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시간여행 제17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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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0. 6. 25. |
첨부파일 | 첨부파일없음 |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한(韓), 조선(朝鮮), 동국(東國), 청구(靑丘), 해동(海東), 동이(東夷) 등과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 금수강산(錦繡江山), 소화(小華) 등의 국호로 불려왔다. 한(辰韓)/변한(弁韓)을 비롯하여, 1897년 8월 국호 로 정한 대한제국(大韓帝國),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 세운 대한민국임시정부, 그리고 오늘의 대한민국은 한(韓)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의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자유와 독립을 위해 세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신을 정통으로 이어받는다는 의미에서, 1948년 7월 1일 열린 제헌국회 제21차 회의에서 국호로 정하였다. 헌법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명시하였고, 영어로는 The Republic of Korea, 프랑스어로는 Republique de Coree, 독일어로는 die Republik Korea라고 표기한다. 우편번호란 우편물의 행선지를 숫자로 부호화한 것으로서 우편물의 배달우체국과 그 관할구역의 고유번호를 말한다.
우정사상 '제2의 우편탄생'이라고 불리는 우편번호제는 1959년 10월 영국 Noriuch시에서 세계 최초로 실시하였으며, 우리나라는 1966년부터 준비하여 1970년 7월 1일 전격 실시하였다. 신부)는 우편번호제의 실시를 축하하며 이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자 기념우표를 발행한바 있다. 제도실시 당시 5자리로 부여하였던 우편번호는 1988년 2월부터 여섯자리 숫자로 변경되어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다가오는 2012년 우편번호가 전면적으로 개편될 예정이다. 행정부처마다 따로 사용하는 번호체계를 하나로 통합하고 지금의 여섯자리에서 다섯자리 행정구역번호로 바뀌는 것이다. 한국방송공사, KBS TV가 1983년 6월 30일부터 4개월 여 동안 24시간 생방송으로 기획한 '이산 가족을 찾습니다' 프로그램은 전국을 오열로 출렁이게 했다.
방송되어 1만 1백89가족이 뜨거운 해후를 했다. 라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산의 아픔을 겪고 있는 가족들의 만남이 속히 이루어지길 기원해 본다. 구세군 창립자인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 1829.4.10~1912.8.20)는 영국 노팅험(Nottingham)에서 태어났으며, 1855년 6월, 나중 ‘구세군의 어머니’로 알려진 캐서린 멈포드와 결혼하여 9명의 아이를 키웠다.
세군(창립당시 '그리스도교 전도회_Christian Mission‘라 칭함)의 발단이 되었다. 신앙의 전통을 따르는 교리를 가지고 선도와 교육, 가난구제, 기타 자선 및 사회사업을 전개하였다. 가에서 지속적인 사회봉사를 펼치고 있다. 구세군의 창립자 부스가 평생의 목표를 발견한 곳은 바로 런던의 빈민굴에서 하던 설교를 통해서였으며 바로 그곳이 구세군이 시작된 곳이었다. 국제적인 전시회 및 회의 개최를 통한 국제교류의 장을 마련할 목적으로 1979년 3월 개관한 한국종합전시장인 코엑스는 개관당시 KOEX라는 영문표기를 사용하였다. 하는 국가 상징적 시설로 주목을 받았다.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가 붕괴됐다. 출근길 차량들로 붐비는 아침 7시40분쯤, 성수대교 북단 5번째와 6번째 교각 사이 상판 50여m가 "꽝" 소리와 함께 북쪽 상판 이음새가 먼저 끊어지고 이어 남쪽 상판이 떨어져 나갔다.
