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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로 보는 우편 130년

일화로 보는 우편 130년 콘텐츠는 한국 우편에 대한 역사를 소소한 이야기로 풀어내는 공간입니다.

일화로 보는 우편 130년
제목 홍영식의 집이 광혜원으로 바뀐 사연
등록일 2014. 1. 29.
첨부파일 up20140129143042479.jpg
첨부파일
갑신정변의 실패는 갓 출범한 우편사업에 치명타를 안겼다. 우편사업의 운영 기관인 우정총국은 문을
닫았고, 우편사업은 중단되어야만 했다. 우정총국의 운영 책임자인 홍영식이 갑신정변의 주역인 데다,
정변을 일으킨 장소가 우정총국이었으니 그 기관이 무사할 리 없었다. 갑신정변의 피해는 우정총국이
문을 닫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쿠데타의 주역인 김옥균과 박영효, 서재필 등 혁명 주체 세력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일본으로 도망쳐야만 했고, 홍영식과 박영교 등을 비롯한 수많은 행동대원들은 목숨을
내놓아야만 했다.
그처럼 피해를 입은 것은 쿠데타 주역들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가족도 참혹한 죽음을 면치 못했다.
영의정까지 지낸 바 있는 홍영식의 아버지 홍순묵은 열 살이 안 된 손자와 함께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홍영식의 처 한씨도 자살을 강요당했다. 홍영식의 배다른 형 홍만식은 큰아버지 홍순경의 양자로 입적
돼 있었는데, 문과에 급제하여 여주목사와 이조참판까지 지냈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자살을 기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양자가 된 덕분에 연좌제에서 벗어나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1894년 개화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신원이 회복되었고, 그 뒤 춘천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1905년 일본의 강요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독약을 먹고 죽었다. 그처럼 쿠데타의 실패는
한 가족의 몰락으로 끝을 맺었다.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은 가족만이 아니었다. 주인을 잃은 홍영식의 집은 그대로 방치되었다.
방바닥과 벽에는 자살한 가족들의 핏자국이 들러붙어 있었고, 약탈당한 가재도구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채 폐가가 되었다. 그런 건물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설한 서양식 병원이 되었으니, 그 배경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서양식 병원을 개설한 사람은 미국인 의사 알렌(Allen; 한국어 이름 안련(安連))
이었다. 조선에 온 지 1년이 채 안 된 알렌이 서울에서 병원을 개설하게 된 것은 갑신정변 덕분이었다.
홍영식이 갑신정변으로 망했다면, 알렌은 갑신정변의 덕을 톡톡히 본 인물이기에 흥미롭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혜원을 설립한 미국인 의사 알렌
미국 오하이오주 출신인 알렌은 신학에 이어 의학을 공부한 뒤 의사 겸 선교사로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일차적인 목표는 기독교 선교였다. 아내가 출산한 데다 선교가 여의치 않자 선교 대상지를
조선으로 바꿨다. 1884년 7월 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제물포로 건너왔다.
서울에 도착하자 미국공사 푸트(Foote)가 반기며 미국공사관의 부속 의사 자리를 제의했다. 그는 의사
생활부터 시작하기로 하고 상하이에 머무르고 있는 아내를 데려왔다. 그때 그의 인생을 180도 전환시킨
일대 사건이 터졌다. 갑신정변이었다.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개화파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수구파의 거물 민영익이 칼로 난자당해 초주검이 되었다. 알렌은 당시 조선 정부의 외교 고문으로 활약
하던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부름을 받고 사건 현장으로 달려갔다.
알렌은 조선 사람에겐 낯선 서양 의술로 동맥이 끊기고 온몸을 난도질당한 민영익의 몸을 짜깁기하듯
꿰매고 다듬어 기적적으로 살렸다. 뿐만 아니라 전란 중에 부상당한 청나라 군사 100여명도 살렸다. 그
소문이 조선 팔도에 쫙 퍼졌다. 환자들이 매일같이 몰려와 병을 고쳐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심지어
바늘이 멈춰 서 있는, 죽은 시계를 가져와 살려 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고종은 그를 어의(御醫)로 임명해
궁궐을 드나들게 했다. 고종과 민비의 신임까지 얻자, 그의 의료사업은 순풍에 돛단 듯했다.
알렌은 의술을 통해 선교사업을 펼치기로 하고, 미국대리공사 포크를 통해 국립병원 설립안을 조선
정부에 제출했다. 서양식 병원을 설립하여 알렌이 직접 운영하기로 하고, 조선 정부의 지원을 요청했던
것이다. 고종은 이를 윤허하고 병원 건물로 재동에 있는 큰 한옥 한 채를 하사했다. 바로 갑신정변 때
피살된 홍영식의 집이었다.
조선 정부는 알렌의 병원 설립안을 받아들여 1885년 2월 18일(양력 4월 3일) 병원 설립을 허가하고
광혜원(廣惠院)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뿐만 아니라 병원 설립을 적극 지원했다. 폐가가 된 홍영식의
집을 병원 건물로 하사하고, 광혜원당랑을 임명하여 병원의 업무를 지휘 감독하게 하고, 학생 4명을 선발
하여 병원에 배치했다. 학생들은 의사를 돕고 의사의 지시에 따라 의약품을 조제하고 투약하는 일을
맡도록 했다. 또한 병원의 운영을 담당할 주사 2명을 배치했다. 환자에게 진료비를 받았는데, 병실의
등급에 따라 진료비에 차등을 두도록 했다. 의사 알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조선인으로 배치했다.
