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우체국 각 서비스 바로가기 우표포털 본문내용 바로가기 우표포털 하단 바로가기

한국우표포털서비스 K-stamp

  • 우표배움터

    • 우표의역사
    • 즐거운우표수집
  • 우표정보

    • 한국우표
    • 세계우표
  • 우표시장

    • 우표장터
    • 온라인 구매
    • 오프라인 구매
  • 우표문화체험

    • 우표박물관
    • 우표전시회
  • 우표로보는세상

    • 해외우취소식
    • 우편 130년
    • 우표 명작을 말하다
    • 우정이야기
    • 우표수집정보
    • 시간여행
    • 우표디자이너 인터뷰
    • 우표 뒷이야기
    • 대한민국 방방곡곡
    • 우정문화웹툰
  • 어린이 우표세상

    • 우표야놀자
    • 청소년 우표교실
    • 우정문화 동영상
    • 우표배경화면
  • 인기
우표스쿨 우표갤러리 우표 샵 우표박물관 우표로 보는 세상 쥬니어 스탬프

일화로 보는 우편 130년

일화로 보는 우편 130년 콘텐츠는 한국 우편에 대한 역사를 소소한 이야기로 풀어내는 공간입니다.

일화로 보는 우편 130년
제목 우정총국 청사의 주인은 어떻게 바뀌었나(1)
등록일 2014. 3. 4.
첨부파일 첨부파일없음
우정사업본부가 보유하고 있는 우체국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한때 ‘체신기념관’이라 불렸던
‘우정총국우체국’이다.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있는 이 건물은 1884년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인
우정총국이 개국할 때 그 청사로 사용하였기에 통신 분야에서는 가장 유서 깊은 건물이라 할 수 있다.
그처럼 우정총국 건물은 우리나라 통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건물이었다. 1884년 11월 18일 우리나라가
맨 처음 우편사업을 개시한 것은 서울에 있는 우정총국과 인천에 있는 분국 사이에서였다. 두 우체국에서
우편물을 접수하고 배달하는 한편, 중간 지점에서 만나 두 지역으로 가는 우편물을 교환하기도 했다.
당시 우정총국은 우리나라 우편 업무를 총괄하는 감독기관이자 실제로 우편 업무를 수행하는 현업기관
으로서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행정기관으로서 서양식의 새로운 행정제도를 실시한다는 막중한 사명을 안고
출범한 우정총국이 단명으로 끝난 것은 개국 기념식을 개최하던 날 그 곳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쓰러져 가는 나라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개혁밖에 없다고 판단한 개화파는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기로 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하필이면 그 장소를 개국 축하연을 개최하는 우정총국
으로 잡았던 것이다. 개화파의 핵심 인물인 홍영식이 우정총국 총판으로 연회의 주인 노릇을 하였기에
그 기회를 이용해 거사를 단행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개화파가 일으킨 쿠데타는 실패했다. 일본군의 힘을 빌려 수구파를 몰아내려던 갑신정변은
청군이 개입하면서 3일천하로 끝났다. 우정총국은 폐지되고 우편사업은 중단되었다. 그 뒤 그 건물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우편사업이 언제 재개될지 알 수 없어 한동안 방치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우정총국은 애초에 전의감으로 사용하던 건물이었다. 전의감(典醫監)이란 조선시대 궁중 안에서
사용하는 의약(醫藥)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었다. 통신사학자 진기홍이 고구한 바에 의하면,
전의감은 조선 초기에 설치한 의료기관으로 처음에는 왕실과 조신(朝臣)의 진료를 맡았는데, 뒤에
왕실의 진료를 전담하는 내의원(內醫院)이 설치되면서 조신의 치료를 맡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의료
기관으로는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惠民署) 셋이 있었는데, 각각 왕실과 벼슬아치, 서민 등 3개 계층의
치료를 담당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 전의감과 혜민서는 환자에게 약값을 받았으므로 오늘날의 국립병원에 해당된다 하겠다. 그들
병원은 정부에서 약재 등을 공급받고 있음에도 약값이 비싼 때문인지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전의감과 혜민서의 약값이 과중하여 환자가 약을 사서 쓰기가 어렵다 하니 약값을 다시 정하여
인민들로 하여금 이용에 편리케 하라.”
1472년 성종이 내린 전교였다.
“혜민서는 도민(都民)의 의약을 위하여 설치하고 전의감은 조신의 의약을 위하여 설치한 것인 바,
그 설치의 취지는 얼마나 좋은 것이겠습니까만, 조신도 전의의 약 한 첩을 얻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도민의 처지는 오죽 하겠습니까. 차라리 이 두 기관을 폐지하여 국비라도 절감함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조선 후기의 문신 이광좌는 1724년 영조에게 올린 상소에서 그렇게 주장했다. 그처럼 전의감은