사고현장은 비바람 속에 휴지처럼 구겨진 추락차량과 피투성이가 된 희생자들로 뒤범벅돼 있었고 바닥과 천장이 닿을 정도로 찌그러진 버스에서 학생들의 책가방, 안경, 볼펜, 도시락들이 비죽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이날 사고로 무학 여중고생 9명을 포함, 모두 32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했다. 성수대교 참사는 단순히 콘크리트 건조물 하나가 무너진 붕괴사고가 아니었다. 내렸으며 한국적 성장신화의 부끄러운 이면을 드러내는 극적인 사건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하여 31개 연합국과 독일 사이에서 체결된 평화협정인 베르사유조약(Treaty of Versailles)은 1919년 6월 28일 파리 근교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조인되었으며 1920년 1월 10일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베르사유조약은 연합국 및 관계국에게는 평화협정의 일환이었으나, 독일 국민에게 매우 가혹한 것이 되었다. 아에게 각각 약간의 영토를 할양함으로써, 인구의 15%와 유럽에서의 영토의 10%를 잃었다. 트리아와의 합병도 금하여졌다. 특히, 무거운 짐이 된 것은 배상으로서, 1921년에 1,320억 마르크가 결정되었다. 베르사유조약은 세계전쟁의 비참한 경험을 두 번 다시 되 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평화유지 기구로서 ‘국제연맹’의 설립을 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ECSC(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 유럽석탄철강공동체)는 1952년 석탄·철강의 생산 및 판매를 위해 창설한 공동관리 협력기구이다. 에서 비롯한 것으로 공동규칙을 마련하여 카르텔을 단속하고 기업의 흡수·합병을 규제하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1775년 영국 국군과 아메리카 식민지군 사이에 무력충돌이 발생하여 식민지의 반영(反英)항쟁은 무력항쟁 단계로 접어들었다. 그때 만해도 식민지측은 본국으로부터 독립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 영제국(英帝國)의 일환으로서 머무를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대내외적으로 외국원조를 받아야 할 필요와 더불어 내부적으로는 급진파 대두, T.페인의 공화제 독립(共和制獨立)을 호소하는 정치 팜플렛 '커먼센스, common sense'등의 영향으로 독립의 기운이 고조되었고, 제2차 대륙회의(大陸會議)는 76년 5월 각 식민
지에 대하여 새정부의 수립을 권고하였다. 이 기초하였고, 역시 위원인 B.프랭클린과 J.애덤스가 약간 가필하여 대륙회의에 제출하여 7월 4일 전원일치로 가결, 공포되었다. 부의 정당성은 ‘피치자(被治者)의 동의(同意)’에 유래한 것이라고 말하여 혁명권(革命權)의 존재를 주장하였다. 이탈리아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을 받는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 1807.7.4~1882.6.2)는 니스에서 선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로 피신하였다. 프랑스에서 남미로 건너간 그는 리오그란데와 우루과이의 독립전쟁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참가하여 나폴레옹 3세의 무력간섭에 대한 방어전을 지휘하였다. 이듬해 공화정부가 붕괴되자 뉴욕으로 망명하였다가 1854년 귀국하여 카프레라섬에서 살았다. 프스 의용대를 지휘하였고, 이듬해 5월에는 ‘붉은 셔츠대’를 조직하여 남이탈리아왕국을 점령, 사르디니아왕에 바침으로써 이탈리아통일에 기여하였다. 훨씬 잘 수행했다. 게다가 자신의 군사적·정치적 재능을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대의(大義)에 이용한 것이 당시의 조류와 잘 맞아떨어져 그에게 커다란 갈채를 안겨주었다. 더불어 자신의 부귀영화에는 관심이 없는 정직한 인격으로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다. 프랑스 출신의 풍경화가인 앙리 아르피니(Henri Harpignies, 1819. 6. 28~1916. 8. 28)는 27세 때 미술에 전념하여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공부하며 그림을 그렸는데, 차츰 코로(Camille Corot, 1796~1875)의 영향을 받아 인상주의 풍경 화에 두각을 보였다. 그의 풍경화는 구조적인 데생과 폭넓은 처리가 특징이며 은색이 주조를 이룬다. 1861년의 '파리 살롱전'에서 처음으로 큰 성공을 거둔 뒤 전람회의 고정 출품자가 되었다. 프랑스의 소설가 생텍쥐페리(Antoine-Marie-Roger de Saint-Exupéry, 1900.6.29~1944.7.31)가 쓴 불후의 명작 ‘어린왕자’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로서 인간의 고독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과 해답을 제시한 시적이며 아름다운 분위기의 휴머니스틱 한 작품이다. 신적 유대에서 찾으려 했던 몰락한 귀족가문 출신이었던 그는 군복무 동안 조종사 면허를 취득한 후, 1926년 툴루즈의 라테코에르사(社)에 들어가 아프리카 북서부와 남대서양 및 남아메리카를 통과하는 항공우편항로를 개설하는 데 이바지했다. 험한 모험이야말로 인간의 소명을 가장 숭고하게 실현하는 것이라고 찬양했다. 으로서 A.