그처럼 사실상 국가에서 운영하고 진료비를 받았으므로 사실상 국립의료원이라 할 수 있었다.
알렌이 처음 병원 건물로 지정된 집을 찾아갔을 때, 홍영식의 집은 철저하게 약탈된 상태였다. 문짝이며
창문, 난로 등 제대로 남아 있는 물건이 없었다. 방바닥과 벽에는 핏자국이 그대로 엉켜 있었다. 위패가
두 개 남아 있었는데, 신주는 없고 껍데기만 나뒹굴고 있었다. 아무튼 갑신정변으로 덕을 톡톡히 본
서양인이 같은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의 집을 물려받아 영업장으로 사용하게 되었으니, 인연 치고는
참으로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광혜원을 개원하게 되면서 오랜 세월 백성들의 국립병원 역할을 해온 혜민서를 폐지하기로 했는데,
혜민서에 소속된 관원만 해도 1000여명이 나 된다고 했다. 그 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게 되었으니 불평
불만이 없을 수 없었다. 혜민서에는 한의학을 공부하는 학생이 다수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광혜원
으로 이속될 것이며, 나머지 관리들도 전속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광혜원이 개원한 지 보름쯤 뒤, 고종은 그 병원에 제중원(濟衆院)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20여 명의
관리와 하인을 배치했다. 왕립병원이기에 미국 선교회 측에서는 병원장만 파견하고 일체의 운영비는
조선 정부가 부담했다. 병원에는 매일 수많은 환자가 밀어닥쳤는데, 첫해에만 무려 1만여 명의 환자를
치료했다고 한다. 장티푸스, 천연두, 이질, 폐결핵, 매독, 나병 등 난치병 환자가 대부분이었다.
알렌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하루에도 수많은 환자를 진료해야만 했다. 그래도 환자가 계속 늘어나자 미국
감리교 선교회 소속인 스크랜턴(Scranton)에 이어 북장로회에서 헤론이라는 의사를 추가로 파견했다.
이듬해에는 여의사 엘러스(Elless)가 합류하면서 제중원에 부인부(婦人部)를 신설하는 한편 왕실
여인들의 진료까지 맡게 되었다.
1985년 연세대학교 구내에 있는 수경원 뜰에 복원한 광혜원의 모습
1887년 초 알렌은 병원을 서울 남쪽인 구리개(銅峴)로 옮겼다. 환자가 늘어나면서 보다 넓고 쾌적한
장소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현재의 을지로2가에서 명동성당에 이르는 땅에 40병상 규모의 병원을 짓고
새롭게 운영했다. 구리개는 약재상들이 모여 있는 서울 약업의 중심지여서 혜민서도 그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알렌의 제중원 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의사이자 선교사인 앨런은 느닷없이 외교관으로 변신했다.
1887년 8월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로 부임해 공사관을 개설할 때 참찬관(參贊官)으로 따라갔다. 그만큼
고종의 신임을 듬뿍 받고 있었다. 그 뒤 주한미국공사로의 변신을 꾀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조선으로
돌아와 잠시 제중원장 자리를 맡았다. 그러다 1890년 7월 미국공사관 참찬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외교관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 뒤 부총영사, 대리공사, 변리공사 겸 총영사를 거쳐 1901년
특명전권공사까지 승진했는데, 1905년 일본과의 마찰로 해임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알렌이 주미조선공사 박정양의 수행원으로 미국으로 건너가자 제중원의 진료는 헤론이 맡았다. 엘러스가
결혼하게 되면서 여의사도 바뀌었다. 그 뒤 헤론이 사망하자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파견된 빅톤
(Victon)이 의료 업무를 맡다 1893년 추가로 파견된 에비슨(Avison)이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
그처럼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병원에 대한 정부의 간섭이 심해지고 병원을 운영하는 조선 관리들의 부패가
심해지면서 병원 운영이 부실해졌다. 선교사들은 병원의 재산권과 운영권을 넘겨주지 않으면 철수
하겠다고 통보했다. 오랜 협상 끝에 조선 정부는 선교사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1897년 병원의
운영권이 미국 북장로회로 넘겨졌다.
제중원의 운영을 맡은 에비슨은 1893년 조선으로 건너온 이후 병원을 발전시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단층 건물의 좁은 병원을 40개 병상을 갖춘 건물로 바꾸고, 병원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미국에서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클리블랜드 장로교회 장로인 세브란스(Severance)가 “주는 기쁨이
받는 기쁨보다 훨씬 크다.”는 명언과 함께 1만 달러를 기부했다. 1904년 그들 기금으로 남대문 밖, 서울역
맞은편에 있는 복숭아골(桃洞)에 병원을 신축하여 개원했는데, 기금 기부자의 이름을 따 세브란스병원
이라 불렀다. 세브란스는 이후에도 병원 건축비뿐만 아니라 운영비도 계속 지원했다.
이에 앞서 1899년 에비슨은 제중원에 의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선발하여 의학교육을 실시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1908년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그것이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세브란스의과대학의 효시였다. 세브란스병원이 소속되어 있는 세브란스의과대학은 1957년 설립자가
같은 북장로회 계열인 연희대학교과 통합하여 연세대학교가 되었다. 때문에 연세대학교는 광혜원이
설립된 해인 1885년을 개교의 해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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