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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여행

인물과 역사를 바로 알고 현재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 봄으로써 선조들의 지혜를 알아 봅시다.

지난 시간여행
제목 시간여행 제170호
등록일 2010. 6. 3.
첨부파일 첨부파일없음

천문학자 카시니

이주의 이벤트와 시간여행 구독, 추천하기 시간여행 구독하기 내용시작이탈리아계(系) 프랑스의 천문학자인 카시니(Jean Dominique Cassini, 1625.6.8~1712.9.14)는 성직자가 되기 위해 공부하던 중에 G.갈릴레이의 제자인 카발리엘리(1598~1647)에게서 천문학을 배우고, 1650년 볼로냐 대학의 천문학 교수가 되었다. 목성으로부터 대적점의 변화를 관찰하여 목성의 자전주기(自轉周期)가 9시간 56분임을

밝혔고, 비슷한 방법으로 화성의 자전주기가 24시간 40분임을 확인하기도 하였다. 카시니는 1669년 프랑스 국왕의 초청으로 파리 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되었고, 1671년 파리천문대 초대 장으로 취임하여 활약하였다. 1675년에는 토성의 고

리에서 이른바 카시니간극(間隙, 토성의 고리 중에서 A고리와 B고리 사이의 폭 수천km의 틈)을 발견하였다. 또한 황도광(黃道光)을 최초로 관측함은 물론, 달의 자전축이 황도면에 수직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달의 칭동(秤動)을 볼 수 있음

을 확인하였다. 카시니는 새로운 이념과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성격의 소유자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했지만 그의 천문학 활동은 17~18세기의 중요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사회
철도수송시대의 개막

내용시작영국의 발명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 1781.6.9 ~ 1848)은 1825년 영국의 달링턴에서 스톡턴까지 450명의 승객을 태운 최초의 실용적 증기관차 ‘엑티브’호의 시운전을 성공시킴으로서 철도수송시대를 개막하였다. 탄광 기관부

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부터 다양한 기관에 대한 기술과 해박한 지식을 습득하였던 그는 석탄운반용 기관차 ‘블루처’를 개발함으로써 생산된 석탄 운반방식의 획기적인 개선을 하였다. ‘블루처’의 성공이후 1823년 기관차 공장을 설립한 스티븐

철도수송시대의 개막

슨은 보다 효율적이고 강력한 힘을 얻기 위한 증기기관의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증기분사’방식이라는 새로운 시스템의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실용적 교통

수단을 대중에게 선보이게 되었다. 1825년 ‘엑티브’호에 이어 1830년 9월 15일 리버풀-맨체스터 구간에 ‘로켓호’를 개통시키며 본격적인 철도운송사업이 시작되었으며 이

후 스티븐슨이 개발한 증기관차는 영국과 유럽, 북아메리카 전역에 철도건설의 박차를 가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20세기의 위대한 건축가

내용시작미국 건축의 위대한 스승이자 자존심으로 평가되는 라이트(Frank Lloyd Wright, 1867.6.8~1959.4.9)는 유럽 건축에 경도된 미국의 건축 문화에 반기를 들고 성공적인 건축가가 되기 위한 필수 과정으로 생각되었던 유럽 유학 제안도 거절한 채 독자적인 유기적 건축 이론을 수립한 인물이다. 그는 건축이

20세기의 위대한 건축가

란 자연을 지배하고 변형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주변에 녹아 공간을 디자인하는 것이라 보았으며 미국의 주택은 미국의 자연 환경과 미국인들의 생활에 가장 적합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1년부터 1930년대 초까지, 라이트는 이혼과 스캔들, 방화 사건으로 인한 부인과 두 아들의 죽음 등 개

인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건축 활동에 있어서도 다소 침체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일본의 주거 형태에서 발견한 ‘단순함의 미학’을 수용하면서 자연과 융합하는 “데이코쿠 호텔”건축을 통해서 라이트의 건축 철학을 완벽하게 구현하였고, 독창성이 한껏 발휘된 가든 리조트로 불리는 ‘미드웨이 가든’등을 발

표하였다. 그 후, “낙수장(Falling water)”이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진 조셉 카우프만 저택(1936)을 비롯하여, “프라이스 타워, (1956)”, “유니테리언 교회, (1946)” 등 탁월한 건축물들을 선보였으며, [탤리에신 펠로우십]을 조성하여 종합적이고 실제적인 건축 교육에도 힘썼다.