벼슬아치들이 이용하는 의원이었으나, 약값이 비싸고 부실하게 운영되어 의료기관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의감 건물이 어떻게 해서 우정총국 청사로 사용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전의감이 공식으로 폐지된 것은 고종 31년인 1894년이었으나, 이미 그 전에 제 기능을 상실했던 것 같다.
1751년 영조에게 올린 상소에 “전의감은 막대한 재력만 허비할 뿐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으니 이를
폐지하여 그 경비를 다른 데 쓰도록 해야 한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어 그 같은 추측을 낳게 했다.
그처럼 전의감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은 관료화된 전의들의 자세에도 문제가 있었으나, 의학이
발달하면서 많은 민간인 의사와 약방이 생겨난 때문이기도 했다.
우정총국 청사가 된 전의감 건물이 언제 세워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전의감이 처음 설치될
당시에는 왕실의 의료기관으로 벼슬아치까지 치료하였으므로 궁궐 안에 세워졌을 수도 있으나, 왕실의
전담 의료기관인 내의원이 신설된 세종시대 이후에는 궁궐 밖에 있는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임진왜란 이후에는 전의감이 현재의 위치에 자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사실
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일설에 의하면, 전의감 건물은 인조 7년인 1629년에 중건 내지 중수되었다고 한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그 해 윤4월 왜국 사신 현방(玄方) 일행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나서 처음으로 서울에 오게 되었는데,
전의감을 그들의 숙소로 사용하게 되어 수백 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황급히 담장을 세우고 건물을 단청
하는 공사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본다면 전의감 건물은 그보다 훨씬 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체신기념관 시절의 우정총국
원래의 전의감 청사는 현재 남아 있는 우정총국 청사보다 훨씬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기록에 의하면,
정조 5년인 1781년, 전의감과 부설로 설치한 치종청(治腫廳)이 거느리고 있는 관원이 172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밖에 이속이나 잡역 수도 꽤 되었을 것이므로 그 많은 인원을 수용하려면 꽤 넓은
청사가 필요했을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우정총국은 대청(大廳) 건물로 전의감의 우두머리가 시무했던
곳이며, 크고 작은 문과 여러 부속 건물은 이미 헐려 없어졌다고 한다.
갑신정변 이후 한동안 방치되었던 우정총국 청사가 다시 공공기관으로 사용된 것은 한어학교
(漢語學校)를 개교할 때였다. 1897년 대한제국 정부는 한어학교를 세워 중국어를 가르치고 중국어
통역관을 양성했는데, 그때 우정총국 청사를 학교 건물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 뒤 1906년 민족의
선각자인 오세창이 그 곳에 야간학교를 개설했는데, 1908년 민족 사학의 요람인 중동학교가 그 학교를
이어 받아 정규 주간학교로 운영하면서 교사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 뒤 중동학교가 수송동으로 이전
하면서 그 건물은 일본인에게 불하되었다.
오세창이 야간학교로 사용하기 전에 그 건물은 한때 애국운동의 집회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1904년
애국단체인 보안회가 일제의 황무지 개간 요구를 저지하기 위해 그곳에서 매일 군중집회를 개최했다.
한반도를 침탈할 야욕을 품고 있던 일제는 황무지 개간권을 달라며 대한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였는데,
보안회를 중심으로 온 국민이 들고 일어나 반대함으로써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보안회라는 우국단체가 있어 이 건물에서 우국 동지 회원들이 모여 시국 강연을 하며 맹렬히 배일
(排日) 붐을 일으킴에 나는 어린 마음에도 곧잘 이 회를 찾아가서 창 너머로 귀를 기울이며 주먹을 불끈
쥐던 일이 생각난다.
당시의 내외 정세로 말하면, 청일전쟁에서 청국이 패전하고 우리나라에서 후퇴하자 노서아와 일본의
각축전이 벌어졌고, 노서아의 남하정책을 질시하는 세계열강의 태도가 작용하여 드디어 1904년 노일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 싸움은 일본이 승리를 거듭함에 따라 일본 세력은 우리나라를 뒤덮었고,
당시의 친로파 정부는 설마 일본이 이길 것이냐는 방관 태도였으나, 일본군의 승리가 계속되자 친로