지드의 격찬을 받으며 페미나상(賞)을 받았다. '진정한 노력 없이도 성공하는 방법, How to Succeed in Buisiness Without Really Trying'으로 1962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곡가겸 작사가인 로서(Loesser, Frank, 1910.06.29~1969.07.28). 버지는 어린시절 대중가요에 대한 그의 관심을 돌리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는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고, 뉴욕 시티 칼리지를 중퇴한 후로는 1920년대 말 음악출판사에서 작사가의 자리를 얻을 때까지 음악과는 상관없는 여러 직업을 전 전했다. 월터에 의해 녹음되기 전까지는 거의 발표되지 않았다. 1936년 할리우드로 간 그는 그곳에서 작사가로 서 재능을 인정받았다. 마가렛 미첼(Margaret Mitchell, 1900.11.8~1949.8.16)의 유일한 작품으로 집필기간이 무려 10년(1926~36)에 이르고, 천페이지가 넘는 대작으로 평가받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는 총 5부작으로 이루어진 대하드라마다. 시대의 급변하는 사회상을 조지아 주를 배경으로 아름답고 강인한 스칼렛 오하라의 인생과 파란만장한 사랑이야기를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은, 간결한 문체와 정교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인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1936년 퓰리처상을 받았으며, 1939년 빅터 프레밍 감독이 비비안 리(스칼렛 역), 클라크 게이블(레트 역) 주연으로 영화화되어 아카데미상 10개 부문을 휩쓸기도 하였다. 한편 1991년 미국 소설가 A.리플리가 속편격인 '스칼렛'을 써서 40여 개국에서 번역되었다. 회반죽 장식가로 건축계에 입문한 독일의 건축가 치머만(Dominikus Zimmermann, 1685. 6. 30 ~ 1766. 11. 16)은 바로크 건축 전문가로, 그가 비스에 지은 교회는 바로크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이 구조물은 가볍고 경쾌한 구조, 우아한 채색으로 물이 흐르는 듯 물결치는 회반죽 장식과 프레스코 때문에 로코코 양식의 참모습을 띤 첫 번째 교회로 평가 받는다. 보스턴 출생으로 독학으로 공부한 미국의 화가 코플리(John Singleton Copley, 1738.7.3~1815.9.9)는 초상화를 주로 그렸으나 역사화에도 관심을 보였다. 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생생함과 날카로움을 그의 작품에 부여해주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부국장을 7년간 지내기도 한 미국의 물리학자 드라이든(1898. 7. 2~1965. 12. 2)은 1920년 볼티모어의 존스홉킨스 대학을 졸업한 뒤 워싱턴에 있는 국립표준국의 공기역학과 과장으로 임명되었다. 도 미사일(Bat radar-homing missile)을 개발했는데,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미해군이 대일본전에 사용 되었다. 국항공자문위원회(NACA)의 항공학 연구부 책임자가 되었다. 을 얻었다. 1958년 NASA의 부국장이 되었고, 1962년에는 미·소 공동 우주계획을 위한 협상을 이끌어 낸 장본인으로 기록된다. 패스파인더는 '선도자'라는 뜻으로 화성 탐사선의 이름이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진행한 화성 탐사 계획 '디스커버리 프로젝트' 중 하나로 화성에 생명체가 존재하는지 여부와 과학기지 건설을 위한 각종 조사 작업 등을 목표로 하였다. 였다. 우주 로켓 발사 역사상 최초로 착륙에 에어백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화성 표면 사진을 지구로 보내왔다. 패스파인더호 이후 랜더호와 글로벌 서베이어호가 계속해서 화성을 탐사했다. 지속되어온 화성탐사 연구는 2008년 5월 25일 화성 탐사로봇 피닉스호가 "로봇팔을 이용해 화성 표면에서 파낸 물체의 사진을 분석한 결과 얼음이라는 증거를 찾아냈다"고 NASA가 밝힌 바 있다. 화성은 미·러 양국을 위시하여 새로운 우주개발의 전초기지 대상이 되고 있다. [노벨평화상] 국제노동기구(ILO) 창설자, 주오 출생
프랑스의 사회주의자이자 노동조합 지도자였던 주오(Léon Jouhaux, 1879. 7. 1~1954. 4. 28) 16세부터 성냥공장에서 일했으며, 곧 혁명적 생디칼리슴의 지도적인 선전가로 성장했다. [노벨문학상] "행복하다는 것은 소망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 헤르만헤세
남독일 뷔르템베르크의 칼프에서 출생한 헤세(Hermann Hesse, 1877.7.2~1962.8.9)는 천성적인 자연아(自然兒)로서, 개성에 눈뜨면서 미래의 시인을 꿈꾸며 신학교(마울브론신학대학)의 속박된 기숙사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그곳을 탈주, 한때는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한 것으로 전해진다. 독일 출생의 플랑드르의 화가였던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6.28~1640.5.30)는 바로크 시대 플랑드르 제일의 화가로서 날로 높아가는 명성과 많은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특유의 화려하고 장대한 예술을 펼쳐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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