정치
절대왕정을 확립한 러시아의 황제 표트르 1세

내용시작러시아 로마노프왕조 제4대의 황제(재위 1682〜1725)였던 표트르 1세(Pyotr I, 1672.6.9 ~ 1725.2.8 )는 터키와의 전쟁과 스웨덴과 벌인 21년간의 지루한 북방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러시아의 영토 확장과 유럽에서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1721년 원로원으로부터 황제의 칭호와 함께 ‘표트르대제’라 불리며 러시아의 절대주의왕정을 확립하였다. 알렉세이 황제의 후처 ‘나타리아’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1

0세 때 일어난 궁중혁명으로 크렘린에서 쫓겨나 정규 교육이라고는 거의 받지 못하고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여 당시 러시아에 주류하던 외국인들로부터 포술과 조선술 등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배워 익혔고 1689년 권력다툼에서 승리하여 제위에 오른 후에는 외국 기술자들을 적극 등용하여 새로운 기술의 도입에 힘쓰는 한편 국내의 장인들을 모아 강력한 함대를 구성하는 등 군비증강에 힘썼다. 독창적이고 명민한 지성을 소유한 표트

절대왕정을 확립한 러시아의 황제 표트르 1세

르 1세는 용기 있고 근면하여 제위기간동안 러시아의 전반적인 이익

과 그 자신의 특별한 계획을 일관성 있게 지탱하기 위해 복잡하게

변화하는 상황을 냉정하게 평가한 인물로써 평가된다.

문화
‘왜 나는 태양이 만들어 낸 장관을 캔버스에 그리는 걸 주저했을까!’ - 고갱

내용시작프랑스 후기인상파 화가이자, 20세기 회화 출현의 근원을 제시한 고갱(Paul Gauguin, 1848.6.7~1903.5.8)은 1848년 6월 7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고갱은 그의 나이 35세가 되어서야 전업 작가의 길로 뛰어들었다.

얼마 후 빈센트 반 고흐와의 만남이 시작되고 프랑스 남부의 아를에서 함께 지내기도 했으나, 1888년 12월 어느 날 고흐는 고갱과 다툰 뒤 스스로 자신의 귀를 잘라 버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두 사람은 결별했다.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정치

‘왜 나는 태양이 만들어 낸 장관을 캔버스에 그리는 걸 주저했을까!’ - 고갱

적 혼란 속에서 문명에 대한 혐오감을 견디지 못하고 1891년 타히티행 배에 홀로 올랐다.
타히티에 간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유럽인 우월주의의 발로라고 지적하는 비판이 적잖은 것도 사실이지

만, 더욱 중요한 점은 그가 타히티에서 인류 미술사에 길이 남는 걸작들을 창조해 냈다는 사실이다.
고갱은 타히티에서 ‘왜 나는 태양이 만들어 낸 장관을 캔버스에 그리는 걸 주저했을까’ 하고 반성했

다. 고갱 그림의 생명력은 태양의 세례 덕분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상징성과 내면성, 그리고 비(非)자연주의적 경향은 20세기 회화가 출현하는 데 원초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프랑스 소설가, 저널리스트 발레스

내용시작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발레스(Jules-Louis-Joseph Valles, 1832. 6. 10~1885. 2. 14)는 파리코뮌의 중요한 맴버로 활동하며 빈민과 소외계층에 대한 동정적 논설과 프랑스 자본가 계급에 대한 공격으로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보불전쟁과 함께 찾아온 프랑스 혼란기에 민중의 소리를 대변하는 ‘인민의 외침 (Le Cri du peuple)’을 창간하여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그는 정부로부

터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1883까지 망명생활을 하였다. 귀국 후 중단되었던 ‘인민의 외침 (Le Cri du peuple)’을 다시 간행하였으며 자전적 소설 ‘자크 뱅트라(Jacques Vingtras)’라와 ‘소년 (L’Enfant, 1879)’, ‘대학입학자격자(Le Bachelier, 1881)’ 등의 대표작을 통해 동시대 사회적 문제점 등을 비판하였다.