정부는 즉각적으로 친일 정부로 돌변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정세아래 일본은 산림천택(山林川澤)의 개간 권리를 달라고 압력을 가해 왔으니, 산림천택의
권리를 달라는 것은 한국 영토를 강탈함과 무엇이 다른가라는 논지를 들어 당시의 애국 청년들은 회를
조직하고, 이에 대한 반대 연설과 데모를 종로 네거리에서 벌이기 시작했다. 이 회의 이름이 ‘보안회’라는
것이며, 10여일을 두고 종로에서 기세를 올리다 정부의 압력이 가해지자 장소를 전의감 자리인 이 건물로
옮겨와 뜰에서 또는 대청에서 집회를 하였다….
연설은 누구든지 마음대로 하였으며, 온종일 계속되어 끊일 줄 몰랐다. 나도 매일 이 집에 와서 연설
광경을 보고 들었으나, 초립동이라는 이유로 장내 입장은 못하고 창문 너머로 넘겨다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연사의 대부분은 임진왜란, 민중전 살해사건을 첫머리에 내세우고 나서 일본의 갖가지 야욕과
비행을 규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비분강개하고 원통해 하던 그들 연사들의 목소리는 지금도 귀에
쟁쟁하게 되살아나는 것만 같다.”
위의 글은 농촌사업가 홍병선이 ‘전의감(현 체신문화관)의 금석(今昔)’이라는 제목으로 체신부 기관지인
‘체신문화’ 1965년 8월호에 게재한 글의 일부였다. 당시 78세였던 노인이 61년 전의 일을 회상하며 쓴
글이었는데, 주인이 없던 우정총국 건물이 한때 애국운동의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음을 생생히 입증해
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일제시대에는 그 건물이 한때 경성중앙우편국장의 관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광복이 되자 적산가옥으로
처리되어 민간인 소유가 되었다.
체신부 간부 중에서 그 건물이 우정총국의 청사였음을 아는 사람은 나중에 통신사학자로 변신한 진기홍
이었다. 그는 일제시대 경성부사(京城府史)를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체신부에 재직하는 동안
줄곧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6ㆍ25전쟁 후에 찾아가자 피난민 세대가 살고 있었는데, 그 뒤 체신부
직원인 이관섭의 장인이 그 집을 구입했다 팔려고 내놓았다. 그러자 건물 뒤편이 충정공 민영환이 수절한
자리라 해서 민충정공기념사업회에서 사겠다 했고, 김옥균을 기리는 단체인 고균회(古筠會)에서도 사려
했다. 그런데 그곳이 사적지라는 이유로 서울시에서 반대했기에 매매가 이뤄지지 않았다.
체신기념관에 전시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
1956년 8월 동대문을 보수하는 공사를 하게 되면서 그 건물의 기와를 쓰기로 하고 매매계약을 체결했다.
전무국 국제통신과장이던 진기홍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 집이 헐리기 며칠 전이었다. 그는 즉시
체신부차관 최재호를 찾아가 체신부에서 그 건물을 매수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 건물이 매물로 나왔다면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 건물을 우리가 확보해서 체신기념관이나 체신박물관
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최재호는 즉석에서 찬성하고 사실 여부를 확인하도록 지시했다. 서울시에 문의한 결과 매매 사실이 틀림
없었다. 최재호는 체신부에서 그 건물을 매입하기로 하고 간부회의에 부쳤는데, 회계연도 중간이어서
체신부 예산으로는 매입하기 어려웠다. 그는 즉시 체신사업협회 상무이사 이응구를 불러 취지를 설명
하고 어떤 자금을 염출해서라도 그 건물을 매수하도록 당부했다. 이응구는 40년 동안 체신부에 근무하다
서울체신청장을 마지막으로 퇴직했기에 체신사업에 대한 애정이 누구보다 강했다. 그는 즉시 체신사업
협회 자금으로 그 건물을 매입하고 보수 작업까지 마쳤다. 당시 매입한 것은 우정총국 건물 31.5평과
대지 103평이었다.
당시의 체신부장관은 초대 참모총장을 지낸 바 있는 이응준이었다. 문화재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던
이응준은 생색을 내고 싶었던지 대통령 이승만에게 우정총국 청사를 매입한 과정을 설명하고 그 건물을
체신기념관으로 활용하겠다고 보고했다. 갑신정변 당시 우정총국 주변의 건물이 불탄 광경을 목격한
바 있는 이승만은 그 건물이 불탄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다시 확인해 보라고 하며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체신기념관으로 활용하겠다는 이응준의 말은 공수표로 끝났다. 우정총국 청사는 그때부터 체신부에서
관리했으나, 차관이 바뀌면서 그 건물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화로 보는 우편 130년 이전글 다음글 보기
이전글 이전글이 없습니다.
다음글 다음글이 없습니다.

기 발행된 모든 우표류(우표, 엽서, 원화, 우표책, 우표첩, 날짜도장)의 이미지 및 내용을 사용할 수 있으나, 이미지와 내용을 변경하여 사용시에는 우정사업본부의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