상공부 통신국 소속이었다. 전운국에서 담당한 해운 업무
역시 농상공부 통신국 소속이었다. 따라서 새로 설립된 인천우체사가 전운국에서 설립한 이운사
건물에서 업무를 개시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1933년 일본인이 쓴 ‘인천부사’는 인천우체사가 개인 소유의 건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895년 6월에 이르러 조선 정부는 우편국을 개설했다. 이를 우체사라 칭했는데, 그 건물은 현재 외리
226번지에 소재한 이동준씨 댁이 그 곳이다. 1898년 현재 인천우편국 소유로 되어 있는 내리 113번지는
큰 도로에 면접해 있는 시가지의 분위기와 다른 오래된 면모를 갖춘 집으로 이곳에 우체사와 전보사가
옮겨졌다.”
그처럼 농상공부 고시와 인천부사의 기록이 서로 다른 것 같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운사가 처음 사무실을 개설할 때 이동준의 집을 사 사무실로 사용했다면 두 기록에 차이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 외리가 바로 경동이며, 이운사의 첫 번째 건물이 한옥이었다는 사실이 그와 같은
추정을 가능케 한다.
‘인천부사’에는 당시의 인천우체사에 대한 부분적인 기록이 남아 있어 소개하기로 한다.
“그때는 국장 김장한 씨 외에 주사 2명과 몇 명의 체송집배원이 있었다. 매일 취급하는 우편물은 근근히
50~60통에 지나지 않았다. 문화의 정도가 낮아 아직 우편 이용 방법을 알지 못한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또 경인에 체류하는 일본인과 서양인들이 신용이 보장된 일본우편국을 이용하는 것도 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인천우체사는 1898년 전보사와 함께 내리 113번지(현 중소기업은행 인천지점 동편)로 이전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울과 인천에 맨 처음 우체국을 설립한 것은 서울에서 인천을 거쳐 외국으로
나가는 우편물과 외국에서 인천을 거쳐 서울로 들어오는 우편물을 염두에 둔 조치라 할 수 있었다.
그만큼 조선 내에서의 우편의 필요성은 국내보다 해외가 절실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당시의 우편
업무에서는 두 지역 내에서의 시내 배달에 못지않게 두 지역으로 오가는 우편물 교환이 매우 중요한
업무가 되었다.
우편사업을 재개한 시점인 1895년 당시에는 기차도 없고 자동차도 없었다. 우편물을 운반하려면 손에
들거나 어깨에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었다. 상대편 지역으로 가는 우편물을 교환하기 위해 ‘우전인
(郵傳人)’이라 불렸던 두 우체국 체전부가 중간 지점에서 만났다. 그 곳이 지금의 서울 구로구 오류동에
있었던 신장기라는 마을이었다. 인천우체사 체전부는 매일 오전 9시에 우체낭을 짊어지고 신장기를 향해
출발했고, 한성우체사 체전부도 같은 시각에 출발했다. 서울과 인천에서 동시에 출발한 체전부들은 그
곳에서 만나 우편물을 교환했다.
체전부의 발걸음은 매 시간 10리 걷는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 오류동에서 만나 우편낭을 교환하는데
소요된 시간은 20분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본다면 당시의 우전인들은 하루에 9시간 가량 80리의 길을
걸으며 우편물을 교환했던 것이다. 경인선 철도가 깔리기 전까지 그들은 그처럼 걸어다니며 우편물을
교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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