프랑스 소설가, 저널리스트 발레스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작곡가 슈만

내용시작로베르트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6. 8 - 1856.7.29)은 낭만주의 음악의 대표적인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로 유명하다. 그는 부모의 반대로 1828년 법률 공부를 위해 라이프치히대학
에 입학하기도 하였으나, 그 곳에

서 피아노 및 음악이론을 배우고 독학으로 작곡 연구도 하였다. 참신한 필치로 음악평론도 쓰기 시작하여 쇼팽 등의 새로운 음악가를 소개하였다. 1832년 오른손 넷째 손가락을 다치자 피아니스트가 될 꿈을 단념하고, 이때부터 작곡과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작곡가 슈만

평론만을 지향하여 “나비”, “파가니니의 카프리치오에 의한 연습곡” 등의 피아노곡을 작곡하였으며, “음악신보, Neue Zeitschrift fur M

usik”를 발행하여 낭만주의의 새바람을 불어넣었다. 슈만의 작품은 고전파 작곡가처럼 모든 분야에 걸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질적으

로 가장 뛰어나고 작품수가 많은 것은 피아노독주곡과 가곡이다.

스페인의 화가 포르투니

내용시작미술에 대한 타고난 재능의 소유자였던 포르투니는 세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은 작품에서부터 회화적 보고 형식의 커다란 대작에 이르기까지 19세기 중반 힘찬 기법과 일화적인 주제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12살 때 부모를 잃고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지만 그의 재능을 인정한 가족들은 어려서부터 미술교육을 시켰다. 바르셀로나 아카데미에서 4년간 장학생으로 학업을 마친 포르투니는 1858년 로마 대상을 받으며 이탈리

아에 건너가 공부를 계속하였다. 1860년 정부의 지시로 6개월간 종군화가로 지내며 경험한 모로코에서의 생활은 포르투니의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스페인과 모로코의 전쟁을 그리며 아프리카의 광활한 대지와 강렬한 색채의 매력에 반해버린 포르투니는 이후 현장감 있고 생동감 넘치는 화풍의 대작을 많이 남겼다. 생애의 대부분을 로마에서 보내며 파리의 미술상을 통해 그림을 팔아 많은 부와 함께 유명인사로서 커다란 명성을 얻었다.

스페인의 화가 포르투니

안네의 일기를 쓴 안네 프랑크 출생

내용시작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복한 독일계 유태인 일가에서 태어난 그녀는 나치의 유태인 박해를 피해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공하자 생활환경이 악화되었다. 1941년부터 나치의 전국적인 유태인 사냥이 빈번히 행해지기 시작하면서 위기적 상황에 처한 프랭크 일가는 1942년 유태인 수용소로 이주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안네의 아버지 직장 사무실에

피신처를 마련하고 숨어 지내게 된다. 숨 막히는 하루하루를 보내던 일가는 1944년 게슈타포에 발각되어 유태인 강제수용소로 보내졌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체력이 쇄약해진 안네와 그의 언니는 전염병에 걸려 사망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안네의 아버지 오토는 네덜란드로 돌아와 그의 친구들이 보관해온 안네 일가의 유품들을 돌려받아 그중 자신의 딸이 써놓은 기록을 정리해 1947년

안네의 일기를 쓴 안네 프랑크 출생

‘어린 소녀의 일기(Het Achterhuis)’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암스테르담의 은둔지에서 보낸 2년간의 생활을, 사춘기소녀의 시각과 감성을 더해 활달한 필치로 묘사된 이 기록은 훗날 ‘안네의 일기’로 알려지며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

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녀와 가족이 숨어 지내던 은둔지는 현재 ‘안네 프랑크 재단’에서 보존하고 있으며 네덜란드 적십자는 1945년 3월 31일을 그녀의 공식적인 사망일로 지정하였다. 2004년 10월 3일, 네덜란드의 사법당국은

독일로부터 망명과 동시에 무국적으로 세상을 떠난 그녀에게 네덜란드 시민권을 주어야 한다는 요청에 대하여 사후의 시민권 부여는 불가능하다는 발표를 하였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사실이다.

내용시작프랑스의 화가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6.10~1877)는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사실적인 일들에 한정된 명쾌한 구성의 사실적 작풍으로 19세기 후반의 젊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법학도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화가

의 길로 접어든 쿠르베는 렘브란트의 화풍, 베네치아 그리고 에스파냐 화풍을 바탕으로 점차 자신의 색을 내기 시작하였다. 1844년 살롱전에서 입상하면서 두각을 나타낸 쿠르베는 자신의 고유한 화풍인 사실주의 색채를 띤 그림을 발표하

눈에 보이는 것만이 사실이다.

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장중한 스케일의 너무나도 사실적인 그의 그림들은 화단으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급기야 쿠르베는 스스로 ‘사실주의’라는 기치를 내걸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묘사할' 것을 주장하며 당시의 주류였던 고전주의풍의 이상화나 낭만주의적인 공상표현을 배격하였다. 이러한 쿠르베의 사실주의적 화풍

은 미술사적 관점에서 사물에 대한 정확한 관찰에서 비롯되는 사실적 표현기법의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화가 실레

내용시작고딕적인 선으로 이루어진 인체에 대한 강렬한 표현으로 이루어진 실레의 작품은 비평가들의 구설수에 오르내리며 선정성 시비에 휘말리기도 하였지만 실레를 20세기 오스트리아의 현대미술을 이끈 장본인으로 평가받게 하였다. 학창시절 독일 유겐트스틸(아르누보의 독일식 표현)운동에 영향을 받았던 실레는 보수적인 학교에 반발하여 몇몇 동료들과 ‘새로운 예술가 그룹’을 결성하고 3년 만에 학교를 그만

두었다. 그 무렵 빈 분리파를 이끌던 ‘오스트리아 화가 연맹’의 클림트와 만남은 실레를 새로운 영감의 세계로 이끌었다. 실레의 천재성을 파악한 클림트는 아낌없는 충고와 찬사를 그에게 보냈다. 그러나 클림트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실레였지만 그가 남긴 많은 작품들은 클림트의 절제된 경계를 넘어 금단의 영역까지 밀고나가는 파격적이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표현한 것들이었다.

오스트리아의 화가 실레

독일의 동화작가 호프만

내용시작하인리히 호프만박사는 정신과 의사로서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하이델베르크와 할레의 대학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국립정신병원장을 지내며 다수의 아동도서와 정신병 치료법에 관한 책을 저술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더벅머리 아이’는 자신의 아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직접 만들어 준

그림책에 등장하는 사고뭉치 아이의 이름이다. 1844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3 살짜리 아이에게 선물할만한 책을 찾지 못한 그는 자신이 직접 빈 노트에 글과 그림을 그려 넣어 선물을 하게 되었고 이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출판사에서 정식으로 출판하게 된 것이다. ‘3~6세 어린이들을 위한 예쁘게 칠해

독일의 동화작가 호프만

진 그림 15장(1845)’이라는 제목을 달고서 출판된 이 책은 10가지의 짧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야기마다 용모가 단정하지 못한 아

이, 난폭한 아이, 친구를 놀리는 아이 등 남에게 지적 받을 만한 문제아들이 등장해 나쁜 행동 때문에 벌 받는 인과응보의 교훈을 줌으로

써 아이들이 자신의 나쁜 습관들을 재미있는 동화책을 통해 느낄 수 있도록 구성되어있다.

과학
원동기시대를 개막한 기술자 오토

내용시작독일의 기계공학자 오토(Nikolaus August Otto, 1832.6.10~1891)는 산업혁명을 가져온 증기기관을 대체할 획기적인 4행정 내연기관을 개발하여 현대적 가솔린 기관을 탄생시키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쾰른의 상인이었던 그는 프랑스 기술자 르누아르의 가솔린기관 발명에

자극을 받아 증기기관을 대신할 수 있는 동력원의 연구를 시작하였다. 1961년 독자적인 가솔린기관의 개발에 성공한 오토는 1867년 독일의 실업가 ‘오이젠 랑겐’과 동업으로 파리 만국박람회에 개량된 가솔린기관을 출품해 우수한 성능을 인정받으며 커다란 성과를 얻었다. 이

원동기시대를 개막한 기술자 오토

후 지속적인 개량을 통해 1876년 1회의 폭발에 대해 피스톤 행정이 4

번인 4행정 내연기관인 “오토사이클”을 발표하여 당시 산업의 원동

력이었던 증기기관을 대치하는 원동기시대를 개막하였다.

사람이 물속에서 숨을 쉰다면??

내용시작‘아쿠아렁(aqualung)’이란 고압으로 압축된 공기가 들어있어 자급식(自給式) 수중 호흡이 가능하도록 만든 기구로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산소통이라 불리는 기계를 말한다. 최초에는 군사용으로 제작되었으나 오늘날 해양탐사, 구조, 수

중레포츠 등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장비가 되었다. 우리에게는 스쿠바로 잘 알려진 이 장비의 발명가는 프랑스의 해양 학자이자 영화제작자인 쿠스토(Jacques-Yves Cousteau, 1910.6.11~1997)라는 사람이다.

사람이 물속에서 숨을 쉰다면??

해군 소위시절 불의의 사고로 비행기조종사의 꿈을 접은 그는 회복기간 동안 새로운 잠수법을 고안해 내었고 더 나아가 이 잠수용 수중호흡기를 고안해 내기에 이르렀다. 이밖에도 해저탐사용 잠수정, 수중카메라 등 다양한 방면에 걸쳐 수중 장비들을 개발했으며 해양학자들과 함께 홍해를 비롯한 세계각지

의 해양을 탐사활동을 벌였다. 체계적인 해양탐사 연구 활동을 위한 해양단체의 조직과 더불어 많은 연구기구의 설립에 적극적이었던 그는 수중촬영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많은 연구를 진행시켰다. 프레데리크 뒤마와 함께 쓴 ‘고요한 세계(Le Monde du silence,1952)’를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1956년 칸국

제영화제 황금종려상과 1957년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며 카메라와 수중 촬영술을 발달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으며, 1956년 해군에서 전역 후 모나코 해양박물관장을 거쳐 바다의 환경을 보존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비영리 환경단체인 쿠스토협회를 설립했다.

최초의 휴대용사진기 발명가

내용시작사진 건판의 공장생산, 1884년 롤 필름 제작의 성공, 1888년 최초의 휴대용 카메라 고안, 1889년 최초의 셀룰로이드 필름 발명, 1928년 천연색 필름 발명.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스트먼 코닥사의 역사이자 바로 사진의 역사이다. 금융회사에서 잠시 근무 한 적이 있는 이스트먼은 1884년 롤 필름 제작의 성공에 힘입어 100

장의 필름이 두루마리처럼 말려 들어있는 상자 모양의 작은 사진기를 고안해 내었다. 당시 시판중인 카메라들이 있었지만 일반인들이 사용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아 대중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때를 맞춰 ‘단추를 누르세요, 뒷일은 저희들이 맡겠습니다.’라는 선전 문구와 함께 간단히 손으로 쥐고 촬영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100

최초의 휴대용사진기 발명가

장의 필름이 장착된 휴대용 카메라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발명품이었고 단숨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초기 제품은 장착된 모든 필름의 촬영이 끝나면 카메라체로 공장에 보내져 현상을 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지속적인 성능개선

과 함께 새로운 필름과 상품의 개발로 이어져 이스트먼에게 커다란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1927년에 이르러 이스트먼코닥사는 미국의 사진업계를 사실상 독점하였고 오늘날 까지도 이 분야에서 미국 최대의 기업 중 하나로 손꼽히며 사진

의 역사를 장식하고 있다. 이스트먼은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복지향상을 위해 노력한 경영주였고 코닥사의 성공으로 얻은 막대한 부의 대부분을 대학에 기부한 미국의 대표적인 자선가로서 기억되고 있다.

증기터빈 발명가 파슨스

내용시작천문학자의 아들인 영국의 공학자 파슨스는 더블린과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한 후 1877년 뉴캐슬에 있는 기계제작소에 사원으로 입사하여 여러 공장을 거치면서 일을 배웠다. 1899년 증기 터빈, 발전기 등을 제작하는 자신의 공장을 세운 그는 새로운 형식의 반동식 증기터빈을 발명하였다. 당시까지의 증기터빈은 노즐로 증기를 분출시켜 날개를 회전시키는 충동식 터빈이 발명되어 겨우 실용화 단계에 접어든

시기였으나 파슨스의 발명으로 말미암아 선박의 추진방식 등에 이용되며 다양한 방면에서 본격적인 실용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피스톤의 왕복운동으로 에너지를 얻는 증기기관과는 달리 회전운동만으로 장시간 연속운전이 가능한 증기터빈의 실용화는 선박의 추진방식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으며 오늘날 대출력을 요구하는 발전소, 공장 등의 원동기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증기터빈 발명가 파슨스

그레고리력을 제정한 ‘유아고문자’ 그레고리오 13세

내용시작이탈리아의 그리스도교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교황 그레고리오 13세(Gregorius XIII, 1502.6.7~1585.4.10)는 가톨릭교회의 내부개혁과 반종교 개혁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온건한 유명론(唯名論)을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에게 영향을 받은 그는 사람에게는 신의 은총없이 오직 자유의지만으로 도덕생활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강조

그레고리력을 제정한 ‘유아고문자’ 그레고리오 13세

했으며 의인들을 값없이 선택하고 그들에게 영원한 영광을 주기로 예정한 하느님의 자율은 초월적인 원리라고 주장했다.
그는 펠라기우스주의와는 반대로 그리스도교인이 열망하는 하느님

을 만나는 데 필요한 완전한 사랑을 얻으려면 선한 의지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주장했으며, 더 나아가 세례를 받지 않고 죽는 유아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여 '유아 고문자'라는 별

명을 얻기도 했다.
동양 선교에도 노력한 것으로 알려지며, 1582년에는 율리우스력을 수정하여 그레고리력(曆)을 제정하였다.

금주의 노벨상

[노벨평화상] 최초의 여성 평화주의자

최초의 여성 평화주의자 내용시작최초의 여성 평화주의자의 한 사람이자 오스트리아의 여류작가인 주트 너(Bertha Felice Sophie von Suttner, 1843.6.9~1914)는 여성의 입장에서 전쟁의 해악과 더불어 반전을 부르짖은 소설 “Die Waffen Nieder(1889)”을 통해 유럽 전체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오스트리아 평화주의협회를 창설하는 등 평화운동에 열심히 동참하였다. 주트너는 ‘알프레드 노벨’과의 서신왕래를 통해 인류의 평화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전달하게에 힘썼다. 그녀의 평화주의는 과학적·자유주의적 바탕 위에 H. T. 버클, 허버트 스펜서, 찰스 다윈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평화운동에 헌신한 그녀는 190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노벨 생리학·의학상] 벨기에의 세균학자 보르데

벨기에의 세균학자 보르데 내용시작파리의 파스퇴르 연구소 시절 진행한 혈청에 관한 연구로 전염병의 진단과 치료에 매우 중대한 발전을 가져온 면역인자를 발견하여 이 공로로 1919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였다. 교육자의 아들로 태어난 보르데는 일찍부터 자연과학에 흥미를 가졌다. 16세부터는 의학에 목표를 두고 공부하여 브뤼셀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정부 장학금으로 1894년 파리의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공부를 하였다. 메치니코프에게서 면역학을 배운 그는 1901년 브뤼셀 파스퇴르연구소의 초대 소장을 역임하였다. 보르데는 백일해 원인균의 발견을 비롯하여 수많은 병원균에 대한 혈청반응 검사법의 정립 등 혈청학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노벨 물리학상] X-선 산란에 대한 연구, 영국 물리학자 바클라

X-선 산란에 대한 연구, 영국 물리학자 바클라 내용시작런던 대학교 및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교수직을 떠나지 않았던 영국의 물리학자 바클라(Charles Glover Barkla, 1877.6.7~1944.10.25).
그는 특성(特性) X선에 관한 발견과 연구, 2차 X선이 산란선(散亂線)과 형광선(螢光線)으로 이루어진다는 지적, X선의 편광현상(偏光現象)의 발견, 흡수(吸收) 및 사진작용, X선 산란에 의한 원자(原子) 내 전자수(電子數)의 추정, X선에 대한 양자론(量子論)의 적용 가능성과 한계 등에 대한 연구로 1917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온라인미술관
영국의 풍경화가 컨스터블
영국의 풍경화가 컨스터블

내용시작서양 회화의 역사에 있어서 19세기 이전에는 신화, 성서의 에피소드, 역사상의 대사건이나 위인 등을 테마로 한 ‘역사화’가 주를 이루었고 ‘풍경화’는 역사화의 이야기 배경으로서의 의미 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17 세기 네덜란드에서는 풍경화가 발달했지만, 유럽 전 국토에서 풍경화가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의 바르비종파, 영국의 ‘윌리엄 터너’나 ‘컨스터블’이 등장하는 19세기에 들어서였다.
컨스터블은 1776년, 런던의 북동에 있는 서퍽주 작은 마을에서 유복한 제분업자의 아이로 태어났다. 비교적 늦게 화가의 길로 들어선 그는 1799년 23세에 왕립아카데미 부속 미술 학교의 견습생으로서 미술공부를 시작하였고 1802년 아카데미의 전람회에 처음으로 출품하였다. 초기 그의 작품들은 어색하고 서툴러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나 컨스터블은 자신의 결점을 보안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수년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동시대에 찾아보기 힘든 자신만의 독특하고 탁월한 화법을 완성하였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깊은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을 발표 하였다. 1823년 50이 넘은 나이에 들어서야 왕립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될 수 있었던 컨스터블은, 대부분의 유명 화가들이 어려서부터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일찍이 성공의 길을 걸은 것과 반대로 그림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풍경화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대담하고 극적인 화면을 창조한 동시대의 대표적인 낭만파화가 ‘윌리엄 터너’와 대비해 야외에서 직접 그림을 그리며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의 효과를 뛰어난 색감으로 표현한 컨스터블은 평생 고향 서퍽 주변의 친숙한 풍경을 그린 작품들을 통해 들라크루아, 제리코 등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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